[삶과 종교] 연꽃이 된 소녀의 이야기

옛날 옛적에 한 소녀가 있었다. 소녀는 사는 게 너무나 괴로웠다. 소녀는 괴로움을 피해 속세를 떠났다. 수도승이 되기 위해 산으로 올라갔다. 산에서 한 스승을 만났다. 스승이 소녀에게 물었다. “여기에는 왜 왔니?” 소녀는 스승에게 대답했다. “괴로움을 피해 여기에 왔습니다.” 스승은 소녀를 지그시 쳐다봤다. 그리고 물었다. “이곳이 괴로우면 다른 곳으로 또 피하겠네.” 소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쨌거나 소녀는 수도승이 됐다. 괴로움을 피해 이곳에 왔지만 이곳조차도 소녀가 상상한 것과는 너무나 달랐다. 결국 소녀는 환속을 결심했다. 떠나려는 소녀를 향해 스승이 물었다. “여기에서 왜 떠나려고 하니?” 소녀는 스승에게 대답했다. “제가 생각한 것과 너무 달라요.” 소녀는 다시 세상에 내려왔다. 수많은 일들이 있었고, 기쁨도 있었고, 슬픔도 있었다. 수많은 일들을 겪었고, 소녀는 지쳤고, 소녀는 괴로웠다. 문득 옛 생각이 났다. 산에 올라 스승을 찾아갔다. 소녀는 여인이 됐고, 스승은 노인이 됐다. 여인은 그저 스승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울면서 외쳤다. “왜 저는 이렇게 괴로울까요.” 울음을 그치고 조용해진 여인을 데리고 스승은 연못으로 향했다. 넓은 못가에 꽉 차 있는 화려한 연꽃을 보며 스승은 입을 열었다. “사람들은 여기 와서 저 연꽃을 보며 모두가 감탄을 한다. 그런데 다들 연꽃에만 정신이 팔려 있단다. 너의 눈에는 무엇이 보이니?” “내 눈에는 연꽃의 뿌리가 심어져 있는 저 바닥이 보이는구나. 이 연못은 꽃이 피기 전에는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시궁창이었지. 그리고 때가 돼 꽃이 피면 사람들은 원래 여기가 시궁창이었음을 다들 잊어버리는구나.” 눈동자가 일렁이는 제자에게 스승은 말했다. “연꽃은 시궁창을 탓하지 않고 오히려 저 시궁창에서 이토록 아름다운 연꽃이 피어오르는구나. 자신의 주변과 환경이 시궁창 같을 때 결국 연꽃을 피우는 것은 누구의 몫일까.” 과거에 소녀였고 지금은 여인이 된 그녀는 굳게 결심했다. “나는 이제 저 연꽃같이 되리라.” 그녀는 다시 산을 내려갔고 삶이라는 길을 걸었다. 웃는 날도 있었고, 웃지 않는 날도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울지는 않았다.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울지 않았다. 다만 이와 같이 되뇌었다. “이 모든 것은 연꽃을 피우기 위한 과정입니다. 연꽃은 시궁창을 탓하지 않습니다. 나는 꽃을 피울 것입니다.” 훗날 그녀가 세상을 떠났을 때 사람들은 그녀를 기억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밝았던 사람, 슬픔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사람, 괴로운 사람 앞에서 따스한 위로와 미소를 지어 주던 소중한 사람. 그녀를 알던 사람들은 그녀를 이렇게 기억한다. “이 세상에 연꽃과 같은 사람이었다.” 사월 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 곳곳에 환한 연등이 불을 밝히고 있다. 이 세상이 더욱 밝아지기를. 우리 모두 연꽃 같은 사람이 돼 보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해 본다.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삶과 종교] 빈틈 없이 사랑하기

5월에 있는 기념일은 근로자의 날(1일), 어린이날(5일), 어버이날(8일), 스승의 날(15일), 성년의 날(셋째 월요일), 부부의 날(21일), 지인들의 결혼식과 각종 행사를 포함해 가정에 관련된 날이 많아 ‘가정의 달’이라고 부른다. 팍팍한 현대인의 생활 속에서 계획하고 챙겨야 할 이벤트와 선물들도 많기에 가정을 위한 기념일이 걱정과 부담으로 다가와 ‘가정의 달 증후군’이 생겨나기도 한다. 최근에는 부모와 자녀의 갈등과 충돌로 인해 ‘금쪽 같은 내 새끼’ 같은 다양한 솔루션 프로그램들이 등장한다. 신체적이고 학습적인 측면에서 부모가 자녀를 돌보는 시간을 측정했더니 엄마는 23분, 아빠는 6분 정도 할애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맞벌이에 투잡까지 분주하고 피곤한 탓에 이 시대 교육의 주체와 권위는 가정이 아니라 바깥에 있는 듯하다. 창세기 49장22절에 기록된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라는 말씀은 아버지 야곱이 요셉에게 축복한 표현이다. 가정에서 잘 키우고 양육해 담장 너머로 쭉쭉 뻗어 열매 맺는 사람이 된다는 의미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자녀를 키우는 곳은 가정이 아니라 바깥이다. 학교, 입시학원, 과외선생, 교육상담가, 전문가, 교수들에게 자녀 교육을 위탁하면 좋은 대학과 좋은 직장을 얻을 수 있으며 성공한다고 생각한다. 교육의 권위를 가정 안이 아니라 가정 밖에 두고 대부분의 인생 결정을 외부에서 찾는 격이다. 그래서인지 항상 바깥으로 돌고 돌던 가족들이 만나니 함께 있으면 서먹하고 어색하다. 가족이지만 그 사이에 자연스럽지 못한 이상한 빈틈이 존재한다. 이를 ‘앵프라맹스(inframince)’라고 표현하는데 아래를 뜻하는 ‘infra’와 얇다는 뜻의 ‘mince’를 결합한 합성어다. 이것은 눈으로 식별할 수 없는 미세한 차이이며 냉기와 온기 사이의 아주 얇은 틈이기에 인간으로서는 깰 수도, 찢을 수도, 넘어설 수도 없는 아주 얇디 얇은 막이며 경계다. 부모와 자녀, 그리고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 나타나는 앵프라맹스, 빈틈과 경계를 어떻게 메우고 극복할 수 있을까? 해답은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즉 초월적인 힘이고 영성의 힘만이 가능하다. 이를 위해 가족을 위해 시간을 내 기도할 것을 제안한다. 기도는 쇼핑 목록처럼 원하는 것을 나열해 신에게 요구하는 청구서가 아니다. 기도는 관계를 향해 손을 내미는 행위다. 기도를 통해 초월적인 사랑의 영이 우리의 심장부로 들어와 ‘나 중심’으로 가득한 마음의 공간에 다른 이를 위한 공간 확장이 생겨 자기 중심성에서 ‘다른 이’와 ‘공동체’로 나아가게 한다. 가정의 달 5월, ‘나의 가족’, ‘내가 속한 공동체’, ‘이웃들’을 위한 기도를 통해 눈으로 식별할 수 없는 초박형의 얇은 틈과 경계인 앵프라맹스를 깨뜨리고 넘어서려는 기도와 시도를 해보자. 그것이 쌓이면 빈틈 없이 구석구석 사랑할 수 있는 위대한 힘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린도전서 13:13)

[삶과 종교]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4년 한국 방문 일정을 마치고 바티칸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세월호 유족들에게 다가가 위로했던 행동들이 정치적으로 오해될 것이라 여기지 않느냐”라는 기자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나는 유족들과 연대하기 위해 이것(세월호 추모 노란 리본)을 달았습니다. 이것을 달고 반나절쯤 뒤에 어떤 이가 다가와 ‘떼는 게 더 낫겠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그 비극적 사건에 중립적이어야만 한다고 얘기였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는 없습니다.” 성경 말씀(마태오 25,31-40)처럼 ‘누군가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고, 목 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며, 나그네가 되었을 때 따뜻이 맞아들이는 일. 그리고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고, 병들었을 때 돌보아 주고, 감옥에 있을 때 기꺼이 찾아 주는 일’을 그저 행동으로 옮겼을 뿐인데, 이상하게도 그 행동에 정치적 프레임을 씌워 선한 행동을 정치적 행동으로 바꿔 버리는 경우를 종종 보곤 한다. 어쩌면 2천년 전부터 그리스도교는 이런 오해를 많이 받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이스라엘 민족 앞에 십자가 형벌을 받은 예수도 그저 세리와 창녀, 가난한 이들과 굶주린 이들의 편에 있었지만 로마의 권위에 항거했다는 이유로 ‘유다인의 왕 나자렛 예수’라는 정치범이 됐다. 희한하게 그 오해는 오늘날에도 계속된다. 나라가 뒤숭숭할 때마다 나타나는 정의구현사제단 때문에, 같은 사제라는 이유만으로 ‘신부님! 정치 좀 안 하시면 안 됩니까’는 소리를 듣곤 한다. 분명 듣기 거북한 이야기지만 어쩌면 교황님께서 말씀하신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에 사제들이 기꺼이 참여하고 있다는 증거이며, 사제라면 당연히 짊어지고 가야 할 십자가라 여겨진다. 지난 3월20일 전주시 풍남문 광장에서 정의구현사제단이 다시 등장했다. 그들의 등장은 무엇을 의미할까? 현 시국에 대해 “불이야, 불이야”라고 다급히 외치는 호소이며, 신부가 돼 ‘오늘까지 겨레로부터 받은 은혜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이 될까’ 하는 마음뿐이며,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한 책임을 지닌(헌법 제7조)’ 대통령에게서 섬김의 본분이 아닌 그저 거짓과 변명뿐임을 묵과할 수 없는 절박함이다. 본격적으로 사제단은 4월10일 서울 광장을 시작으로 월요 시국기도회를 이어간다. 이날 사제단은 ‘삭꾼은 안 된다’라는 성명서를 통해 ‘하나부터 열까지 자신이 온 국민 앞에 바쳤던 맹서를 모조리 배신했다. 얼마든지 살릴 수 있었던 젊은이들이 죽게 놔두었고(이태원 참사), 농민을 무시하고(양곡관리법 거부) 노동자들을 적대시함으로써(“화물연대 파업은 북핵보다 더 위험하다”)…약자들에게 한없이 비정한 “삭꾼”(요한 10,12)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사제단의 행보는 광복절까지 계속될 것이며, 대통령은 사제단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길 바란다.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

[삶과 종교] 먼저 배운 뒤에야 즐길 수 있다

내가 즐기는 일은 우연한 만남에서 시작하곤 한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아버지에게서 선물 받은 나침반을 통해 과학에 흥미를 갖게 됐다. 나침반이 항상 북쪽을 가리키는 것을 보면서 보이지 않는 힘에 관심이 생겼다는 것이다. 크리스퍼 유전자가위 기술의 선구자 제니퍼 다우드나도 소설책인 줄 알고 펼친 책 ‘이중나선 The Double Helix’에서 생명에 대한 호기심을 품었다고 전해진다. 물론 모두가 우연한 만남을 꿈으로 이어가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관심이 식어버리든, 힘들어서 혹은 부모님이 야단쳐서 그만두든 한때의 호기심으로 끝나 버리는 경우도 많다. 설령 꿈으로 발전한다고 해도 끝까지 지켜내는 사람은 드물다. 그 길이 절대 만만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력 외에도 학비, 시간 등 들여야 할 것도 많다. 한데 이런 방해물을 뚫고 앞으로 나아간 사람들, 호기심을 꿈으로 만들고 꿈을 현실로 만든 사람들의 공통점은 그 과정을 즐겼다는 것이다. 공자가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래서다. 어떤 대상에 대해 잘 안다고 해도 그 대상을 좋아해서 늘 가까이하는 사람에겐 미치지 못한다. 그 대상을 좋아해서 늘 가까이한다고 해도 그것에 정신없이 빠져 즐기는 사람을 당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즐길 수 있을까. 우연인 듯 찾아온 호기심과 흥미를 잘 살려야 할 것이다. 뭐든 내가 재밌어야 계속하는 법이니까. 한데 꼭 필요한 게 있다. ‘아는’ 것이다. 배우는 것이다. 흔히 공자의 말을 보고 ‘아는 것’, ‘좋아하는 것’, ‘즐기는 것’을 별개로 생각한다. 하지만 알지 못하는데 좋아할 수는 없다. 독서하고 공부해서 그 내용을 먼저 알아야 한다. 그래야 점점 더 빠져들게 되고, 재밌어지고, 그것을 좋아할 수 있게 된다. 야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소년이 배트를 휘둘러 공을 맞혔다고 하자. 시원한 타격감에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고 해서 계속 무작정 배트만 휘두른다면 어떻게 될까? 금방 흥미를 잃을 것이다. 야구의 규칙과 기술을 알아야 그 재미를 이어갈 수 있다. 이처럼 우선은 알아야 좋아할 수 있다. 좋아하게 되면 거기에 더 많은 시간을 쏟으며 파고들게 되고, 응용하고 확장하며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된다. 그렇게 점점 더 나아가면 내가 이것을 완벽히 장악하고 손안에서 가지고 놀 수 있는 순간이 온다. 탁월해지는 것으로, 바로 ‘즐기는’ 경지다. 즉, 알아야 좋아할 수 있고 좋아해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한데 알아도 좋아하지 못하고 즐기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앎이 나의 호기심에서 시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의 흥미나 관심사와는 상관없이 그저 대학에 가기 위해,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취업하기 위해 ‘안’ 것이다 보니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가 힘들다. 그러니 스치듯 생겨난 호기심이라 해서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 쓸데없어 보이는 망상이라고 접어서는 안 된다. 그것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 재밌다면 더더욱 그래야 한다. 내가 그것을 즐길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당신은 꿈은 현실이 될 것이다.

[삶과 종교] 좋은 비는 때를 안다

좋은 비는 때를 알아 봄 되니 비가 내리네. 당나라의 시인 두보가 쓴 ‘호우시절(好雨時節)’의 문장이다. ‘좋은 비는 때를 안다.’ 요새 나라 소식에 번민한 일들이 많았다. 건조한 대기에 여기저기 산불이 치솟고, 지독한 황사와 미세먼지가 연일 이어졌다. 큰 피해가 있었지만 늦게라도 때맞춰 내린 빗줄기에 산불이 꺼지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뿌연 황사와 갑갑한 대기가 봄날의 단비로 공기가 맑아졌다. 좋은 비는 때를 안다. 때를 알고 내린 비는 소중하다. 세상 사람들은 고민이 참 많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저 한숨만 나온다. 다들 힘들고 괴롭다. 화나는 마음은 산불과 같다. 활활 불타오른다. 답답한 마음은 황사와 같다. 갑갑할 따름이다. 온갖 고민은 미세먼지와 같다. 숨이 막힌다. 이럴 때 우리 삶에도 촉촉한 단비가 내렸으면 좋겠다. 우리 중생들 마음에 좋은 비가 촤악 쏟아졌으면 좋겠다. 모든 사람들 마음이 맑은 날 공기처럼 시원하고 깨끗해졌으면 좋겠다. 인생이 쉽지가 않다. 하나를 해결하면 문제 하나가 생기고, 또 해결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다. 끊임없는 문제 해결의 연속이다. 그렇게 사는 것이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완전한 인생도 없다.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 인생은 저마다 지고 가는 자신만의 숙제가 있다. 인생을 단편적으로만 보면 아무 걱정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평생 걱정거리 없는 사람은 결코 없더라. 젊었을 때 잘나가던 사람이 나이 들어 꼬여 버린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미치도록 사랑해 결혼하고 온갖 부러움을 사다가 철천지원수가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남부럽지 않게 살았는데 바닥을 치고 추락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거대한 권력을 움켜쥐고 평생 떵떵거리며 살 것 같았는데 시들어 꺾여 버린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영화를 누리며 살았지만 사실 내면은 누구보다도 외롭고 지독한 내면의 갈증 속에 살았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인생은 결코 단편으로는 알 수 없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여러분, 동화를 보면 항상 마지막 문장은 ‘왕자님과 공주님은 평생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왕자든 공주든 인생 살다 보면 사람 사는 것은 거기서 거기입니다. 그래서 왕자와 공주가 결혼할 때 적당히 이야기를 끝내는 겁니다. 왜냐? 가장 아름다울 때 이야기를 맺어야 동화가 팔리거든요.” 이 말을 듣고 참 희한하다 생각하면서도 나름 일리도 있겠구나 싶기도 했다. 사람 사는 인생인데 어찌 ‘평생 행복하게’ 살았겠는가. 하다못해 자식이라도 사고 치는 게 인생인데. 좋은 일이 생기면 좋고, 나쁜 일이 생겨도 그런가 보다 뚜벅뚜벅 걷는 게 인생이다. 오르막길도 있고, 내리막길도 있다. 그걸 알고 걸어가는 게 인생이다. 가다 보면 꽃길도 있고, 가시밭길도 있다. 그런데 계속 가시밭길만 나오는 경우도 있다. 가다가 지치면 결국 무너져 버리기도 한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저렇게까지 스스로 세상을 떠났을까. 울적하고 가슴 아픈 사연들이 많다. 인생은 홀로 가는 길이다. 그런데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서로가 서로 연결돼 있다. 홀로 가는 인생은 혼자만 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영향을 주고받는 거대한 관계의 흐름이다. 내가 살아야 남이 살고, 남이 살아야 나도 살아가는 묘한 도리가 있다. 남이 웃어야 나도 웃을 수 있다. 남이 울고 있는데 나 혼자 웃고 있으면 그것은 사이코다. 너와 내가 함께 웃으며 살아가는 세상의 위대한 섭리가 있다. 좋은 비는 때를 안다. 사람에게 가장 좋은 단비는 바로 ‘사랑’이다.

[삶과 종교] 폰을 보다, 봄을 보다

화성에서 서울 어린이대공원까지 출퇴근을 하기 위해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도권에서 서울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데 정류장과 플랫폼에서 간격을 유지하고, 공간을 만들며, 질서정연함을 유지하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 중고등학교에 재학할 때 버스와 전철을 이용해 등하교를 했다. 당시 대중교통은 콩나물시루, 지옥철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사람들이 몰려들어 먼저 타려 했고, 발 디딜 틈도 없이 꽉 들어찬 공간에 한 사람이라도 더 태우기 위해 일명 ‘푸쉬맨’이라고 하는 요원까지 배치했던 기억이 있다. 시대가 변하고 발전하면서 시민의식의 향상과 인파가 몰려 발생한 각종 사고도 질서정연함을 만들어냈지만 스마트폰의 보급과 사용도 한몫하는 것 같다. 지하철에 탄 사람들은 아무리 인파가 몰려들어 복잡해도 필사적으로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서 무언가를 보고 있다. 간격이 좁아져 타의적으로 폰 화면을 힐끗 보게 될 때가 있는데 화면에는 게임, 쇼핑, 웹툰, 드라마, 영화, 예능, 카톡, 인터넷 강의 등 지금 시청하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처럼 집중하면서 폰을 볼 수 있는 공간을 사수한다. 심지어 ‘걸으면서 폰을 하지 말라’는 캠페인까지 벌이는 형국이다. 심리학자들은 유물론자 포이에르바하의 ‘내가 먹는 것이 바로 나다(I am what I eats)’라는 말을 차용해 ‘내가 보는 것이 곧 나다(I am what I see)’라고 말하면서, 보는 것들과의 관계가 세상에 대한 관점과 마음가짐을 결정하는 ‘프레임’을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스마트폰이 대중화되기 이전,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들 중 신문이나 책을 읽거나 차창 밖 자연을 바라보면서 깊이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는데 요즘엔 탑승자 대부분이 폰을 본다. 봄이 왔다. 겨우내 자기를 비워낸 나무들에서 새순이 움트고 잎과 꽃이 푸르고 화사하게 피어난다. 코로나 이후 일상을 회복하고 마스크도 벗게 돼 적막했던 회색빛 도시의 풍경이 역동적인 사람들의 움직임과 화려한 꽃과 나무로 채워지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청명한 부활의 계절에 자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고, 그리스도로 자신을 채우며, 믿음으로 살아간다고 고백한다(갈 2:20). 이 좋은 계절에 ‘폰을 보다, 봄을 보다’를 의도적으로 기억하면서, 폰을 보던 고개를 들어 꽃과 나무, 자연을 바라보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말을 걸어 보자. 관점과 내면이 봄의 생명력과 유의미함으로 채워질 것이다.

[삶과 종교] 부끄러움을 자랑하기?

가톨릭교회는 매년 봄이면 사순 시기를 맞이한다. 사순 시기는 40일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그분의 부활 축제를 준비하는 기간인데, 성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의 수난과 죽음의 원인이 당혹스럽게도 그를 열렬히 따르던 제자들의 배신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열 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유다가 예수를 은돈 서른닢에 팔아넘긴다(마태 26, 15). 그리고 경비병들이 예수를 체포하자 제자들은 모두 그분을 버리고 달아났다(마르 14, 50). 그들 중 한 명은 얼마나 겁쟁이였으면 알몸으로 달아난 사람도 있었다(마르 14, 52). 그리고 열 두 제자 중 첫 번째 제자이며 가톨릭 초대 교황인 베드로는 스승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고백했으며 급기야 자신의 말이 거짓이면 천벌을 받겠다고까지 맹세했다. 신약성경 서간의 주요 저자인 바오로 역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선봉장이었다. 성경이 집필될 당시 초대교회의 지도자들과 목격 증인들은 분명 교회 안에서 위대한 인물들이고, 그들의 위치와 권위로 볼 때 자신들의 부끄러운 과거는 적당히 숨길 법도 하지만 성경은 그들의 약점, 나약함, 부끄러움을 고스란히 이야기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신이 누구냐’는 기자의 질문에 “저는 죄인입니다. 이것이 가장 정확한 정의입니다. 이것은 멋지게 꾸미기 위한 문학적 수사가 아닙니다. 말 그대로 저는 죄인입니다. 그런데 저는 주님께서 굽어 살피시는 죄인입니다. 저는 주님의 돌봄을 받는 사람입니다”라며 부족한 인간임을 자인했다. 대한민국이 사랑한 종교 지도자 고(故) 김수환 추기경은 어수룩한 자화상에 ‘바보야’라는 이름을 붙이고 ‘안다고 나대고 대접만 받으려고 한 내가 바로 바보’라고 스스럼없이 이야기했다. 가톨릭 예식 중 가장 중요한 미사 시간에도 모든 신자는 참회하는 마음으로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내 큰 탓이옵니다”라고 고백한다. 보잘것없는 인간을 통해 주님께서 일하고 계심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베드로와 바오로의 삶이 그 증거다. 스승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는 스승을 배신한 사실을 안 순간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비참함에 한탄했을 것이다. 베드로가 그 눈물과 비참함 속에 방황하고 있을 때 예수는 그에게 부활해 그를 진정한 제자로 삼는다. 베드로는 순교 당시 스승님처럼 십자가에 매달려 죽을 수 없다며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다. 박해자의 선봉장인 바오로는 갑자기 “왜 나를 박해하느냐”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고 그는 한평생 로마, 그리스, 터키 지역을 다니며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약함과 부끄러움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정말 보이지 않는 힘이 생겨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느님께 맞갖은 제물은 부서진 영. 부서지고 꺾인 마음을 하느님, 당신께서는 업신여기지 않으십니다(시편 51, 19).”

[삶과 종교] 매사를 의에 견주라

무엇이 옳고 그른가? 선택할 때마다 고민하게 되는 문제다. 공자는 “군자는 천하의 일을 대하매 무조건 ‘이것이다’라고 하는 것도 없고, ‘이것은 아니다’라고 하는 것도 없다. 오직 매사를 의에 견줄 따름이다”라고 했다. 처음부터 정해진 답은 없다는 뜻이다. 그 대신 지금 이 상황에 가장 적절한 답을 찾으라는 것이다. 한데 문제가 있다. 우리가 옳은지 그른지를 고민하는 대상은 선(善)과 악(惡)이 아니다. 윤리와 윤리가 상충하고 옳음과 옳음이 부딪치는 때다. 양쪽 모두 명분이 있고 정당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도대체 어떻게 선택할 수 있을까? 2018년 10월 네이처에는 매사추세츠공대(MIT) 이야드 라완 교수 연구진의 ‘도덕적 기계(moral machine)’ 논문이 실렸다. 전 세계 233개 지역·국가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다. 내가 운전하고 있는데 갑자기 행인이 도로에 뛰어들었다고 가정해 보자. 브레이크는 고장 나 있고, 핸들을 꺾는다면 가로등이 정면에 있어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때 나의 목숨을 구할 것인가? 아니면 행인을 구할 것인가? 또 승용차에 나 혼자 타고 있을 때, 사랑하는 가족들이 함께 타고 있을 때, 내 선택은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이런 질문도 있다. 한쪽에서는 노인이 한쪽에서는 어린아이가 걸어오고 있는데 내가 누군가 한 명을 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때 누구를 치고 누구를 살릴 것인가? 이 밖에도 이 실험은 수많은 경우의 수를 상정했다. 자율주행차가 운행 중 위험한 상황을 만났을 때 어떻게 판단하도록 알고리즘을 코딩할지 참고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문화권마다 선택이 달랐다는 것이다. 어떤 문화권은 노인을 살린다는 비율이, 또 어떤 문화권은 아이를 살려야 한다는 비율이 높았다. 불법 보행자에 대한 반응도 나라마다 차이가 있었다. 이는 우리에게 ‘의로움’에 대한 판단이 상대적일 수 있다는 깨우침을 준다. 문화권이 아니라 개개인에게도 분명한 차이가 있을 것이다. 내가 병자호란 중 남한산성에 있다고 하자. 국가의 자긍심을 지키기 위해 김상헌처럼 결사항전을 주장할 것인가, 아니면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막고 백성을 지키기 위해 최명길처럼 화친을 주장할 것인가? 내가 코로나19 정책 담당자였다면 개인의 자유를 보다 신경썼을 것인가, 아니면 공동체의 질서를 중시했을 것인가? 이렇게 명분과 명분, 옳음과 옳음이 상충할 때는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바에 따라 선택하고 그 선택을 증명하면 된다. 다만 무엇이 옳은 길인가, 내가 옳은 길로 가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이를 공자는 ‘매사를 의에 견줄 따름이다’라 말하고 있다. 이것이 의냐 아니냐 정답을 확정하라는 말이 아니다. 나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다른 선택을 했을 땐 또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 나의 선택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숙고하라는 것이다. 어느 쪽이 더욱 의로운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 따져보라는 것이다. 이는 선택한 후에도 계속돼야 한다. 정정당당하게 최선을 다해 나아가되 고민을 멈추지 않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설령 잘못된 길로 들어가도 금방 바로잡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삶과 종교] 온전히 나의 선택이다

사람은 행복을 원한다. 기쁨을 원하고 즐거움을 바란다. 그런데 인생은 결코 내 뜻대로 살아지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모든 일이 술술 풀리기를 바란다. 그것이 가장 큰 번뇌 망상인데 말이다. 이솝우화에는 ‘여우와 신포도’라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 옛적에 여우가 살고 있었다. 여우가 길을 걷다가 큰 나무에 먹음직한 포도가 주렁주렁 매달린 것을 봤다. 여우는 침을 잔뜩 흘리며 포도를 향해 발을 뻗었다. 하지만 나무 높이 걸려 있는 포도에 발이 닿지 않았다. 펄쩍펄쩍 뛰어봤지만 포도에 닿지 않았다. 혼신의 힘을 다해 몸을 던졌지만 끝끝내 포도를 얻을 수 없었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던 여우는 포도 먹기를 포기하고 몸을 돌려 길을 떠나며 이렇게 읊조렸다. “됐다, 됐어. 어차피 저 포도는 엄청 시어서 맛이 없을 거야.” 원래 이 여우의 이야기는 자기 자신을 합리화하고 핑계되는 여우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우화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여우가 참 지혜롭다는 생각도 든다. 되지 않는 것을 억지로 매달리거나 아쉬워하지 않고, 집착 없이 훌훌 털어버리고 자기 길을 가는 여우가 오히려 참 멋있는 녀석 같다. 어떤 사람들은 여우가 능력이 없어 포도를 먹지 못하는 상황에서 애써 자기 위로를 한다고 비웃겠지만 어떤 관점에서는 애써 되지 않는 일에 집착하지 않고 적당히 자기 정신건강을 챙길 줄 아는 모습에 나름 지혜롭다고 여길 수도 있는 것이다. 세상에 펼쳐지는 일들이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다. 즐거운 일도 있고 괴로운 일도 있다. 내 앞에 항상 내가 원하는 일만 생길 수는 없다. 펼쳐진 일들이 내 맘대로 되지는 않지만 그 상황에서 어떤 감정을 선택할지는 온전히 나의 몫이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넘어져 무릎이 까졌다. 그는 화를 내면서 속으로 욕을 했다. “아, 재수 없어. 이게 뭐야.” 그는 찌릿찌릿 아픈 무릎을 안고 하루를 보냈다. 기분 나쁜 감정에 하는 일마다 자꾸 짜증이 났다. “아, 오늘 하루 정말 진짜 싫다, 싫어.” 그는 넘어져 다친 무릎보다 계속해서 일어나는 기분 상한 자기감정에 취해 괴로움을 껴안고 있다. 그런데 또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넘어져 무릎을 다쳤다. 그는 순간 마음을 다스리며 이렇게 말했다. “와우, 오늘 운 좋다. 더 크게 다칠 뻔했는데 겨우 무릎 까진 걸로 끝났네.” 우리 앞에 펼쳐진 상황을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긍정적인 감정을 선택할지, 부정적인 감정을 선택할지는 온전히 내 결정이다. 우리 마음속에는 두 마리 늑대가 있다. 선한 늑대와 악한 늑대다. 두 늑대에게 음식을 주는 것은 내 결정이요 나의 선택이다. 선한 늑대에게 음식을 주면 악한 늑대는 힘이 약해진다. 악한 늑대에게 음식을 주면 선한 늑대가 약해진다. 여러분은 어떤 늑대에게 음식을 줄 것인가?

[삶과 종교] 묻고, 탐구하고, 발견하라

대학에서 기독교 관련 교양수업을 강의하는데 이번 학기에 가장 많은 학생이 수강신청을 하고 강의실에서 질문 공세도 쏟아지고 있다. 아마 새학기가 시작함과 동시에 여러 종교의 동아리나 단체가 학생들에게 접근하고 다양한 콘텐츠에서 종교와 관련된 부정적인 묘사들과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한 영상들이 화제가 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첨단 과학이 발전하고 있는 현대사회를 살아가고 있지만 이상한 교리와 속임수로 권력을 만들어 자신들을 신처럼 따르게 하는 거짓된 사람들과 이단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다. 신약성경 마태복음 7장 15~16절에는 거짓 예언자들을 삼가라는 예수의 말씀이 기록돼 있다.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굶주린 이리 떼와 같다.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아는 것처럼 그들의 행동을 보고 진짜 예언자인지 가짜 예언자인지 알 수 있다”(현대인의 성경)고 말한다. 교묘하게 접근해 미혹하고 노략질하는 이들에게 현혹되지 않고 나 자신과 가족들을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접근해 미혹한 거짓된 이들에게 100% 잘못이 있지만 신도들 혹은 신도 지원자들은 맹목적 믿음이 아닌 비판적 성찰, 지속적인 의심과 탐구를 실천해야 한다. 기독교 역사의 잘못 가운데 하나는 질문과 의심을 죄로 여기고 폄하하며 때론 무시해 왔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나 스스로 생각하고 사고하는 주체가 될 때 자신만의 새로운 신앙을 시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으로 알고, 입으로 고백하며 긍정이면 천국, 부정이면 지옥이라는 유아기적 차원이 아니다. 지속적인 교리 공부와 의례, 의식에 참여하고 비판적으로 수용하며 자신의 정체성과 삶이 변화할 때 비로소 그 종교를 이해할 수 있다. 에드문트 후설은 ‘대상’과 ‘의식’ 사이에서 ‘판단중지(Epoche)’를 해야만 현실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를 종교현상학으로 접근하면 ‘종교적 대상’을 ‘의미화’하기 전에 여러 사실을 괄호 안에 넣고 판단을 유보해 보는 것이다. ‘괄호 안에 넣기’란 쉽게 결론을 내리지 말고 차근차근 따져 ‘사실 그 자체’가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는 방법이다. 종교가 현대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비판적 성찰과, 의심과 질문을 허용해야 한다. 의심 많은 제자 ‘도마’와 연관된 도마복음에서 이렇게 말한다. “추구하는 자들은 찾을 때까지 계속 추구하라”, “네 눈에 보이는 것을 깨닫도록 하라. 그리하면 너에게 가리워진 것이 드러날 것이다. 왜냐하면 숨긴 것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캐묻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예수는 우리에게 찾을 때까지 추구하고, 어떤 대상을 깨달을 때까지 깊이 인식해 새로운 것을 발견하라고 역설한다.

[삶과종교] 동정 부부의 사랑 이야기

서양에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 이야기가 있었다면 동양에선 이도령과 춘향의 사랑 이야기가 회자되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 천주교 역사상 매우 특별한 커플이 있었으니 이름 하여 ‘동정 부부’라 부르는 유중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 부부의 이야기다. 사실 ‘동정+부부’라는 서로 모순되는 두 마디가 이들을 잘 표현하고 있다. 수도자처럼 하늘나라를 위해 주님께 오롯이 몸을 바치기로 한 젊은이들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린 부부가 됐다. 당시 사회적 관습에 따라 결혼적령기에 이른 남녀가 독신으로 지내는 일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결혼의 형식을 거쳤다. 한 지붕 밑에서 이 젊은 남녀가 4년 동안을 함께 살면서도 두 사람은 처음부터 하느님과 상대방에게 약속한 동정을 지켜냈다. 그리고 둘은 두어 달 사이로 나란히 순교했다. 그래서 누구는 이들을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시들지 않는 백합”이라고, 누구는 “한국 순교사의 가장 찬란한 진주”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진짜 가능한 일인가? 이순이 루갈다는 감옥에서 곧 맞이할 죽음 앞에 자신의 속 이야기를 어머니께 써 보낸다. 이후 이 편지는 박해 시대 때 신앙인들이 혹독한 어려움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기 위해 가장 많이 읽은 글이 됐고, 신앙의 후손들이 이 글을 끊임없이 필사하고 널리 전한 덕분에 지금까지 우리에게 보석처럼 남게 됐다. “제가 여기로 온 후, 평소에 마음에 두고 걱정하던 일을 이루었습니다. 9월에 와서 10월에 우리 두 사람이(동정을 지키기로) 발원 맹세하고 4년 동안을 실제로 남매처럼 지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중간에 대략 10번이나 심한 유혹을 당하여 (서약을 지키기가) 거의 불가능한 지경에까지 이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피를 흘려 이루신 공로의 힘에 의지하여 그 유혹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이 일에 관해서 마음을 쓰실 것 같아 이렇게 말씀드리니, 저 자신을 대하시듯 이 글을 반갑게 받아주시기 바랍니다.”(동정 부부 순교자 이순이 루갈다 옥중편지) 이들은 당시 서학을 통해 천주교를 알게 됐고, 신 때문에 양반이든 노비든 모두가 평등하다는 가르침을 접한다. 태생부터 신분이 정해진 사회, 양반과 노비 사이에 존재하는 부조리와 불평등 속에서 이러한 가르침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하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이들에게서 신에 대한 사랑뿐 아니라 인간 상호 간의 사랑과 존중이라는 귀중한 모범도 발견할 수 있다. 상대방이 가고자 하는 길, 그리고 그가 신께 드린 서약을 존중하고 그것을 지켜 주기 위해 자신의 욕망을 이겨낸다. 그들이 보여준 사랑은 자신을 희생할 때 가장 분명히 나타난다. 자신을 태우며 세상과 이웃에 빛이 돼주는 초처럼 말이다. 어쩌면 이들은 가슴속 깊이 이 성경 구절을 새기며 살지 않았을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1요한 3·16).”

[삶과 종교] 자공이 미워하는 사람

당신은 어떤 사람을 꺼리고, 싫어하는가? 논어 ‘양화(陽貨)’편에 보면 “너도 미워하는 것이 있느냐”는 공자의 질문에 제자 자공은 “남의 것을 훔쳐 자신의 지식으로 삼는 사람을 미워하고, 겸손하지 않은 것을 용맹으로 여기는 자를 미워하며, 들춰내는 것을 정직하다 여기는 자를 미워합니다”라고 대답한다. 이 중에서 자공이 첫 번째로 거론한 대상인 “남의 것을 훔쳐 자신의 지식으로 삼는 사람(惡徼以爲知者)”이 오늘 이야기할 주제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주장, 창작물을 표절해 자신의 것처럼 내세우는 사람, 자공은 이들을 미워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표절 문제는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잊을 만하면 정치인이나 유명인의 학위논문 표절 문제가 언론을 장식한다. 학자들의 표절로 유명 저널과 유명 대학들이 홍역을 치르는 일도 드문 모습이 아니다. 어디 그뿐인가. 학생들에게서 표절이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왜 표절이 잘못된 행위인지,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인용할 때는 어떻게 출처를 밝혀야 하는지 설명해줘도 여전히 표절한 과제물을 제출하는 학생들이 있다. 카피킬러 같은 표절 검사 프로그램을 사용하겠다고 밝혀도 근절되지 않는다. 심지어 이제는 ChatGPT까지 등장했으니 표절과의 전쟁을 치러야 할 판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된 원인을 디지털 기술의 탓으로 돌린다. 인터넷 안에 수많은 정보가 넘쳐 나고 접근성이 좋아지면서 검색만 잘하면 몇 초 안에 필요한 자료를 얻을 수 있게 됐다. Ctrl-V와 Ctrl-C로 그 자료를 내 것처럼 만드는 일도 쉬워졌다. 위키피디아, 나무위키 같은 자료는 흡사 나를 가져다 쓰라고 유혹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마디로 표절하기 쉬운 환경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잘못된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사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다. 디지털 기술 안에 그렇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잠재해 있다고 해도 사람이 그것을 올바르게 사용한다면 폐해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표절이 쉬워진 만큼 왜 표절하면 안 되는지 그 이유를 더욱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먼저 표절은 내가 배우고 성장할 기회를 스스로 내던져 버리는 일이다. 다음으로 표절은 지식을 도둑질하는 행위다. 남의 것을 내 것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다른 사람을 기만하고 자기 자신을 속이는 일이기도 하다. 나아가 표절하는 행태가 만연하면 그 사회는 신뢰를 상실하게 된다. ‘이 글이 과연 저 사람이 쓴 글일까’ 의심하게 되고 ‘다른 사람이 쓴 걸 가져다 쓰면 어때? 좀 바꾸면 그만이지’ 하며 타인의 노력을 가로채는 일을 무감각하게 만든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만약 표절한 사람이 적발되지 않아 좋은 성적을 받게 된다면 학교 교육도 위기를 맞을 것이다. 자공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걱정하는 것이다. 비단 표절만이 아니다. 남의 아이디어와 공로를 훔치는 사람들, 그것을 자신의 성과인 양 거짓말하는 사람들이 가져올 신뢰의 위기를 우려하는 것이다. 당장은 별일 아닌 것처럼 보여도 공동체를 흔들 수 있는 사안임을 경고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저는 남의 것을 훔쳐 자신의 지식으로 삼는 사람을 미워합니다”라고 엄숙히 말하는 거다. 이는 바로 오늘날의 우리가 명심해야 할 내용이 아닐까.

[삶과 종교] 인생은 자기 복대로 산다

옛날 옛적에 왕이 있었다. 어느 날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때 잠결에 두 명의 신하가 나누는 대화를 엿듣게 됐다. 한 신하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이렇게 좋은 옷 입고 기름진 음식을 먹으며 편하게 사는 것은 모두가 왕의 은혜다.” 왕은 이 말을 듣고 속으로 흐뭇한 감정이 일어났다. 그런데 다른 신하가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다. 우리가 이렇게 편하게 사는 것은 왕 덕분이 아니다. 모두 자기 복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두 신하의 대화를 듣고 왕은 생각했다. “그래, 다 자기 복대로 살아간다는 말이 있긴 하다. 하지만 막상 신하의 입에서 왕의 덕택으로 편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복으로 편하게 산다고 말을 들으니 서운한 마음이 드는구나.” 살짝 감정이 상했지만 이런 일로 신하를 꾸짖는다면 오히려 체면이 구겨질 것 같았다. 그래서 왕은 이런 결정을 내렸다. “왕의 은혜로 편하게 산다고 말한 저 신하에게 큰 상을 내려줘야겠구나. 그래서 자기 복대로 살아간다고 말한 저 신하의 배를 아프게 해줘야지. 허허허.” 왕은 잠에서 깬 척 자리에서 일어나 곧바로 왕비에게 편지를 썼다. 왕비에게 당부하기를 ‘이 편지를 배달한 신하에게 값진 보물을 상으로 주시오’라고 적은 뒤 단단히 밀봉했다. 그리고 ‘왕의 은혜로 살아간다’라고 말한 신하를 불러 그에게 편지를 주며 왕은 명령을 내렸다. “이 편지를 곧바로 왕비에게 전해다오. 절대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지 말고 반드시 그대가 갖다 드려야 하네.”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왕이 궁전에서 한가로이 쉬고 있는데 한 신하가 곁에 와서 왕께 감사하다고 인사를 올리는 것이다. “왕이시여, 얼마 전에 왕비께서 왕의 선물이라며 큰 보물을 내리셨습니다. 황송하고 감사하옵니다.” 왕이 고개를 들어 그 신하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고는 깜짝 놀랐다. 선물을 받았다고 인사를 한 그 신하는 ‘편하게 사는 것은 왕의 은혜가 아니라 다 자기 복대로 사는 것이다’라고 말한 얄미웠던 신하였기 때문이다. 본래 선물을 주고 싶었던 신하에게 보물이 간 것이 아니라, 서운하게 느꼈던 얄미운 신하에게 보물이 내려갔으니 놀라고 당황스러웠다. 왕은 사람을 불러 이전에 편지 배달을 시켰던 신하를 데려오게 하고는 전후 사정을 질문했다. 그 신하가 대답했다. “왕이시여, 그날에 제가 왕비에게 드릴 편지를 가지고 급히 길을 걷다가 계단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코피를 쏟아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됐습니다. 이에 편지를 제가 직접 갖다 드리지 못하고 옆에 지나가던 저 신하에게 대신 부탁한 것입니다.” 이야기를 듣고 사정을 모두 이해한 왕이 탄식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 자기가 지은 복대로 살아간다는 말이 사실인가 보구나. 내가 저 신하에게 보물을 주고자 했음에도 결국 받는 자는 따로 있었구나.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은 왕의 권력이지만, 국왕의 힘도 복의 힘을 이기지 못하는구나.” 옛날 옛적 동화 같은 이야기다. 그런데 실제 인생을 살다 보니 ‘복’을 무시할 수 없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노력한 만큼 잘 안 풀릴 때도 있고, 때로는 전혀 바라지 않았는데도 놀라운 성과를 거둘 때가 있다. 하지만 그 복을 만드는 것도 결국 자기 자신임을 알아야 한다. 내 인생을 개척하는 주인공은 결국 나 자신이다.

[삶과 종교] 나도 틀릴 수 있다

학생들과 토론수업을 진행할 때의 일이다. 한 학생이 자신이 조사한 통계를 갖고 기업의 사업 다각화에 대해 찬성 입장을 밝혔다. 이에 다른 학생이 그 기업은 중소기업을 잠식하는 형태이기에 반대 입장을 피력했다. 찬반 논의가 격렬해 진행하는 교수로서 진땀을 빼기도 했다. 때때로 우리는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는 ‘아시타비(我是他非)’의 명제에 갇혀 살아가고 있는 듯하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지속되면서 전 세계가 오랜 시간 진통을 겪고 있다. 러시아는 자신들이 옳고 우크라이나와 서방이 틀렸다고 생각할 것인데, 우크라이나와 서방도 러시아에 대해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국의 정치권에서는 어려운 시기 민생을 살펴야 할 정치인들이 자신만 옳다고 주장하면서 분열을 일삼는 탓에 국민들의 피로도가 상당하다. 누구든지 보는 관점과 상황에 따라 옳고 그름이 나뉠 수 있는데 항상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가 우리의 생각과 삶을 지배한다. 비슷한 의미를 지닌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의미의 ‘내로남불’이란 용어가 사전에도 등재되지 않았는가. 고린도전서에는 고린도 교회의 분열이 나타나 있다. 고린도에 있는 신앙공동체는 왜 분쟁이 있었을까? 대표적으로 유대 기독교와 헬라 기독교와의 분리다. 바울은 예수의 동생인 야고보와 베드로가 중심으로 활동하던 예루살렘 교회와의 신앙적인 갈등으로 결국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나서게 됐다. 고린도 교회도 마찬가지다. 거기에도 분파가 생겼다.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로 나뉘었다(고전 1:12).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가에 따라서 파가 나뉘었고, 자신들이 속한 분파만이 옳고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쓴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런 분리와 분파주의를 경계하기 위한 것이었다. 국제 정세와 국내 정치권의 상황은 자국과 정당의 이익이 우선하는 영역이니 차치하더라도 우리의 일상에까지 ‘아시타비’와 ‘내로남불’의 문법이 가득하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감염을 염려해 타인과 거리를 두고 거부하는 문법, 빈부격차의 심화로 등장한 수저계급론과 갖가지 논쟁의 문법,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인정하지 못하고 배척하는 문법, 남녀·세대·노사·지역 간의 갈등과 충돌의 문법들이 들불처럼 일어나고 있다. 나만 맞고, 나와 같은 동질성을 가진 사람들만 옳다는 ‘아시타비’의 생각과 행동은 동질성의 폭력을 야기한다. 나와 생각 및 입장이 다른 사람의 특이성과 차이성, 고유성과 다름은 수용과 인정을 받지 못하고 거절과 분리, 심하게는 차별과 혐오에까지 이르게 된다. ‘아시타비’의 그릇된 문법을 바로잡을 수 있는 대안은 “나도 틀릴 수 있다”는 명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철학자 니체는 미래의 이상적인 인간을 ‘위버맨쉬(Übermensch·초인)’라고 불렀다. ‘위버(Über)’는 ‘위’ 또는 ‘넘어서’를, ‘멘쉬(mensch)’는 ‘사람’을 뜻한다. 즉, ‘인간을 넘어선 인간’이며 모든 관습과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정신을 갖춘 존재이고, 편견에서 벗어나 세상을 넓은 시야로 바라볼 수 있는 존재다. 이와 반대 개념인 ‘인간말종’을 언급하는데 자신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없는 시시한 존재, ‘자기 자신을 경멸할 수 없는 존재’다. 이는 자신에 대해 깊은 성찰과 회의를 하지 못하기에 자기 극복을 통한 발전도 결코 있을 수 없다. 니체는 이런 인간말종을 천민, 다수, 짐승 떼 등으로 불렀다.   인간은 이러한 인간말종과 위버멘쉬 사이에 존재한다. 때때로 나 자신을 경멸하면서 “내가 틀릴 수 있고, 네가 옳을 수 있다”는 겸허한 성찰과 행동을 통해 위버멘쉬로의 도약이 절실히 필요하다.

[삶과 종교] 진정한 복수

요즘 복수 드라마 ‘더 글로리(The glory)’가 화제다. 학창 시절 왕따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복수 이야기다. 기존 복수극과 다르게 이 드라마에서는 칼 한 자루 나오지 않는다. 대신 과거 괴롭힘을 당한 주인공이 복수라는 자기만의 정의 실현을 위해 20년 동안 철저히 준비하며 원수와 그의 삶을 파괴하려 한다.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이 드라마는 사실 학교폭력이 한국만의 문제가 아닌 전 세계적 사회 병폐 현상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미국 경제잡지 포브스는 ‘더 글로리’에 대해 “학교폭력이 신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잔혹한 행위임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밝혔다. 순수한 어린 학생들에게서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일까? 고질적으로 굳어 버린 학교폭력의 행태에는 복합적인 원인이 있다. 가해 학생이 자신의 행위가 잘못이라고 인지하지 못한다는 점, 보복이 두려워 이웃들에 말할 수 없는 피해 학생의 입장, 범죄 수준이 아닌 그저 학생들 간의 사소한 갈등 수준으로 인식하고 있는 사회적 분위기, 가해 학생과 피해 학생이 처한 비정상적인 가정환경과 교육환경, 어린 학생을 처벌할 수 없는 법의 사각지대 등 여러 문제가 엉켜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모든 폭력에는 불평등이 존재한다. 약자와 강자, 부유함과 가난함, 다수와 소수 등과 같은 환경이 누군가를 억압하고 괴롭히는 상황으로 연결되기 쉽다.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폭력에는 인간을 마치 물건처럼 취급하는 사회 인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지적한다(‘모든 형제들’ 24항). 진정한 복수는 무엇일까? 드라마 주인공은 “타락할 나를 위해! 추락할 너를 위해!”라며 복수의 서막을 알린다. 그러나 그 복수의 결말은 나와 원수 모두 망가지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지워지지 않는 상처만 가슴속 깊이 남지 않을까. 정답은 잘 모르지만 성경에서 그 힌트를 찾고 싶다. 성경에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 30-37)가 나온다. 상처 입은 한 사람이 길가에 쓰러져 있고, 무심하게 그 사람 곁을 지나가던 사제(제사장)와 레위인(제사장을 돕는 계층)이 등장한다. 그들은 사회적 지위와 사회적 명망이 있는 직업군이다. 철저히 자기의 역할에만 충실하고 사회적 위치만을 신경 쓰는 이들이기에 길가에 버려진 사람은 그들에게 그리 중요한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사회적 지위도 없고, 그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이방인이었지만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상처 입은 그 사람을 위해 자신의 여정을 중단하고 계획을 수정해 그를 돕는다. 어쩌면 진정한 복수는 원수, 그리고 그의 악행과 상관없이 내가 당당해지는 삶이 아닐까 싶다. 나를 추락시키려 했던 원수의 뜻과 달리 하느님께서 창조한 ‘나’라는 소중한 존재가 추락하지 않고, 추락할 수 없으며, 또 보란 듯이 당당히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둘러싼 많은 이들, 특히 사회적 약자들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추락하지 않고, 추락할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과 행동이 진정한 복수의 서막이 아닐까 싶다.

[삶과 종교]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면

우리는 집, 학교, 직장, 사회, 그 어느 곳에서든 타인과 긴밀하게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정서적인 교류뿐 아니라 함께 팀을 이뤄 구체적인 일들을 해나간다. 어떤 사람을 만났느냐가 나의 성공과 실패에 큰 영향을 주기도 한다. 그러니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사람을 파악하는 일이 정말 중요할 수밖에 없다. 좋은 사람을 가까이에 두고 나쁜 사람은 멀리 해야 하니 말이다. 문제는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를 어떻게 아느냐는 것이다. 사람을 파악하는 일이 쉬웠다면 상대방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일은 드물었을 것이다. 상대방 때문에 당황하는 일도, 실망하거나 배신당하는 일도 별로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심리학에서는 사람을 살피는 다양한 방법을 제시해 왔다. 동양에서도 오래전부터 이와 관련한 가르침이 전해오는데 논어 ‘위정(爲政)’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을 보자. “그 하는 것을 보고, 그 말미암은 이유를 살피며, 그 편안히 여기는 바를 살펴본다면 사람이 어찌 자신을 숨길 수 있겠는가(子曰, 視其所以, 觀其所由, 察其所安, 人焉廋哉?).” 먼저 ‘그 하는 것을 본다’란 외부로 드러난 그 사람의 행동을 확인하라는 것이다. 행동이 올바른지 아닌지를 보면 어느 정도 사람됨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속마음과 행동이 다른 사람이 있을 것이다. 위선자여서, 혹은 이해타산을 따져서 착한 척 행동할 수 있다. 반대로 선한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어 나쁜 행동을 할 수도 있다. 공자가 ‘그 말미암은 이유를 살피라’라고 말하는 것은 그래서다. ‘저 사람이 저렇게 행동한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이 저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가?’, ‘저 사람의 가치관과 삶의 기준은 무엇일까?’를 면밀하게 살피다 보면 그 사람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 공자는 한 가지를 더 추가한다. ‘편안히 여기는 바를 살펴보라’다. 어떤 사람을 친구로 두는가, 어떤 사람과 있을 때 편안함을 느끼는가, 무엇을 할 때 즐거워하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성향을 알 수 있다. 그가 무엇을 갈구하고, 무엇을 욕망하는지를 보면, 또 어떤 것을 충족했을 때 가장 만족감을 느끼는지를 보면 그 사람이 추구하는 바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세 가지를 다 했다고 해서 내가 저 사람을 다 알았다고 자신해서는 안 된다. 일찍이 중국 당나라 때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옥은 사흘만 불에 넣어 보아도 품질을 알 수 있지만 사람은 7년은 족히 기다려야 가릴 수 있다”고 했다. 아니, 7년도 부족할 수 있다. 20년 넘게 믿고 의지하던 사람에게 뒤통수 맞는 일도 있으니 말이다. 그 사람과 오랫동안 지내오며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나의 예상을 깨뜨리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므로 공자의 이 가르침은 한 번에 판단하고 결론을 내라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계속 이렇게 상대를 살펴보라는 당부로 봐야 한다. 더욱이 공자의 이 말은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를 판가름할 때만 쓰이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와 친해지고 싶다면 그 사람의 성향을 파악하고 그 사람의 스타일에 맞춰줘야 한다. 그럴 때 그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그가 편안하게 생각하고 즐기는 것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방법은 없지 않을까?

[삶과 종교] 새해를 맞이하여 크게 웃자

설 명절이 지났다. 다 같이 맞이한 설날이라도 느끼는 감정은 저마다 다르리라. 새로운 한 해를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기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지나간 한 해가 아쉽고 더 먹은 한 살 나이가 울적하게 느껴지는 사람도 있으리라. 한자리에 모이는 가족들 생각에 즐거운 사람도 있을 것이고,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안 볼 수만 있다면 서로 보기 싫다는 사람도 있으리라. 명절 연휴에 신나게 놀고 편히 쉴 달콤한 계획에 빠진 사람도 있을 것이고, 오히려 명절 휴일이 퍽퍽하고 가슴 무겁게 철렁거렸던 사람도 있으리라. 다 같이 맞이했던 설날이라도 이토록 느끼는 심정이 저마다 다른 색깔과 다른 무게로 다가온다. 그래도 웃어야 한다. 인생이란 그렇더라. 높은 산과 같다고. 오르막길도 있고 내리막길도 있다. 평지를 거닐 때도 있다. 꽃길이 펼쳐 질 때도 있고 울퉁불퉁한 돌길이 드러날 때도 있다. 산길을 걷는 것은 한결같지 않다. 인생길도 그렇다. 삶의 걸음 앞에 놓인 길 자락이 한결같지 않다. 저마다 가고 있는 산길도 사람마다 다르다. 보송보송한 흙길로 가는 사람도 있고, 컥컥 숨이 차오르는 바위산도 있다. 어쩌겠는가. 내가 선택한 길은 아니지만 결국 내 앞에 놓인 길인 것을. 그래서 이왕 걸을 길이면 조금이라도 웃으면서 가자. 어차피 가야 할 길인데 인상 팍팍 쓰면서 걸을 것인가. 결국은 가야 할 길인데 노래라도 부르고 흥겨워하면서 웃으며 갈 것인가.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앞에 놓인 인생의 길은 나의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 길을 걸으면서 웃으며 갈지, 울면서 갈지는 온전히 나의 선택입니다.” 누가 말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말씀이 참 좋아서 내용은 기억한다. 그래 어차피 갈 거라면 웃으며 가자. 어떤 사람은 말한다. “인생이 퍽퍽해서 웃을 힘도 없습니다.” 그 말도 맞다. 세상 힘든 사람이 오죽 많은가. 뉴스를 보기가 싫어진다. 온통 괴로운 이야기뿐이다. 그런데 그게 세상의 현실이다. 현실이 괴롭다고 마냥 먼 산만 보겠는가. 불교에서는 우리 중생이 사는 세상을 사바세계(娑婆世界)라고 부른다. 사바세계의 뜻은 ‘참아야만 살 수 있는 세계’라는 뜻이다. 교회 다니던 분에게 사바세계의 뜻을 설명하니 무릎을 탁 치며 감탄했다. “스님. 제가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사바세계의 뜻이 마음에 확 와 닿습니다.” 인생의 연륜이 깊어진 분들일수록 동감하는 말씀이 있다. “인생 살아 보니 내 뜻대로만 살아가지가 않더라. 인생 잘 사는 법이 어디 있겠냐. 힘들고 답답해도 꾹 참고 사는 게 인생이지. 어떻게 내 마음대로만 살 수 있겠는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사바세계다. 참아야만 살 수 있는 세상이다. 웃을 힘도 없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밥 먹을 힘은 있다. 잠잘 힘도 있다. 어디로 놀러 갈 힘도 있다. 남 욕할 시간도 있다. 하다 못해 숨 쉴 힘이라도 있잖은가. 그냥 웃을 뿐이다. 아무리 괴롭고 답답해도 나의 웃음조차 앗아갈 수는 없다. 웃음은 온전히 나의 선택이다. 화가 나면 화를 좀 낼 수도 있다. 짜증 나면 짜증 낼 수도 있다. 정말 욕이 튀어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웃어야 한다. 조금 더 웃고, 조금 더 친절하고, 조금 더 내 마음을 닦아 줘야 한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다. 늘 현재일 뿐이다. 순간 순간 현재일 뿐이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일단 웃어야겠다. 그리고 자꾸 웃도록 노력해야겠다. 늘 웃을 수 있는 새로운 한 해가 되기를. 모든 분들이 행복하기를 기도해본다.

[삶과 종교] 거룩한 항해

인생의 의미를 ‘항해’에 빗대곤 한다. 고대 로마의 철학자인 세네카는 ‘인생은 항해’라는 유명한 경구를 남겼다. ‘지대넓얕’의 작가 채사장은 TV 강연에서 “출항과 동시에 사나운 폭풍에 밀려다니다가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같은 자리를 빙빙 표류했다고 해서, 그 선원을 긴 항해를 마친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긴 항해를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오랜 시간을 수면 위에 떠 있었을 뿐이다”라는 세네카의 말을 인용하며 인생을 열심히 살았는지, 아니면 그저 생존했는지 구분하기도 했다. 한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산 것인지, 다만 생존한 것인지 그 누구도 평가할 자격과 기준은 없다. 사실 세네카도 자살로 삶을 마감하지 않았는가. 세네카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더라도 대부분 새해를 시작하며 행복하고 가치 있는 삶을 위해 계획하고 준비한다. 그러나 인생의 항해에서 자주 간과하는 부분이 있는데 항해는 결코 혼자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인생의 항해를 떠남에 있어 가정, 직장, 사회, 국가, 종교, 세계 등 수많은 배를 타야 하고 배에 함께 탄 사람들과 운명을 같이해야 한다. 새해를 맞아 내가 속한 공동체와 대한민국이라는 배의 항해가 출발부터 험난하다. 물가와 금리가 치솟아 서민경제는 태풍을 맞은 듯하고 정치적인 분위기는 풍랑이 이는 바다처럼 어수선하다. 이런 항해를 지속하다가는 우리가 함께 타고 있는 배가 난파하거나 침몰할 위기에 봉착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2023년 항해를 위한 해법은 무엇인가? 단언하면 거룩한 항해다. 창세기 18장에는 낯선 자를 대접하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아브라함은 섭씨 50도가 넘는 더위 속에서 걸어오는 낯선 사람 세 명을 발견한다. 당시 고대 사회에서 낯선 이들은 위험한 존재였으나 아브라함은 신발도 신지 않고 뛰쳐나가 낯선 자들을 맞이한다. 아브라함은 주위 사람들, 특히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의 처지를 자신의 일처럼 여기고 처음 보는 사람들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환대했다. 공동체 구성원들을 절대적으로 환대하는 것, 그들에게 자리를 주고, 그 자리의 불가침성을 선언하는 것이야말로 사회가 성립하기 위한 조건이다. 이는 공리주의적 사람관을 경계하는 대목이고 거룩을 이루는 삶이다. ‘거룩’이란 용어는 히브리어 ‘카도쉬(kadosh)’인데 ‘구별’, ‘다름’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흔히 세속과 구별돼 신의 말씀에 입각해 나 자신의 생활을 바로잡는 것을 거룩이라고 한다. 나아가 거룩이란 나와 다른 낯선 이와 편안하지 않은 것을 배척하지 않고 그것을 깊은 사유와 배려를 통해 섬김과 사랑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 즉 구별과 다름, 다양한 차이를 인정하며 사는 것이다. “나를 챙기면서 이웃을 챙기는 것.” 그것이 거룩한 삶의 핵심이다. 2023년 우리 삶의 항해가 이러한 거룩으로 점철된다면 나뿐만 아니라 내가 속한 공동체에 뿌듯한 성취와 보람이 있을 것이다.

[삶과 종교] 2023년 올해의 운세

매년 새해가 되면 많은 이들이 사주팔자를 통해 자신의 운세를 내다 보려 한다. ‘올해에는 대박이 났으면’, ‘올해에는 좋은 일만 있었으면’ 하고 자신의 미래에 기운을 불어넣어 줄 운세를 기대한다. 그러나 누구나 매번 좋은 운세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또 좋은 운세가 나왔다 해서 좋은 결과로만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명리학이 지닌 일종의 공식에 따라 사람의 운을 예측할 수 있을 뿐, 사람의 미래에는 여러 변수가 깔려 있고, 그 운세를 다스리는 마음가짐과 처신 또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명리학에 따르면 같은 날 태어난 쌍둥이일지라도 각자에게 주어진 환경에 따라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송강호 배우가 관상가 역할로 등장하는 영화 ‘관상’에 이런 말이 나온다. “난 사람의 얼굴을 봤을 뿐, 시대의 모습을 보지 못하였소. 시시각각 변하는 파도만 봤을 뿐, 파도를 움직이는 바람을 봐야 했는데! 파도를 만드는 건 바람인데 말이오!” 사람이 파악할 수 있는 것 그 너머에 사람의 힘으로 파악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서도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요한 3장 8절)고 이야기한다. 쉽게 말해 만사가 우리의 뜻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바람의 방향을 살피고, 그 바람을 주관하는 이의 의도를 헤아리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바람이 생기게 된 원인과 바람이 초래할 결과, 그리고 수많은 변수까지 인간이 모두 파악할 수 없지만 과학기술의 발달로 바람이 어디서 불고 어디로 가는지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 또 뜻하지 않은 자연재해 앞에 인간은 무력하고 나약한 존재이지만 기후변화에 따른 재난 발생 가능성을 낮추기 위해 그 변화를 관찰하고 예측하려 한다. 누구든지 죽음의 순간을 알 수 없고 통제할 수 없지만 의료기술의 발달로 사고와 병으로 인한 고통을 어느 정도 치료할 수 있다. 보이는 것 그 너머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음을 감지할 수 있고 동시에 인간은 그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만약 누군가가 미래를 알고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미래를 안다는 것은 미래가 미리 정해져 있으며, 미래를 완전히 바꿀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게 한다. 이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은 인간에게 닥칠 미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체념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미래를 아는 이는 추앙받을 것이고, 급기야 그는 종교를 만들고 신이 되려 할 것이다. 절대적 운명론을 믿는 현대판 사이비종교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미래를 아는 것과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은 미래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며, 우리가 예상했던 것과 다른 길로 흘러갈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적어도 부분적으로나마 미래를 짐작하기 위해 과거를 살피고, 과거에 했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는다. 2023년 운세에 대해 누군가의 조언을 듣기보다 자신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고 겸손하게 자신의 삶을 스스로 완성해 나가는 것은 어떨까.

[삶과 종교] 연초에 공자를 돌아보다

전공이 전공이다 보니 수업에서 자주 공자의 가르침을 언급하곤 한다. 그런데 의문이 들 것이다. 아무리 공자가 훌륭한 성인(聖人)이고 좋은 말을 많이 남겼다고 해도 2천500년이 흐른 지금 세상에 적용할 수 있는지 말이다. 이 질문에 답하려면 공자가 살던 시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문명의 발달 수준이야 당연히 비교도 안 되겠지만, 오늘날과 유사한 점이 많다. 공자의 춘추시대는 기존의 가치관이 전복되고 무한경쟁이 펼쳐졌던 시기다. 인간다움이 상실되고, 이익과 결과만 중시하는 사회 풍조가 강했다. 일상의 평범한 삶이 위협받고 불확실성은 나날이 가중되고 있었다. 공자의 사상은 이러한 시대 현실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했다. 그는 극단적 환경 속에서 소외되고 있는 인간을 우려하고, 무엇이 사람다운 것인지, 무엇이 사람다운 삶인지를 성찰하라고 가르쳤다. 그리하여 각자가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고, 나를 둘러싼 소중한 관계를 잃어버리지 말라고 당부했다. 특히 주목할 것은 마음의 중심을 잡으라고 강조한 점이다. 오늘날 불확실성이 갈수록 짙어지고 사회 변화의 속도는 너무나 빨라지고 있다. 3년 전 우리의 생활방식은 코로나19를 거치면서 순식간에 ‘올드 노멀’이 돼 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변화를 앞서 예측하고 대응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상상하지 못한 미래가 언제든 펼쳐질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마음의 역량을 갖추는 길밖에 없다. 올바르게 상황을 인식하고 판단하며,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주관과 편견을 배제한 채 신속하고 냉정하게 대처하는 힘이 절실해졌다. 이런 상황에 놓인 우리에게 공자의 가르침은 곱씹어볼 만하다. 공자는 “제멋대로 억측하지 않았고, 반드시 이래야 한다고 단언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지 않았고,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내세우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제자들에게 무엇보다 객관적이고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쳤다. 마음이 평탄하게 넓어야 한다고 당부했고, 내 마음을 살펴 잘못된 생각을 품고 있지는 않은지 항상 반성하라고 강조했다. 남들이 보고 듣지 않는 은밀한 곳에서도 흐트러지지 말라고 이야기했고, 화를 옮겨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지금 이 순간의 최선은 무엇인지, 무엇이 올바른 선택인지를 고민하고 행동하라는 중용(中庸)은 이러한 공자의 가르침을 집약해 보여준다. 이를 통해 공자는 각자 삶의 주체가 되길 바랐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풍요롭든 가난하든 내가 결정하지 못하는 삶, 내가 주체가 되지 못하는 삶은 나의 삶이 아니라는 것이다. 새롭게 시작된 2023년, 올해도 우리는 수많은 거시적, 미시적 문제들과 마주해야 한다. 불확실성도 여전할 것이다. 바로 이러한 때에, 공자의 가르침은 우리가 이 시대를 뚫고 나아갈 힘을 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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