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우 to the 영 to the 우

지난달 종영된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큰 화제를 몰고 왔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지닌 주인공 ‘우영우’가 변호사가 돼 여러 사건을 맡아 사회적인 문제들과 편견들을 그녀만의 방식으로 풀어가는 시청률 높았던 드라마다. 가장 특이한 점은 주인공 ‘우영우’다. IQ 164의 높은 지능을 가졌지만, 사회적 공감력이 다소 떨어지는 장애를 지녔다. 흥미롭게도 우리 대부분보다 우월한 동시에 우리 대부분보다 열등한 존재다. 즉, 이 드라마는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구별될 수는 있지만,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에 우열을 가리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느끼게 한다. 마치 세상에 큰 메시지를 던지는 듯한 아름다운 드라마다. 물론 드라마와 현실은 같을 수 없다. 사회 곳곳에 존재하는 차별은 여전히 많기 때문이다. 특별히 프란치스코 교황은 장애인들을 다른 사회구성원과 분리해 생각하는 것이 참으로 위험한 일이라고 경고한다. 그리고 이러한 차별이 마치 생존본능(?)을 지닌 것처럼 이야기한다. “차별은 선입견, 무관심, 그리고 개개인이 지닌 귀중한 가치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문화를 먹고 삽니다. 특히 사회적 장벽과 각 개인의 한계가 상호작용한 결과에 따라 장애를 일종의 질병처럼 생각하는 경향은 장애인의 삶과 비장애인의 삶을 갈라 놓고 장애인에게 낙인을 찍는 현실을 지속시킵니다.” 여전히 세상은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고, 사회가 규정해 놓은 정상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면 소외되기 쉬운 구조다. 여기서 사회 속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에 보이지 않는 장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시각장애인 모두가 전혀 보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여기는 편견, 청각장애인들 모두가 수어만을 사용할 거라는 착각, 그리고 장애인들은 모두 돌봄 시설에 있을 것 같은 생각 때문에 장애인들이 진정한 인격체로서 정상적인 사회구성원이 되기란 참으로 어려운 현실이다. 바로 장애인은 나와 다르고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라 여기는 높은 장벽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불편한 진실 중 하나로 2017년 보건복지부에서 실시한 장애인 실태조사에서 장애인들 중 88.1%가 후천적 장애를 갖게 됐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다시 말해 태어날 때부터 장애인이었던 사람보다 살다 보니 사고를 당하거나 질병 때문에 어느 날 장애인이 된 경우가 훨씬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50대 이상의 장애인이 76.9%라는 점에서 나이가 들수록 질병으로 인해 장애인이 될 가능성 또한 크다. 즉, 장애는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며 나이를 먹는 우리 모두의 일일 수 있다. 화제가 됐던 ‘우영우’ 인사법! ‘우 to the 영 to the 우!’라고 외치는 대사는 이 드라마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메시지라 여긴다. 장애인인 ‘우영우’와 비장애인 친구 ‘동그라미’가 어떠한 사회적 장벽도 없이, 남의 시선에 굴하지 않고 그들만의 고유한 연결고리로 대화한다. 그 연결고리는 서로 다르지만, 각 개인은 고유하고 소중하기에 서로를 필요로 하고 의지하는 사이가 된다. 동시에 친구의 아픔이 나의 아픔인 것처럼 고민해주는 사이가 된다. 우리 현실에서도 이렇게 아름다운 연결고리를 꿈꿀 수는 없는 것일까? 우 to the 영 to the 우! 김의태 수원가톨릭대 교회법 교수

[삶과 종교] 눈으로 보았다고 해서 진실인가?

‘여씨춘추(呂氏春秋)’라는 책에 나오는 일화다. 공자가 제자들과 천하를 떠돌다가 돈과 식량이 떨어져 고생한 적이 있다. 일주일이 넘도록 쌀 한 톨 입에 넣지 못했다고 한다. 다행히 제자 안회가 쌀을 구해와 밥을 지었는데, 식사를 기다리던 공자가 문득 부엌을 내다보니 안회가 솥을 열고 밥을 집어먹고 있었다. ‘다들 굶주리고 있는데 자기 배 먼저 채우려 들다니!’ 공자는 괘씸했지만 모른 척했다. 그리고 안회가 밥상을 차려오자 “조금 전 낮잠을 자다가 꿈에서 아버님을 뵈었다. 먼저 아버님께 제사를 올린 뒤에 식사하고 싶구나”라고 말했다. 그러자 안회는 놀라며 “안 됩니다. 아까 뜸이 잘 들었나 보려고 솥을 열었을 때 천장에 있던 그을음이 떨어졌습니다. 밥을 버리는 것이 상서롭지 못해 제가 걷어내어 먹었으니 제사에 쓸 수가 없습니다”라고 했다. 공자가 안회를 오해한 것이다. 공자는 탄식하며 말했다. “내가 그동안 눈으로 본 것은 믿어 왔지만 완전히 믿을 게 못 되는구나. 그동안 마음으로 생각한 것을 의지해 왔지만 완전하게 의지할 수는 없구나. 너희들은 직접 보고 들었다 해도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라.”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일화가 주는 교훈만큼은 공자가 평소 강조해 왔던 내용에 부합한다. 논어 ‘자한’편에 따르면 공자는 평생 네 가지를 절대로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제멋대로 억측하지 않았다는 ‘무의(毋意)’, 반드시 이래야 한다고 하지 않았다는 ‘무필(毋必)’,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지 않았다는 ‘무고(毋固)’,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내세우지 않았다는 ‘무아(毋我)’. 요컨대 자기 판단이나 생각만 옳다고 여기지 않고 편견에서 벗어나 항상 사안의 참 모습을 보고자 노력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는 어떤가. 내 생각이나 믿음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면, 잘못된 나의 인지를 바로잡기는커녕 확증편향으로써 부조화를 제거하려 드는 경우가 있다. 반대되는 증거가 쏟아져 나오더라도 부정하거나 외면한다. 이러한 태도는 스스로에 대한 거짓말로 이어지고, 그 거짓말을 진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게 만든다. 내 멋대로 억측하고 반드시 이럴 거라며 단언하게 만든다. 이 지경에 이르면 잘못 행동하면서도 잘못됐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무릇 같은 상황이라도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법이다. 하물며 내가 인식한 대로만 억측하고, 내가 생각한 대로만 단언한다면 어떻게 될까? 내 정신의 편향은 갈수록 심해져 진실과는 점점 더 멀어지고 말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도 불가능해진다. 따라서 우리는 제멋대로 억측하지 않은 공자의 자세를 본받아야 한다. 내가 본 것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 내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것을 항상 전제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다. 공자 같은 성현도 자기가 본 것을 믿고 안회를 오해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공자의 가르침을 기억한다면 적어도 잘못된 길로 빠지진 않을 것이다. 김준태 성균관대 유학동양학과 초빙교수

[삶과 종교] 사랑과 용납이 순환되는 나라

어느 설교가는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세대를 빗대어 ‘칠면조의 세대’라고 논평했다. 칠면조들은 함께하던 무리 중에 한 마리가 등에 상처를 입게 되면 같이 지내던 다른 칠면조들이 모두 달려들어 상처 입은 칠면조를 쪼아 그 상처에서 피가 나고 쓰러질 때까지 공격하는 습성이 있다는 것이다. 칠면조들이 상처 입고 어려움 당한 칠면조를 더욱 공격해 쓰러뜨리는 모습이 마치 오늘의 이 세대의 ‘약육강식’ 모습과 동일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포스트모더니즘시대는 한 개인의 자기 느낌과 자아의 주관적인 경험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정신 사조를 가지기 때문에 공감하고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점점 잃어가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이런 사조가 굳어지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마음의 공간을 잃게 된다. 우리는 매일 아침 전쟁의 이야기를 원하지 않아도 듣고 보고 있다. 강한 나라가 작은 나라를 향해 힘의 논리로 전쟁을 일으키고 많은 사상자를 만들어 내는 모습이 마치 칠면조들이 상처 입은 약한 칠면조를 공격해 물어뜯는 짐승들과 다를 것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사람은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통해 인간애를 배우게 된다. 용납해주고 사랑해주는 모습 속에서 우리는 인간된 자신의 존재를 바르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예수님 앞에 발가벗겨진 한 여인이 사나운 남자들에 의해 매를 맞고 피를 흘리며 끌려왔다. 그녀는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혀 당시 유대교의 법으로 돌로 쳐 죽임을 당하게 된 여인이었다. 당시의 종교법으로는 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돌로 쳐 죽여야 했다. 그런데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가르친 예수님이 그녀를 돌로 쳐 죽이라고 하면 말과 행동이 다르다는 이유를 예수님까지 거짓 선생으로 몰아서 돌로 치려는 아주 나쁜 계략을 예수님은 아셨다. 피가 흐르는 돌을 들고 광분해 있는 그들에게 이성적인 정신을 차릴 시간을 예수님은 기다리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너희들 중에 죄가 없는 사람이 이 여인을 돌로 치라.” 그리고 그분은 침묵하며 광분한 사람들을 기다리셨다. 그러자 돌을 들고 흥분해 있던 사람들은 한 사람씩 돌을 내려놓고 그 자리를 떠났다. 광분을 용납하고 기다리심의 시간을 예수님이 그들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피를 흘리며 두려움에 떨며 고통하는 그 여인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여인아,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예수님의 이 가르침은 돌을 들고 정죄하던 자들도 용납하시고 죄를 지은 여인도 용납하시는 판결이었다. 멋지게 사람을 용납해주는 사회를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고 싶다. 사랑해주고 이해해주고 용납하는 문화와 풍토가 내 조국 대한민국에 아름다운 강이 되어 흘러가기를 기도하며 기대해 본다. 조상훈 만방샘 목장교회 목사

[삶과 종교] 비, 헹, 분, 섞!

2015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회칙 「찬미 받으소서」을 반포하며 전 세계의 생태적 회개를 촉구하였다. “우리 후손들, 지금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어떤 세상을 물려주고 싶습니까?” 기후 위기는 단지 한 종교지도자의 주장이 아닌 세계 각국의 과학자들이 분석한 「1.5도 특별 보고서」에서도 그 심각성이 드러난다. 지구 평균 기온이 산업화 이전 대비 1.5도 이상 상승하게 되면, 지구는 원래 기후로 되돌아갈 수 있는 탄력을 잃어버려 결국 지구의 모든 생태계가 파국에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세계적인 분석 기관인 ‘기후 행동 추적’(Climate Action Tracker)은 우리나라를 세계 4대 ‘기후 악당 국가’로 지적하였다. 즉 우리나라가 기후 변화에 무감각하고 나태한 국가라는 의미다. 교황은 기후 위기에 대한 원인 중 하나로 “버리는 문화(「찬미받으소서」 22항)”을 지적한다.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를 부추기는 자본주의 문화는 인간의 삶을 편리하고 유용하게 만들지만, 감당할 수 없는 쓰레기를 양산하고, 급기야 물건을 쉽게 쓰레기로 버리는 문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교황은 이러한 문화로 인해 물질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인간의 인권과 의식, 그리고 감성까지도 쉽게 버려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럼 우리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성경에 지혜를 청한다면, 바로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라’라는 말씀이지 않을까 싶다. 우리의 삶과 죽음은 자연 생태계의 순환 과정임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식물은 초식 동물에게, 초식 동물은 육식 동물의 먹이로, 육식 동물의 배설물은 다시 새로운 식물을 자라게 하는 양분으로 순환하는 것처럼 말이다. 유학 시절, 독일에서 믿을 수 없는 재활용 제도를 만나게 되었다. 일회용 제품을 줄이기 위해 용기에 보증금을 매겨 반납하는 일명 판트(Pfand)라는 보증금 환급 제도였다. 비닐뿐만 아니라 페트병과 캔, 유리로 만들어진 용기도 마트에 비치된 수거 기계에 넣으면 하나당 최대 50센트(대략 700원)를 돌려받는다. 독일은 이러한 자원 순환적 생산 방식을 채택하여 2019년 페트병의 재활용률이 거의 100%에 이른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자원순환’ 시스템을 채택하고 있다. 일명 폐기물 발생을 최대한 줄이고, 사용한 폐기물에 대해서는 재사용 또는 재생 이용하며, 불가피하게 남은 폐기물은 최소화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아직 미흡한 점들이 많다. 많은 이들이 쓰레기처리에 대해 아직도 ‘분리배출’이 아닌 ‘분리수거’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고, 재활용 가능한 배출물을 수집·선별하는 정부 혹은 지자체 지원 선별장이 부족하며, 아직도 투명 페트병과 다른 플라스틱과 혼합 배출하여 고품질 재활용품 생산이 제한적이다. 이러한 점들을 보완하고 개선한다면 분명 작지만 소중한 노력이 모여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것이라 믿는다. 이러한 선순환을 위한 캠페인, 일명 “비, 헹, 분, 석”을 몸소 실천해보는 것은 어떨까? 바로 “비우고, 헹구고, 분리하고, 섞지 않는 분리배출!” 김의태 수원가톨릭대 교수

[삶과 종교] 허공에 대한 명상

허공, 즉 하늘에 대해서 명상을 해보자. 우리에게 시간이 있다면 하늘을 바라보며 때로는 눈을 뜨고 때로는 눈을 감은 채로 명상을 해보자. 이렇게 눈을 감아도 하늘에 대한 명상이 가능함은 우리의 내면에도 하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늘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포함돼 있다. 하늘은 항상 현존하면서도 동시에 부재(不在)이다. 하늘은 어느 곳에나 존재하지만,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하늘은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존재한다. 하늘은 모든 것을 담고 있지만 동시에 그 무엇도 담고 있지 않다. 하늘은 죄인이든 성인이든 선이든 악이든 아름다움이든 추함이든 모든 것들을 받아들인다. 가왕이라 불리는 조용필의 노래인 ‘허공’ 가사에서도 “사랑했던 마음도 미워했던 마음도 허공 속에 묻어야만 될~”이라 했다. 하늘에는 아무런 차별이 없어서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도 없다. 검은 구름이 몰려오면 하늘은 그것을 위해 자리를 양보한다. 흰 구름이 몰려와도 마찬가지다. 하늘에는 어떠한 차별도, 어떠한 선택도 없다. 그저 받아들이기만 한다. 이것을 일러 역시 가수 김국환의 노래 제목처럼 타타타(tathata·如如)라고 부른다. 하늘은 이렇게 타타타의 상태로 존재한다. 그래서 타타타 상태의 하늘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다. 남자와 여자, 동물, 새, 나무, 돌, 별과 태양, 모든 것에게 무조건적이다. 누구나 가까이할 수 있다. 하늘은 모든 것을 보호해 주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돌보지 않는다. 구름은 오가지만 하늘은 늘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하늘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됐지만 아직도 이슬처럼 신선하다. 하늘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 우리는 사실 항상 내면의 하늘과 외부의 하늘 사이 문턱에 서 있다. 외부의 하늘이 무한하다면 내면의 하늘도 무한하다. 만일 우리가 외부의 하늘로 향한다면 그것은 기도가 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내면의 하늘로 향한다면 그것은 명상이 된다. 하지만 양자는 궁극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두 하늘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양자를 나누는 경계선은 항상 우리 자신이었다. 우리가 하늘처럼 ‘나’라는 에고와 ‘입장’이 사라진다면 그러한 경계선도 사라질 것이다. 그때는 안이 밖이고, 밖이 안이다. 우리의 존재 전체를 받아들이는 하늘은 그 존재를 감싸면서도 동시에 손끝 하나 대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하늘, 즉 반야라는 큰 지혜의 작용 방식이다. 최성규 철학박사·한국미술연구협회 이사장

[삶과 종교] 참 행복을 맛보며 살아가는 나라를 위하여

인권(人權)은 인간이 이 땅에 태어나면서 가져야 할 기본적인 보장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도 국민의 권리가 헌법의 기본권으로 존재한다. 각 사람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행복하기 위해서 어려움과 고통과 피곤함을 이겨내 간다. 자녀들의 행복을 위해 부모들은 땀을 흘리며 일을 하고 자녀들은 미래의 행복을 준비하기 위해 오늘의 삶을 최선을 다해 준비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라는 행복은 무엇인가? 행복(幸福)이란 단어의 사전적 정의는 ‘흐뭇하도록 만족해 부족이나 불만이 없음. 또는 그러한 상태’라고 한다. 사전적인 의미만 놓고 본다면 ‘행복’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무엇인가에 만족한다는 뜻이 된다. 원래 우리말에는 행복이라는 단어가 없었고 이 개념 자체가 서구에서 수입된 것이다. ‘행복’이라는 말은 19세기에 일본의 학자들이 서구의 개념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만들어낸 신조어로서 그 후 우리나라에 수입된 것이다. ‘행복’은 일본에서 번역된 언어로 만들어낼 때 가장 고심했던 단어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영어의 ‘happiness’라는 단어는 어원상 ‘하나님이 허락한 좋은 시간’으로 기독교적인 하나님의 개념에서 출발된 단어였던 것이다. 동아시아의 사고에는 없는 개념이었으므로 일본의 번역자들은 물질적 풍요와 관련이 있는 두 글자인 ‘다행 행’과 ‘복 복’자를 붙여서 행복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 결과, 행복은 다분히 샤머니즘적인 개념으로 이해가 된 단어가 됐다. 그래서 기독교 안에서조차 이 행복의 개념이 성경 속에서 나오지 않고 세상 사람들의 행복처럼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로 많은 사람들은 헛된 행복을 잡으려고 3가지 가짜 행복에 속아 살아가고 있다. 첫째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가져야 행복할 것이라는 잘못된 착각이다. 둘째는 더 많은 것을 소유해야 남들에게 인정받게 되고 그것이 행복이라는 착각이다. 그리고 셋째는 내가 가지고 있는 무엇인가가 이 땅에서 나를 보호해 줄 것이라는 착각이다. 우리는 착각된 행복을 잡으려 할수록 더욱 참 행복에서 멀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참 행복은 내 안으로 무엇을 끌어 모으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서 무엇인가가 밖으로 흘러 나가는 것으로 행복이라고 가르친다. 서로 나누고 베풀고 섬기는 삶 속에서 우리는 사람을 얻게 되고 그 사람들과 함께 보람을 경험하는 것이 참 행복이라고 가르친다. 경쟁하는 사회 속에서도 우리가 타인의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Post Modernism이라는 후기 현대 사회다. 모든 것들이 원칙이 없어져 가는 각 개인주의가 흘러 넘쳐가고 있다. 우리들이 날마다 접하는 새로운 소식들은 희망보다 절망적인 내용들로 가득하다. 전쟁의 고통과 경제의 압박감과 무서운 경쟁의 치열함 속에서 살아남는 것조차 힘들어 보인다. 그러나 그때가 바로 행복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의 때가 아닐까? 치열한 삶의 경쟁 속에 지쳐있는 내 옆에 있는 그 한 사람에게 따스한 손을 내밀어 줄 때 그 때가 바로 우리가 기대하는 행복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행복은 거창하게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격려하고 인정해 주는 것이다. 조상훈 만방샘 목장교회 목사

[삶과 종교] 우이령 길 개방을 바라며

북한산 국립공원에 자리한 우이령 길은 1968년 1월 김신조를 비롯한 무장간첩들이 우이령을 거쳐 청와대 습격을 시도한 이후 민간인의 출입이 금지됐다. 북한산내 우이령길은 양주시 장흥면 교현리와 서울 강북구 우이동을 최단 거리(6.8km)로 잇는 옛길로 오래전부터 우리 조상들이 자유롭게 오가던 곳이다. 그러나 1968년 이후 41년간 인적이 사실상 끊겼다. 이로 인해 서울과 경기를 잇는 주요 도로가 폐쇄되어 시민과 도민들의 불편이 가중되면서 지역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한 것이 사실이다. 또한 우이령 인근에 자리한 천년고찰 오봉산 석굴암은 출입 할 때마다 군부대의 허가를 받아야 했기에, 일상적인 신행 활동이 불가능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으로 2009년 7월부터 생태 탐방로 형식으로 부분 개방하여 사전예약제를 시행해 이전보다 출입하는데 어려움이 줄어들었지만 불편함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특히 차량이 교차하기 어려운 비좁은 비포장도로로 인해, 우이령을 이용하는 탐방의 민원은 여전하다. 부처님오신날이나 정기법회가 있는 날 연세가 지긋한 어르신들이나 몸이 불편한 분들이 탄 차량이 우이령 길을 운행할 때면,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탐방객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주민들도 1968년 이전에는 우이령을 이용해 서울 강북구를 오갔지만, 그 후로는 몇 십리를 돌아가야 했기에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타격을 크게 입었다. 이러한 이유로 석굴암 신도들은 물론 경기도 양주시민과 서울 강북구민들도 우이령의 전면 개방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특히 윤석열 대통령 취임 이후 새 정부 출범을 계기로 청와대와 북악산이 전면 개방되는 상황에서 우이령만 여전히 부분적으로 출입을 통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여론이 거세지고 있다. 서울 강북구민들이 진행하고 있는 ‘우이령길 상시개방 범구민 서명운동’에는 6월 30일까지 4만 9487명이 참여했다. 석굴암과 양주시민들이 추진하는 서명에도 적지 않은 인원이 동참해 우이령길 전면(상시) 개방은 더이상 늦출 수 없는 현안이 되었다. 양주시는 11개 읍면동의 리통장 275명을 대상으로 서명부를 받고 있으며, 석굴암 역시 신도와 탐방객들에게 서명을 받고 있다. 윤석열대통령 후보당시 불필요한 규제완하 공약과 경기 도지사도 공약 한 바 있다. 유격장 이전과 우령길 북한산 내 유격장 이전을 특히 석굴암은 제25교구본사인 봉선사와 함께 각처와 요청하는 청원서와 서명을 대통령에게 제출할 계획이다. 국방 개혁의 일환으로 군부대 통폐합을 실시했지만, 우이령 인근에 유격장이 여전히 운영되고 있어 훈련이 노출되는 취약점을 보이고 있다. 우이령길 전면개방과 유격장 이전이 이뤄지면 시민이나 탐방객의 숫자는 더욱 늘어나고, 주민 생활의 편의도 증가할 것은 분명하다. 이를 계기로 서울 강북구와 양주시는 물론 경기도 북부 일대의 지역 경제도 한층 활성화될 것으로 기대된다. 북한산 내 21곳의 둘레길 가운데 완전히 개방하지 않은 유일한 곳이 바로 우이령길이다. 1968년 이후 국가안보를 위해 55년간 정신적, 물질적, 경제적 피해를 감수해온 우이령 길 인근의 주민은 물론 국민 모두를 위해서도 정부는 이제 전면 개방의 결단을 내려야 한다. 우이령길 전면 개방으로 국민들이 언제나 자유롭게 찾아봐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만끽하여 코로나 19와 경기침체로 인한 고통을 치유받는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염원한다. 자연환경의 소중함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자연과 함께 소중한 것이 사람의 삶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특히 새로 출범한 정부에서 주민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 우이령길 전면 개방의 용단을 내기를 기대한다. 오봉도일 스님 25교구 봉선사 부주지·양주 석굴암 주지

[삶과 종교] 이 전쟁을 멈춰 주세요

2022년 2월 교황 프란치스코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사건을 개탄하며 “이 무장 공격을 멈춰야 합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호소합니다. 이 학살을 멈춰 주세요!”라고 외쳤다.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이 전쟁은 안타깝게도 두 나라뿐만 아니라 국제사회를 넘어 우리나라에까지 그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먼저 우크라이나 곡물 수출이 봉쇄되었고, 특히 최빈국에 사는 수백만 명의 식량이 부족해지는 현상으로 이어졌다. 하물며 이러한 식량 불안정 사태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무기가 되어 버렸다. 세계 5대 수출국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밀 공급 감소는 유럽과 미국의 원자재 시장에서도 가격을 유례없는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이는 전 세계 물가에도 영향을 주어 대한민국의 물가 상승으로도 이어졌다. 이 전쟁은 결코 전쟁 중인 두 나라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의 문제가 되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대립은 1991년 소련의 붕괴 이후부터다. 러시아는 자국으로부터 분리된 국가들과의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냈고 이 중 우크라이나는 독립과 주권 보장 정책이 가장 많았고 유럽연합(EU)과 러시아 간의 중립 외교를 택하였으나, 2014년 우크라이나의 친러 성향의 대통령과 지지자들을 축출한 사건 이후 두 나라의 관계는 매우 적대적이었다. 마침 러시아 서쪽에 위치한 나라들이 하나둘씩 유럽연합과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에 참여하였고 우크라이나 역시 그러한 움직임을 보였다. 러시아는 잠재적으로 적대적인 국가들이 러시아를 둘러싸고 있다고 판단, 2021년부터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국경에 군사력을 증강했고, 2022년 결국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였다. 어떤 이들은 더 강력한 전쟁 무기를 보유하지 못한 우크라이나의 약한 군사력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강력한 무기로 인해 적의 도발을 억제할 수 있고, 그러한 견제로 인해 어느 정도 국제사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제와 긴장의 끈이 끊어지면 돌이킬 수 없는 전쟁 상황에 빠지기 쉽다. 무기의 목적이 오로지 방위력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교황은 과거 일본 방문 때도 핵무기의 사용과 보유를 전적으로 반대하며 진정으로 정의롭고 안전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전쟁 무기를 내려놓아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였다. 그리고 교황은 미사일로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북한의 행보와 북한 핵무기에 대한 우려로, 북한 방문 실현을 타진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해서도 교황은 “슬프게도 일부 강력한 통치자가 민족주의적 이익이라는 시대착오적인 생각에 사로잡혀있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주식인 밀을 전쟁 무기처럼 사용하지 마십시오!”라고 호소한다. 어떤 전쟁도 정의로울 수 없고 정당화될 수 없다. 국가 정치 지도자들이 말하는 정당한 명분이란 절대 정의로울 수 없으며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그리고 비참하게도 전쟁의 대가를 치르는 이들은 국가 정치 지도자들이 아니라 전쟁터에서의 군인들, 폭격을 당해 희생된 이들, 아이들, 여성들, 약하고 소외된 이들이다. 김의태 수원가톨릭대학교 교회법 교수

[삶과 종교] 명상으로 보는 성(性)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원인 인도 카주라호의 외벽에는 온갖 성애의 장면들로 장식되어 있다. 그러나 내부에는 성애의 조각은 물론 신성을 상징하는 그 어떤 대상조차 구성되어 있지 않다. 이는 바깥쪽에 표현된 욕망의 모습과 달리 안쪽은 내면의 신성을 찾고 확인하는 장소이며 명상을 위한 공간임을 말하고 있다. 프로이드의 관점에 의하면 표면에서는 모든 감각적인 것들이 성적인 상태에 있다고 하겠으나 명상이나 내면 수련의 체계에서는 이와 달리 자신의 중심에는 평화와 고요 그리고 초의식이 자리 잡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이 사원은 성을 완전히 이해하고 또한 상대에 대한 존경과 이해가 바탕 된 사랑의 한 표현이었을 때 우리는 수평 이동이 아니라 수직 상승을 이루고 자신과 상대의 신성을 대면할 수 있음을 카주라호의 외부 장식이 보여주고자 하는 메시지이다.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나와 타자를 향한 근본에너지의 흐름은 끊임없이 우리의 삶을 파괴하게 될 것이다. 성은 자연이 마련해준 문이다. 따라서 동물도 이를 가진다. 새도 이를 가지고, 식물도 이를 가지며 인간도 역시 이를 가진다. 그러나 인간은 이 자연 에너지에서 진화를 이루었고 신성을 알고 있다. 그래서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극단적인 기준으로 제시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성의 가치를 생물학적 욕구의 자연적 차원에만 머물러 있다면 인간은 동물 이상이 아니며 동물을 넘어설 수 없다. 언급하였듯이 동물에게도 그 문은 열려있기 때문이다. 이 자연의 에너지를 살펴서 새로운 문을 발견할 때에 비로소 인간다움이라는 격이 나타날 것이다. 그때까지는 우리의 중심이 동물의 중심과 다르지 않을 것이며 겉보기에만 인간이다. 우리 안의 동물이 기회가 생기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여기에 대한 깊은 성찰이 부재한 채로 이루어지는 사회적 장치들이 얼마나 소용없는 것이었는지는 이미 충분히 보아왔다. 전자발찌로 그를 구속하고 통제할 수는 있어도 문제에서 해방시켜 주지는 못한다. 또한 정치적으로도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정치가 특정 입장에 전도되어 이를 이용한다면 결과는 더욱 나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한 화가가 양치기 소년의 순수한 눈 속에서 신성을 발견하고 그 초상화를 그렸고, 이후 그는 인간의 모습을 한 악마를 그리기 위해서 모델을 찾아 다시 그 모습을 그렸으나 결국 동일인이었음을 알게 된 우화를 우리는 알고 있다. 석탄과 다이아몬드는 동일한 화학적 구조로 구성되어 있듯이 사람 마다의 삶에는 신과 악마라는 두 가지 측면이 있으며 두 개의 초상화를 그릴 수가 있다. 그러나 인간은 신성의 반영으로 삶을 지고한 낙처(樂處)로 만들 수 있으며, 그 삶을 향기롭고 조화 있는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선, 위빠사나, 명상, 기도 등으로 불리는 내면의 성찰을 통해서. 최성규 철학박사·한국미술연구협회 이사장

[삶과 종교] 홍익인간·티쿤올람 대한민국에 접목되길

전 세계의 국가 수를 UN의 회원국으로 보면 195개국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아직 승인되지 않은 미승인 국가까지 다 합치면 208개의 나라들이 주권, 영토, 국민을 가진 나라로 분류되고 있다. 우리나라 외교부의 자료에 따르면 228개의 나라가 지구촌 안에 존재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대륙과 인종적인 분류로 나라들을 살펴보면 그 나라들이 가지고 있는 비슷한 역사와 풍습을 가진 나라들을 보게 된다. 대한민국은 어느 나라와 비슷한 사상과 풍습과 국민성을 가지고 있을까? 에 대해 생각해 보면 필자는 이스라엘 이라는 나라를 제일 먼저 선택하고 싶다. 현대에 들어와 전쟁을 통해 나라를 건국한 년도가 똑 같고 주변의 강대국들에게 둘러싸인 지리적 상황과 역사도 비슷함이 많이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단군의 건국이념을 따라 나라의 출발이 ‘弘益人間(홍익인간)’으로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는 국가의 이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서로 다툼이 아니라 함께 어울려 이 땅에서의 국가의 존재 목적과 사람에 대한 바른 태도와 존중을 가르치신 귀한 뜻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 홍익인간과 같은 아주 중요한 사상이 있는데 그 것은 ‘티쿤올람(Tikkun Olam)’사상이다. ‘티쿤’은 ‘세상’을 말하고, ‘올람’은 ‘고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유대인들의 이해방식대로 말하자면 “한 개인이 하나님께 창조가 되어 그가 살아가야 하는 세상으로 들어가서 그 개인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세상을 사람들이 살기에 더 좋은 곳으로 만들어감으로 하나님의 인간 창조 목적을 완성해 가야 한다”는 뜻이 된다. 이 정신으로 유대인들은 1900년간 나라가 없이 흩어진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았지만 그들은 이 언약의 정신을 더욱 굳세게 지켜왔고 이스라엘 민족끼리는 서로 돕고 그리고 인류를 향해서는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기업들을 많이 세우게 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작은 나라일지라도 위대한 영향력을 전 세계에 끼치고 있는 것이다. 오늘 자신이 살고 있는 그 자리에서 자신이 맡은 일을 해 나갈 때 스스로 상대방과 세상을 이롭게 하는 삶의 태도가 지금 우리나라 대한민국에 절실히 필요한 태도가 아니겠는가! 새 정부가 열렸고, 지역을 이끌 수장도 임기 출발을 앞두고 있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의 건국이념도 모르는 듯 사람들을 갈라치기 하는 정치 지도자들의 낮은 수준의 언사를 볼 때면 대단히 큰 실망감과 불신감이 생겨나는 마음을 지울 수가 없다. 현실적 사실을 인정하고 자신들이 그 자리에 있는 이유와 목적을 분명히 알고 국민들을 돕고 섬기는 협력을 통하여 이 나라는 더 좋은 미래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이제 전 세계의 지도자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더 강력한 리더 국가가 될 것이다. ‘티쿤올람’을 가르치는 성경은 사람을 섬기며 낮아지는 겸손을 가진 자들을 하나님께서 높이신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나라가 유대인들과 같이 이 위대한 역설의 ‘홍익인간’ 사상과 ‘티쿤올람’ 사상을 정치와 경제와 사회 속에서 실천한다면 우리나라의 미래는 참으로 아름다울 것이다. 서로를 존중하고 자신의 의견을 겸손히 나누어 대화할 수 있다면 전 세계에 한류열풍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문화가 세상에 사람들이 살만한 아름다운 대안을 제시하는 나라가 되지 않겠는가? 전 세계를 향해 뻗어나가는 강력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 모든 지도자들은 자신의 이기적인 이익을 위함이 아닌 서로 나누며 서로 인정하고 함께 나아가는 그런 마음으로 나아가길 두 손 모아 기대해 본다. 조상훈 만방샘 목장교회 목사

[삶과 종교] 나라 사랑하는 마음 새기는 6월

‘호국의 달’인 6월이 되면 마음이 아프다. 1950년 6월25일, 북한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군인과 민간인이 숨지거나 다쳤기 때문이다. 꽃다운 나이의 젊은이들이 속절없이 세상을 떠났고, 그 가족들은 피눈물을 흘린 민족의 대비극이었다. 나의 은사인 초안 큰스님도 한국전쟁에 참전해 입은 부상 후유증으로 평생 돌아가실 때까지 병고에 시달렸다. 상이용사이면서도 위의(威儀)를 잃지 않고 여여한 모습을 보여주셨지만 육체적 고통을 피하기는 힘들었다. 그래도 “나라를 지키다 다친 것이니, 후회는 하지 않는다”면서 “다시는 이 땅에 전쟁같은 비참한 일이 있어선 안된다”고 힘주어 강조하시던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다. 나라를 지키는 과정에서 목숨을 잃고 부상당한 분들의 뜻을 기리는 것은 우리들의 당연한 도리다. 그분들이 없었다면 어찌 우리가 지금의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겠는가? 한국전쟁 당시 초개와 같이 육신을 던진 용사(勇士)들과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나선 지사(志士)들의 숭고한 정신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앞서 밝힌 대로 나의 스승 초안 큰스님은 한국전쟁 참전용사다. 북한 강원도 평강군 남면 천마리에서 태어나 출가했지만,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38선을 넘어 혈혈단신 남쪽으로 넘어왔다. 세간(世間)에 초연해야 하는 스님의 신분이었지만 “나라 없는 종교는 있을 수 없다”는 소신으로 국군에 입대해 병역을 마쳤다. 그런데 전역 직후인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또 다시 자진 입대했고, 전투를 치르면서 부상을 입어 평생 불편한 몸으로 지내야 했다. 초안 큰스님의 이러한 뜻은 동암 대종사에게 받은 영향이 컸다. 동암 대종사는 초안 큰스님의 스승으로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명 가운데 한분이었던 백용성(白龍城) 조사의 제자다. 동암 대종사는 출가도량인 남양주 봉선사 운허대종사를 비롯해 여러 스님들과 함께 나라를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45년 해방 후 상해임시정부가 환국 할 때 김구 주석을 비롯한 요인들을 환영하기 위해 구성된 ‘임시정부 환국봉영회’의 대표(회장)를 맡기도 했다. 1945년 12월12일 서울 대각사에서 임시정부 환영행사가 열렸는데, 김구 주석을 비롯한 요인들과 동암 대종사가 함께 촬영한 빛바랜 사진이 지금도 전한다. 초안 큰스님께 들은 일화가 떠오른다. 동암 대종사가 양양 낙산사 주지로 있던 1960년대 중반, 정부에서 독립유공자로 포상하겠다는 연락이 왔지만 정중하게 사양했다는 것이다. 동암 대종사는 “나라를 위해 당연히 할 일이었고, 어떤 대가를 바라고 한 것이 아니다. 출가자로 포상을 받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했다. 여전히 남북이 대치돼 있고, 주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처한 상황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한 동암 대종사와 두 번이나 군대에 가서 부상당한 은사스님 같은 분들의 나라 사랑 정신을 떠 올릴 때면 숙연해진다. 한국전쟁으로 사실상 폐사(廢寺) 위기에 처한 오봉산 석굴암도 이러한 동암 대종사와 은사스님의 마음이 깃든 도량이다. 후대(後代)에 문화유산으로 물려줄 수 있는 도량으로 장엄하는 것이 선대(先代)의 뜻을 잘 받드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라를 위해 싸우다 희생된 호국영령과 무고하게 희생된 민간인 영가들의 극락왕생을 발원하며 하루 속히 남북통일이 되기를 부처님 전에 기도한다. 오봉도일 스님 25교구 봉선사 부주지·양주 석굴암 주지

[삶과 종교] 기적?! 진짜야?

기적이란 일반적으로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 또는 자연법칙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초자연적 현상을 말한다. 그러나 가톨릭은 기적을 단지 초자연적 현상으로만 여기지 않는다. 성경에 등장하는 기적들도 각각의 메시지를 지니며,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하는 일명 성변화(聖變化)는 단지 기적이 아닌 가톨릭 신앙의 핵심이다. 또한 가톨릭 성인(聖人)을 통해 발생하는 기적들도 면밀한 심사를 거친다. 즉 오늘날에도 기적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뜻이다. 기적, 진짜일까? 사실 가톨릭 신앙과 관련된 초자연적 현상들은 끊임없이 일어났고 과학적 검증을 시도한 사례들도 많았다. 대표적으로 빵과 포도주가 실제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하는 기적들이다. 750년 이탈리아 동쪽 란치아노에서 한 신부가 미사(빵과 포도주의 변화가 이루어지는 가톨릭 예식)를 거행하던 중 축성된 빵 안에 예수님의 몸이 있는지 의심하였고 실제로 빵이 살로, 포도주가 피로 변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1천200년이 지나 1970년 해부학, 조직학, 화학 임상 현미경 관찰 교수인 에도아르도 리놀리(Edoardo Linoli) 박사는 다음과 같은 세부 보고서를 제출했다. 1. ‘살’은 심장의 횡문근 조직으로 이뤄진 실제 살이다. 2. ‘피’는 실제 피다. 크로마토그래피 분석은 절대적이고 논란의 여지가 없는 확실성으로 그 사실을 증명한다. 3. 면역학 연구는 살과 피가 확실히 인간과 같은 것임을 나타내고, 면역 혈액학 실험은, 살과 피가 모두 토리노 수의(Sindone: ‘예수님의 수의’라 칭하는 천)의 남자와 같은 혈액형이며 중동 사람의 특징인 AB 혈액형에 속한다는 것을 완전한 객관성과 확실성을 근거로 단언할 수 있다. 4. 이 혈액에 포함된 단백질은 정상적으로 선혈의 혈청 단백질 체계와 동일한 백분율로 분해된다. 5. 어떠한 조직학 분야에서도 미라를 만들려는 목적으로 고대에서 사용된 방부제나 소금의 침투 흔적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후 세계보건기구에서는 검증을 위한 수많은 실험이 이뤄졌고 리놀리 교수가 수행한 것과 같은 결론을 내리며 그 살 조각에 대해 ‘생명체의 고유한 모든 임상적 반응에 빠르게 대응하므로 살아 있는 구조’라고 선언했다. 기적은 분명 우리를 놀랍게 하며 믿음으로 인도한다. 그러나 그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해 과학적 검증과 식별, 면밀한 조사는 필요하다. 실제로 치유의 기적이 현재 진행형인 프랑스 루르드에서는 7천여 건의 기적 치유 사례가 보고됐지만, 현재 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기적은 총 67건뿐이다. 그 이유는 기적이 주는 영향력 때문이다. 기적으로 인해 신이 아닌 그 현상 자체만을 맹신하기도 하며, 그 현상이 종교적 목적이 아닌 개인의 이익이나 다른 목적으로 이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충분한 검증은 신께 대한 온전한 믿음을 성장시키고, 사람들이 세상 속에서 더욱 충실한 삶을 살도록 이끈다. 기적은 결코 인간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한 여과 없는 맹신은 위험한 종교심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김의태 수원가톨릭대학교 교회법 교수

[삶과 종교] 밝음의 법칙

붓다가 거듭 되풀이해 강조한 법칙이 하나 있다. 그 법칙은 어둠은 어둠을 물리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동일하게 적용되는 경우가 증오로는 증오를 없앨 수 없다는 가르침이다. 증오는 오직 사랑만으로 물리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법칙이다. 다시 말해 오직 빛으로만 어둠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보면, 사랑이 우리 존재의 빛이며 증오는 존재의 어둠이다. 만약 어떠한 이유가 됐던 내 안에 어둠이 가득하다면 나의 주변은 증오로 덮힐 것이고, 내 안에 빛이 가득하다면 마찬가지로 내 주변은 그 빛으로 환히 비추게 될 것이다. 그래서 붓다는 수행자들에게 전 존재를 걸고서라도 사랑을 뿜어내고 빛을 발산해야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초기 경전에는 그의 제자들이 그 가르침을 실천한 사례가 무수히 등장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붓다가 강조한 영원의 법칙 가운데 하나다. 여기에 의하면 사랑만이 증오를 쫓아내며 빛만이 어둠을 이긴다는 것이다. 붓다의 교설에서, 어둠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부정적 상태일 뿐이라서 그 자체적으로는 긍정적 실존이 없다. 따라서 어둠 역시도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어둠을 물리칠 수 있단 말인가? 어둠을 상대하려면 빛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빛이 들어오면 어둠은 저절로 물러가고, 반대로 빛이 물러나면 어둠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화석화된 도덕적 관념으로 “어둠과 싸워라. 미움과 분노와 성욕과도 싸워라. 이것과 싸워라. 저것과 싸워라”고 가르치지만, 증오도 어둠이고, 성욕도 어둠이고, 시기심도 어둠이고, 탐욕과 분노도 어둠이다. 그래서 빛을 끌어들이라고 강조한다. 빛을 끌어들이는 방법은 명상을 통해 고요히 하고 사념을 비우고, 의식적이 되고, 경계하고, 자각하고, 깨어 있음이 빛을 끌어들이는 방법이라고 설한다. 성성하게 자각하고 원인과 결과에 대한 상관관계를 살피면서 깨어 있는 그 순간에는 미움이나 부정적인 관념들은 스며들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각성 상태에서는 이미 타자를 미워한다는 상태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붓다는 이를 말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적으로 체험을 하도록 정진하라고 한다. 그래야 존재적 차원에서 나와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되고 타자를 미워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무의식적 상태에서는 행위의 결과를 전가시키고 자신을 합리화 시키면서 누군가를 미워할 수 있겠지만, 누구라도 의식적이 되다면 증오는 사라진다. 그 둘은 공존할 수 없다. 빛과 어둠이 서로 공존할 수 없듯이. 어둠이란 빛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체득하는 것을 붓다는 지혜라고 했다. 스스로 경험하지 못한 것을 반복하지 말고, 외부에서 빌려오는 정보 즉, 지식은 피할 때 내 안에서 피어나오는 스스로의 빛인 지혜를 키울 수 있다는 것이다. 최성규 철학박사·한국미술연구협회 이사장

[삶과 종교] 가정에서 시작되는 질서가 있는 나라를 기대한다

지난 대선에서는 유독 대선 주자들의 부인 이야기가 많이 회자됐다. 그 과정을 지켜본 많은 국민은 질서 있는 가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인식하게 됐다. 가정은 모든 사회활동의 시작이며 끝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세계 어느 나라든지 자손들에게 남기고 싶은 좋은 이야기들이 구전을 통해 전해온다. 옛날에 한 어부가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갔다. 남편은 작은 배를 타고 어업을 하는데 갑자기 날씨가 험해지고 태풍이 몰아쳐 방향을 잃어버리고 배가 표류하게 됐다. 육지 근해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았지만 사방은 칠흑 같은 어둠과 사나운 풍랑으로 갇혀 있었다. 남편인 어부는 바다에서 방향을 잃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두려움에 빠져있었다. 어부의 아내는 바다의 풍랑의 매서움을 보면서 노심초사 남편을 기다렸다. 남편을 걱정하며 아내가 밖으로 나간 사이에 홀로 집에 남겨진 어린 아이가 울다가 등불을 넘어뜨려 화재가 발생했다. 모든 것을 잃어 버렸다고 생각한 아내는 서럽게 울었다. 바다에 나간 남편은 돌아오지 않고 집은 불에 타 버린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남편이 새벽녘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어부는 살아서 돌아온 것에 감격하며 말했다. “어젯밤 풍랑 속에서 방향을 잡지 못해 죽게 됐을 때 갑자기 불빛을 보았다. 그 불빛이 육지 쪽 이라는 것을 알고 겨우 방향을 잡아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방향성은 곧 정체성이다. 나라의 정책이 방향성을 잃는 다는 것은 곧 그들의 정체성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아내의 남편을 향한 간절함이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되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이 간절함을 가지고 기도하고 자손들을 걱정하며 애태우는 집단은 바로 연로한 어르신들이다. 오늘날의 가정 속에 물질적인 우상이 많이 자리를 잡고 있다. 가족을 계획살해하고 보험금을 타는 소식부터 가족이라는 존재가 모두의 이기적인 집단으로 변질돼 가고 있다. 경제적으로 가난한 가정은 가정이 아니라 무거운 장애물로 생각하는 사회의 모습들 속에서 우리는 미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가족이란 어려움을 당할 때도 함께 서로 사랑하며 인내하며 그 상황을 이겨나가는 승리감을 누려봐야 한다. 부모님의 존재가 물질적 이유로 평가되지 않고 사랑과 헌신으로 바라보는 사회가 돼야 할 것이다. 노인들의 복지와 그리고 생애의 후반을 가장 존귀하고 소중하게 여겨지는 사회가 될 때 그 사회는 진정한 안정감과 질서와 중심이 있는 사회가 될 것이다. 구약성경에는 십계명이 있다. 그 십계명은 오늘날까지 이스라엘의 유대교와 기독교의 모든 교회들이 절대적으로 중요시 여기는 계명이다. 그 계명에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하고 그 분만을 믿으며 동시에 육신의 부모를 향해서도 분명한 명령이 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한 사회가 중심이 있고 안정된 나라가 되기 위해서 분명히 이 계명이 존중받고 지켜지는 사회가 돼야 한다. 그때에 젊은이들에게도 삶의 질서와 그리고 미래의 시대까지 바라보며 자신들의 삶을 단거리가 아닌 장기적인 차원으로 바라 볼 수 있다. 아이들에게 할아버지 할머니의 소중함을 가르치며 돌아보는 어른공경의 정신이 다시 한 번 새로운 대통령과 새 일꾼들을 비롯해 이 나라 지도자들에게 기대해 보고 싶다. 조상훈 만방샘 목장교회 목사

[삶과 종교] 함께 걷는 여정, 시노달리타스(synodalitas)

코로나 국면에서 천주교가 중앙집권적 시스템을 갖추었기에 예방과 방역에 있어 체계적으로 대응했다는 평가가 많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중앙집권체제를 갖춘 천주교에 대해 환멸을 느끼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과거 성직자들의 주도하에 교회를 보호하고 교회 조직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흐름은 고착된 배타적 성직자 중심주의를 양산하게 되었다. 5년마다 새로 부임하는 신부님의 스타일에 따라 기존 성당 공동체의 관행이 무시되기도 하였다. 급기야 신부님과 맞지 않으면 성당을 떠나거나 등지는 신자들도 많았다. 매년 실시하는 설문에서도 ‘성직 중심적 교회 운영’이라는 문제는 항상 등장하지만, 그렇다고 운영체제를 쉽게 바꾸지 못하는 것도 현실이다. 큰 고민이다. 성직자 중심주의로 인해 성당 구성원들 간에도 ‘위계적이며 일방적이고 수직적인 소통’이 익숙하다. 신부님에게 질문하고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무례한 처사라 여긴다. 수평적이고 쌍방향적인 대화와 문화를 요구하는 현대사회의 흐름과 역행하고 있다는 위기감 때문인지 몰라도 프란치스코 교황은 거듭 교회 쇄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바로 교황에서부터 평신도들에 이르기까지 신 앞에 모두 동등한 존재들이며 교회는 그저 신앙을 위해 모두가 함께 걸어가는 여정, 바로 교황은 시노달리타스(synodalitas)의 실현을 강조한다. 이는 교회의 봉사자인 성직자가 신자들보다 높을 수 없고, 오히려 그들을 섬기고,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상호 경청을 통해 서로가 서로에게 배우고, 신자든 비신자든 모두 함께 걸어가는 개방된 여정을 희망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교황은 최근 ‘복음을 선포하여라(praedicate evangelium)’라는 교황령을 발표하며 ‘교황청 구조 개혁’에 박차를 가한다. 눈에 띄는 변화로 ‘반드시 추기경과 대주교가 성(Congregation)과 평의회(Council)의 장관과 의장을 맡는다’는 원칙에서 벗어나, 모든 성과 평의회의 구분을 없애고 모두 부서(Dicastery)로 통합하여 ‘신자라면 누구나 한 부서의 장을 맡을 수 있다’는 규정을 내놓는다. 성직자들의 철옹성과도 같았던 교황청의 책임자들이 이제 성직자들이 아닌 남녀 평신도들도 가능해진 것이다. 엄청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교황청의 권력 분산, 즉 탈중앙집권화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교회 개혁 의제 가운데서 핵심 중의 핵심이다. 물론 개혁이란 많은 시련과 고통이 따르는 법이다. 교황은 재임한 때부터 많은 찬사와 지지를 받았지만, 반대로 변화를 거부하는 세력들의 반대에 부딪혀 왔다. 한국천주교회 역시 교황의 개혁 의지와 다르게 눈에 띄는 변화를 찾아보기 어렵고, 커다란 논란도 야기되지 않고 있지만, 교황의 개혁 의지는 계속되고 있고, 조금씩 신자들의 입에서 ‘시노드’라는 말이 자주 사용되고 있다. 분명 교회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세상을 위해 그리고 신앙을 위해 교회가 해야 할 본분일 것이다. 김의태 수원가톨릭대학교 교회법 교수

[삶과 종교] ‘부처님 오신 날’을 맞으며

며칠 뒤인 5월8일, 부처님 오신 날이다. 부처는 네팔 눔비니 동산에서 고타마싯타르타 왕자로 태어났다. 음력 4월8일인 날이 불교인에게는 가장 큰 명절이다. 부처님 오신 날을 말할 때는 ‘4월 초파일’이라고도 한다. 한동안 석가탄신일(釋迦誕辰日)이라 불렸는데, 이것은 1975년 정부에서 대통령령에 의해 공휴일로 지정할 당시의 명칭에서 비롯된 것이다. ‘석가가 태어나신 날’이란 의미인데, 석가는 인도의 샤카라는 종족의 이름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불교계에서 한글로 된 명칭 변경을 요구해 왔으며, 그 결과 2017년 10월10일 국무회의에서 공휴일 규정의 석가탄신일 명칭을 부처님 오신 날로 공식적으로 바꿨다. 그리하여 2018년부터는 부처님 오신 날이 공식 명칭이 됐다. 예로부터 관등(觀燈) 또는 연등(燃燈)놀이라 불린 부처님 오신 날은 다양한 민속행사가 펼쳐져 민족의 고유한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숭유억불의 조선시대에도 사찰이나 거리에 등불을 환하게 밝혔는데, 연등은 물론 각양각색의 등을 만들고, 등대(燈臺)를 세워 깃발과 등으로 장식해 부처님 탄생을 축하했다. 또한 한 해 농사를 시작하는 시기이기에 풍년이 들기를 국가와 백성들이 염원하며 기원하기도 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경문왕 6년(866) 정월 15일과 진성여왕 4년(890) 정월 보름에 서라벌(경주) 황룡사에서 연등(燃燈)을 봤다는 기록이 전해질 만큼 등불을 밝힌 전통은 오래됐다. 법흥왕 14년(527)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로 불교가 공인 됐으니, 부처님 오신 날을 축하하는 역사는 1천600년이나 됐다. 고려시대는 연등회(燃燈會), 조선시대는 호기(呼旗)놀이, 관등(觀燈)놀이로도 불리며 선조들과 함께했다. 우리나라 부처님 오신 날이 지금은 세계인의 축제로 주목받을 만큼 성장했다. 연등회 제등행렬이 열릴 때면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의 참여가 눈에 띄게 증가해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축제가 됐다.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연등회(燃燈會)는 2020년 12월16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돼 세계인이 와서 함께 연등회 문화축제 제등 행렬을 전국에서 해마다 봉행한다. 지난 주말 서울, 수원, 부산, 광주 등 전국 각지에서는 불교인과 시민이 형형색색의 연등과 장엄물을 앞세우고 시내를 행진하며 부처님 오신 날을 함께 기뻐했다. 이즈음 등불을 밝히는 이유는 번뇌와 무명(無明)으로 고통받는 중생에게 지혜를 전달해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해서다. 올해 부처님 오신 날인 5월8일은 어버이날이기도 하다. 불교에서는 누구나 부처님이 될 수 있는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다고 하니 어머니와 아버지도 부처님으로 공경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코로나19 확산세가 진정되면서 야외에서는 마스크를 벗는 등 일상으로 돌아가는 시점에 맞이한 부처님 오신 날, 가족과 함께 가까운 사찰을 찾아 그동안 지친 신심(身心)을 쉬는 시간으로 삼았으면 한다. 경기도에도 봉선사와 용주사, 가까이는 조계사, 봉은사 등을 비롯한 좋은 사찰이 많으니, 불교인들은 신앙생활의 하나로, 다른 종교인들은 민족의 고유한 풍습을 체험하는 기회로 여기고 방문하면 좋겠다. 사계절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녹음(綠陰)을 자랑하는 5월의 초입에서 만나는 부처님 오신 날과 어버이날에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마음에 치유와 힐링을 통해 새로운 희망의 꿈을 이뤄가길 기대한다. 오봉도일 스님 25교구 봉선사 부주지·양주 석굴암 주지

[삶과 종교] 본래면목

선사(禪師) 약산을 3년 동안 주방장 소임으로 시봉했던 한 승려가 있었다. 약산은 당대의 대선지식인 석두희천의 법을 이은 선사다. 한번은 약산이 그에게 물었다. “이곳에 머무른 지 얼마나 되었는고?” 그 승려가 답했다. “3년입니다.” 이에 약산이 “나는 전혀 그대의 얼굴을 모르겠군.” 그 승려는 약산의 질문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그 절을 유감없이 떠났다. 선의 세계에서 언어는 완전히 다른 뉘앙스로 사용된다. 여기에서도 약산의 질문은, 단지 ‘여기’라는 공간에 접한 적이 있는지 또는 ‘여기’에 존재하는 법을 배웠는지를 묻는 것이었다. 스승이 무언가를 질문할 때의 언어는 범상한 것이 아니므로 주의 깊게 들어서 어디를 강조하는지를 간파해야 한다. 스승은 자비의 마음으로 한 번 더 기회를 제공해 다시 “나는 그대의 얼굴을 전혀 모른다”고 했다. 즉 “그대 자신의 본래면목을 발견했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본래면목은 영원 전부터 갖고 있던 얼굴이며 영원토록 가질 얼굴이다. 그러나 그 승려는 스승의 사랑과 질문의 의미도 알지 못했으므로 오히려 유감스러웠다. “나는 3년 동안 그 분을 위해 음식을 마련했는데, 내 얼굴을 본 적이 없다”고 말씀하시니 어찌 된 것인가. 그는 모욕적으로 생각하고 그 절을 떠났다. 그는 스승을 만났지만, 중심을 놓쳐버렸다. 3년은 중심으로 들어가기에 충분한 시간이라고 생각해 스승은 그동안 제자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승려는 3년 동안 스승과 함께 있었고, 그곳에서 요리를 했고, 스승의 법문을 들었다. 이제 스승이 질문할 때가 이르렀다. “이곳에 머무른 지 얼마나 되었는고?” 그는 ‘얼마나’라는 말은 이해했지만 이곳, 즉 ‘여기’라는 말은 놓쳤다. 스승은 ‘얼마나’에 강조를 둔 것이 아니라 ‘여기’에 강조를 두었다. 스승은 제자에게 애정어린 자비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가능한 많은 기회를 주었다. “나는 그대의 얼굴을 전혀 모른다네.” 이 말은 3년 동안 여기 있었다고 말하지만, 어디에 그대의 얼굴이 있는가? 스승은 계속 그대의 본래면목을 말하고 있다. 거울에 비치는 얼굴이 아니라 하나의 불꽃이 하나의 불꽃으로 온전히 전해지듯 스승의 가슴에 비치는 얼굴을, 스승은 몇 년 동안 여기에 있었는지에 대해 관심이 없다. 햇수를 세서 무엇을 할 것인가? 분명 스승의 그 질문은 이 순간을 묻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선사들은 삶의 매 순간 깨어 있음을 강조해 경책하는 것이다. 최성규 철학박사·한국미술연구협회 이사장

[삶과 종교] 위기를 기회로 잡는 대한민국을 기대하며

필자는 오래 전 원하던 대학에 입학을 못해 힘들어 했던 경험이 있다. 그때 아버지는 어깨를 토닥이며 “인생을 살다 보면 중요한 기회는 적어도 세 번은 온다”고 말씀하셨다. 이탈리아를 방문하게 됐을 때 지인의 권유로 토리노박물관을 간 적이 있다. 그 곳에서 참 많은 보물들을 만났지만 ‘기회의 신 카이로스’ 라는 조각상에 제일 깊은 영감을 얻었다. 제우스신의 아들 카이로스는 앞머리가 무성하다. 그런데 뒷머리는 머리카락이 없다. 그리고 어깨와 발뒤꿈치에는 크기가 다른 날개가 달려있었다. 손에는 저울이 들려있다. 설명을 들으니 “내 앞머리가 무성한 이유는 누구든지 쉽게 나를 붙잡을 수 있게 함이고 뒷머리가 대머리인 이유는 내가 지나가면 붙잡을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며, 어깨와 발뒤꿈치에 날개가 달린 이유는 최대한 빨리 사라지기 위함이고 저울은 분별하기 위함이며 칼같이 빨리 결단하게 하기 위함이다”라는 것이다. 한번 지나가면 다시는 잡을 수 없는 것 그것을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기회’라고 보았다. 그러나 인생에는 기회만 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위험한 고난도 온다. 그러므로 위기(危機)라는 말은 위험(危險)과 기회(機會)의 합성어가 된다. 위험과 기회는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로 시작된 소상인들의 도산과 사회망의 붕괴, 그리고 정치판을 휩쓸고 지나간 대선 후유증과 국제정세로 요동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들은 위험한 상황이지만 기회의 시간이기도 하다. 구약성경 속에 다윗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빠른 출세를 했고 왕의 사위가 됐다. 그러나 장인이었던 사울 왕이 다윗 자신을 죽이기 위해 병사들을 모아 쫓아다니자 원수의 땅 블레셋의 나라까지 치욕스러운 망명을 하게 됐다. 하지만 그 나라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다윗은 머리에 재를 뿌리고 침을 흘리며 목숨을 부지하고 아둘람 골짜기로 몸을 피한다.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다윗은 동굴속에서 진정한 기회를 배운다. 진정한 성공은 돈과 명예와 권력이 아니라 자신이 지금 누구와 함께 하고 있느냐에 결정된다는 것이다. 다윗에게 다가온 기회는 결국 다윗 자신이 믿는 절대자 하나님이 함께 하심에 있었다. 며칠 후면 작은 여당의 대통령과 거대 야당국회의 힘겨루기 속에서 우리는 희망의 기회를 찾을 수 없다. 우리나라의 기회는 지도자들이 한 사람의 국민을 소중히 여기는 애민(愛民) 정신이 살아날 때 얻게 될 것이다. 국민들을 기회의 주체로 존중하고 바라보며 여·야가 진심으로 협치하는 곳에서 대한민국은 다시 한 번 세계 속에 우뚝 도약할 기회를 잡게 될 것이다. 조상훈 만방샘 목장교회 목사

[삶과 종교] 맨유 출신 신부님과 함께 축구를

2017년 당시 과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뛰던 프로축구선수가 아일랜드 신부가 된 일이 가톨릭 내에서 큰 화제가 됐다. 그는 현재 한국을 대표하는 축구선수인 손흥민 선수가 뛰고 있는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EPL)에 출전한 일명 잘나가는 프로축구선수였다. 그의 동료들은 축구를 좋아하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데이비드 베컴, 폴 스콜스, 라이언 긱스 등이다. 그의 이름은 ‘필립 멀린’이었다. 사실 로마 유학 시절 그와 함께 같은 기숙사에서 함께 생활하며 영광스럽게 축구도 함께 즐길 수 있었다. 물론 박지성, 손흥민 선수가 뛴 프리미어 선수의 실력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가 선보인 노룩 패스, 골대 구석을 찌르는 송곳 슈팅은 정말 일품이었다. 2013년쯤 로마에 있는 50여 개 기숙사 풋살 대항전이 있었다. 당시 그와 함께 출전하며 스페인, 독일을 비롯한 여러 기숙사들과 맞붙어 당당히 동메달을 땄던 기쁨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 친구는 1990년대 당시 대략 연봉 9억원을 받는 잘나가는 선수였다. 물론 잦은 부상으로 축구선수 생활을 빨리 접어야 했지만 그래도 큰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런데 어떤 계기인지 그는 아일랜드 신학교에 입학했고, 신학 수업을 듣기 위해 로마까지 유학을 오게 됐다. 과거 많은 돈을 벌었던 그는 세상의 부귀영화를 모두 포기하고 사제수업을 듣기 위한 여정을 시작했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일 수 있다. 그와 함께 지내며 소중했던 에피소드 하나가 있다. 로마 유학 시절 그는 기숙사에서 마련해준 당시 2만~3만원 정도 되는 깡통(?) 핸드폰을 들고 다녔다. 언젠가 그 핸드폰을 잃어버렸을 때 그 친구는 너무나 당황했고, 허둥지둥 로마 시내를 돌아다니며 그 폰을 찾아 헤매었다. 집시뿐만 아니라 도둑까지 득실거리는 로마 시내에 잃어버린 물건을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다. 그때 나는 느꼈다. 수많은 돈을 벌던 과거의 ‘필립 멀린’이 아니라 자기 곁에 있는 싸구려 물건도 너무나 소중하게 여기는 ‘필립 멀린’을 만날 수 있었다. 그의 마음에는 어느새 세상의 것보다 오히려 더 가치 있는 것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다시 재속 사제(교구 신부)의 길보다 수도 사제(수도 신부)의 길을 선택한다. 자기 명의로 된 통장 하나를 만들 수 없는 수도회의 삶을 택한다. 몇 년이 지나고 기사를 통해 그의 사제 서품 소식을 들었고, 수도회 대주교는 서품식 강론에서 “멀린 신부는 축구선수로 활약하는 동안 골을 넣으려면 얼마나 열심히 뛰어야 하는지 알았을 것”이라며 “이제 그대의 골(목표)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했다. 또 “그대가 믿는 것을 가르치고 가르친 것을 실천하십시오”라고 격려했다. 최고의 리그에서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살았던 그에게 밀알 같은 신앙의 씨앗이 자라나 그 신앙을 증거하는 사람이 됐다. 개인적으로 하느님의 신비는 참으로 오묘하다고 느낀다. 분명 세상의 부귀영화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 있음을 우리가 눈치채게 하는 듯하다. 김의태 수원가톨릭대학교 교회법 교수

[삶과 종교] ‘봄 같은 정책’ 새정부에 바란다

겨우내 기다린 봄이 왔다. 남녘부터 들려오는 꽃소식이 북상을 거듭하더니 어느새 산천을 녹색으로 물들이면서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고지대에 자리한 산사(山寺)는 마을보다는 조금 늦게 꽃 손님이 온다. 그런데 지난달 19일, 입춘(立春)이 지난 지 한 달이 훨씬 넘었는데 석굴암에는 폭설이 쏟아졌다. 봄을 시샘하는 듯 천지를 덮은 눈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았다. 아마 새벽부터 비질을 하지 않았으면 족히 20㎝는 쌓였을 것이다. 도반에게 전화로 눈 소식을 전하니 “서울 근교에서 제일 경치 좋은 절이 오봉산 석굴암인데, 이 봄에 백설(白雪)로 장엄하니 축하 할 일”이라고 부러워했다. 그러나 정작 나의 마음이 편안한 것은 아니었다. 갑자기 쏟아진 눈을 감당하지 못한 소나무들 가지가 휘어지고 딱딱 부러지는 소리 때문이다. 그래도 손길이 닿는 사찰 안에 있는 눈 덮인 소나무들에 빗자루로 눈을 털어주어서 부러지거나 상처를 입지는 않았지만 사람 손길이 닿지 않는 산 중턱의 자리한 나무들은 피해가 컸다. 다선루(茶禪樓) 앞마당에 자리한 수백 년 된 소나무는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기다란 장대로 눈을 털어 위기를 모면했다. 그렇지만 미처 손이 닿지 않은 오봉산 자락의 나무들은 폭설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부처님은 유정(有情)인 사람이나 짐승은 물론 무정(無情)인 나무와 돌도 똑같이 존중해야 한다고 했는데, 눈을 이겨내지 못하고 가지가 꺾이는 모습을 보니 매우 안타깝지 않을 수 없었다. 무심하게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정한 눈’에 마음이 아려왔다. 겨우내 강추위와 매운 바람을 버텨낸 나무들이 봄을 맞아 대지에서 물을 흠뻑 빨아들여 기운을 회복해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자랄 텐데 상처투성이가 됐으니 참담한 생각까지 들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사랑과 관심을 받으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 그러면 난관을 극복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무관심으로 일관한다면 바르게 성장하기 힘들다. 어찌 사람만 그러하겠는가. 강아지나 고양이 등 반려동물은 물론이고, 유정 무정의 모든 존재에게 필요한 것은 관심이다. 관심은 곧 사랑이다. 따뜻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보살피고 보듬는다면 아무리 힘든 일이나 역경도 이겨낼 수 있다. 눈이 녹아 자연으로 돌아간 지난 4월3일은 음력 3월 삼짇날이다. 예로부터 한 해의 풍년을 기원했으며, 요즘 세상에는 풍속이 거의 사라졌지만 사찰에서는 산신(山神)에게 제(祭)를 지내며 모든 이의 평화와 안녕을 기원한다. 우리 절에서는 다선루 전각 앞에 500여년 된 소나무에 세말 정도의 막걸리를 부어 나무의 무병(無病)을 기원하듯이 우리가 사는 세상도 다르지 않다. 타인에 대한 관심과 사랑 배려가 세상을 맑고 향기롭게 하는 기초가 된다. 지난달 9일 5년간 국정을 책임질 대통령이 새로 당선됐다. 산사에서 사는 산승(山僧)으로 거는 기대는 국민의 목소리와 생활에 관심을 갖는 대통령이 되길 바란다는 점이다. 특히 소외된 이들의 현실을 잘 살피고 따뜻하게 보살피는 손길과 정책을 펼친다면 대한민국 발전과 더 좋은 나라가 될 것이다. 오봉도일 스님 25교구 봉선사 부주지·양주 석굴암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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