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가을 펜실베이니아의 베들레헴에 있는 미국 제2의 대형 고로(高爐)철강사인 Bethlehem Steel을 찾은 날은 공교롭게도 그 공장의 고로 불을 끄는 날이었다. 커다란 공룡이 마지막 임종의 단말마를 남기고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이었다. 이런 순간은 미국 제1의 고로 철강메이커인 US Steel에서도 이미 경험한 바였고 나머지 미국의 다른 고로 메이커들도 같은 신세에 놓여 있었다.
베세머(Bessmer)공법으로 철강의 대량생산을 세계 최초로 구현했던 영국의 BS(British Steel)도 Pax 브리태니커 시대의 명멸(明滅)과 맥을 같이 하는 듯 느껴졌다.
1970년대 초부터 일본의 고로 메이커들과 1980년대 들어 한국의 포스코(POSCO)에 경쟁력을 잃은 후 겨우 연명해오던 미국의 고로 메이커들이 90년을 전후해 급부상한 Steel Dynamics 등 미니밀(mini-mill)사들에 밀려 완전히 고사(枯死)당하는 형국이 되었던 것이다.
WSD(World Steel Dynamics)의 맨해턴 본사 사무실에서 만난 철강전문가들과의 대담에서 세계 최고 최강의 철강 메이커로는 어디를 꼽느냐고 묻자 주저 없이 POSCO와 NSC(신일본제철)라고 답하는데서 순간 묘한 자긍심이 느껴졌다. 더욱이 워싱턴 DC에서 만난 한 철강 컨설턴트가 POSCO에 대한 로비를 부탁하는 데서는 더더욱 그랬다.
대만의 남단 항구도시인 카오슝(古雄)에 있는 CSC(China Steel Corporation)를 방문, 한국의 POSCO를 열심히 벤치마킹(benchmarking)하고 있는 그네들의 모습에선 미래의 경쟁력이 보이는 듯 했다.
뉴욕 센트럴파크의 남단근처에 위치한 미국 스틸클럽(Steel Club)에서 가톨릭신부이면서 철강전문가인 호간(Hogan)박사를 만났을 때 그는 미국의 고로 철강메이커 만큼이나 너무 늙어 있는 은퇴교수였다.
그가 초대한 식사자리에서 철강산업의 산업적 특성을 어떻게 보느냐고 질문하자 그는 정치적 산업(political industry)이란 한마디로 답을 던졌다. 의아해 하자 각국마다의 제품믹스(product mix)상 국가간의 교역이 생기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철강산업은 자국의 수요를 전제로 하지 수출에 염두에 두는 산업은 아니라고 부연설명을 했다. 뒤이어 왜 미국의 고로 메이커들이 일본과 한국에 경쟁력을 빼앗겼는가를 묻자 그의 답은 역시 명쾌했다. 미국의 철강노조(鐵鋼勞組)때문이라는 것이다.
일본이 첨단 철강기술인 고로대형화(高爐大型化)기술과 연속주조(continuos casting) 및 소둔(annealing)기술로 덤비고 뒤를 이어 한국의 POSCO도 거기에 합세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신기술채택의 기회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막강한 철강노조와 이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정치집단 때문에 미국의 고로(高爐)산업은 끝장났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철강산업은 결코 사양산업이 아니란 것이 그의 지론이기도 했다.
1860년에 설립된 후 두 번씩이나 세계대전에서 미국의 승리를 가져오는데 크게 기여하면서 지난 140여 년간 미국의 자존심이기도 했던 Bethlehem Steel는 결국 내가 찾은 지 6년 후인 2003년에 ISG(Internat
ional Steel Group)사에 매각되는 운명을 맞았다. 산업주도권(産業主導權)이 왜 바뀌는지를 절감케 하는 대목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이는 본인에겐 산업주도권의 이동현상을 이론적으로 구명해 봐야겠다는 의욕과 자극을 준 계기가 되었다.
/김 인 호 한양대 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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