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백남준, 正祖 그리고 華城

설 연휴 마지막 날 중국에 계신 누님을 만나러 떠나시는 어머님을 배웅하고 인천공항에서 돌아오던 길에 백남준 선생님이 타계하셨다는 뉴스가 리디오로부터 흘러나왔다. 순간 지난 봄 팔달산 벚꽃이 유성처럼 흩날리던 그 어느 날이 떠올랐다.

그날은 유난히 봄 햇살이 따사로웠다. 아마도 반가운 손님이 오려는 것을 하늘이 알았는지 그날의 봄볕은 그야말로 청양(靑陽)이었다. 뉴욕에서 찾아온 그이들은 다름 아닌 백 선생님 곁에서 늘 보좌하는 내외였다. 경기도가 추진하고 있는 백남준미술관 건립 협의를 위해 일시 귀국한 이들은 백남준 선생의 본향인 수원과 세계문화유산 화성을 보고파 했다.

어린시절부터 미술과 관련하여 단 한 번도 상을 받아보지 못했을지라도 백남준이라는 이름은 늘 기억하고 있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전위 예술가! 전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었던 시절에도 백남준은 그저 우리의 우상이었다. 백남준의 예술 세계에 대한 막연한 이야기를 들으며 혜원 신윤복의 ‘월하의 미인’을 떠올렸는지 알 수 없지만, 그의 전통에 대한 파괴와 새로운 전통의 수립은 내겐 충격적이었다.

백 선생님과 하나로 느껴지던 그이들은 70년대 초반 한반도를 떠나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우리 작가들의 전시회를 개최해 줬다고 한다. ‘동백림사건’으로 고통을 겪은 이후 아무도 전시회를 개최해주지 않았던 이응로 화백의 전시회를 개최한 계기로 백남준 선생님을 만났고 이후 그의 예술 세계를 알리는 주요한 임무를 맡게 되었다고 한다.

화성행궁을 비롯한 화성의 각 시설물 하나하나를 밟으면서 놀라움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정조의 화성건설의 의미와 민본주의 실천의 모습에 놀라워하며 화성의 아름다움에 감동하였다. 화홍문, 방화수류정, 화령전 등 화성 곳곳은 선조들의 미의식으로 가득하다. “아름다움은 적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준다”는 정조의 말처럼 화성을 쌓은 이들은 아름다움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알고 있었고, 그이들은 선조들의 축성의 마음을 이해하였던 것이다.

당시 백 선생님은 마지막 인생을 고국에서 보내고 싶어 하셨고 이들은 선생님의 마지막 여생을 보낼 공간을 찾고 있었다. 사전에 몇몇 오고간 이야기가 있었지만 이들이 선생님께 말씀 드린 곳은 역시 화성이었다. 세계문화유산 화성 내에 한옥을 마련하고 사람 사는 냄새를 맡으며 살고자 했던 것이었다. 미와 예술의 땅 화성에서 살고 싶었던 것이다.

두 달 뒤 자신이 뉴욕에서 개최한 전시회 도록을 보내며 백 선생님께서 화성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뜻을 보이셨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파격적인 삶을 살았던 그가 마지막 인생을 반추하며 영원히 머물고 싶었던 곳은 결국 자신의 본향인 수원 화성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화성안에서 200여년 전 새로운 패러다임의 변화를 추구한 정조와 만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정조와 백남준의 만남은 너무도 자연스러우며 아마 새로운 세상에서 사람과 땅 그리고 예술을 논할 것이리라.

백남준 선생님의 유해 일부가 우리 땅으로 와서 수원 인근에 있는 백남준 미술관에 안치된다고 하니 무엇보다 다행이다. 석가모니의 사리가 자비와 평등의 진리를 전 세계로 퍼뜨린 것과 같이 백남준의 혼과 뼈가 이 땅의 문화예술을 한 단계 높일 것이다. 그것이 바로 치열한 예술가의 삶이 보여주는 환희와 기쁨일 것이다.

/김 준 혁 수원시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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