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10월과 금년 1월 한국학중앙연구소가 주관한 세종실록을 읽는 강좌가 있었다. 두 차례 참석하며 세종실록에 접해보았다. 세종 큰임금은 워낙 하신 일이 많아 두루 이야기할 수 없지만 요즘 문제가 되는 공무원의 근무 자세와 임명에 대해서만 생각해 보기로 하자.
세종 시대에는 유난히도 조선 역사상 각 부문에서 인재가 많았다. 음악의 박연, 과학의 이천과 장영실, 집현전의 성삼문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 사군육진 건설에 이바지한 최윤덕, 김종서 장군 등 말할 수 없다. 그럼 역사상 그 시대에만 많은 인재가 태어났다는 것일까. 확률적으로 보아 그럴수는 없는 일이고 세종이 인재를 잘 발굴하여 적절히 썼다고 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세종시대라 하여 순탄히 넘어간 것은 아니었다. 정책을 시행함에 있어 허조(許稠)는 어디까지나 정통 유교논리에 따라 양반과 백성을 차별했고, 고약해(高若海)는 목숨을 걸고 임금에게 반대의견을 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허조가 개혁에 반대를 하면 강희맹이 이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 황희가 이를 종합하는 스타일로 정책이 토론되고 결정되어 갔다. 세종은 이런 대화의 시스템을 알고 반대하는 허조나 고약해를 심히 질책하지 않고 참고 견디며 회의에 참석시켰다. 반대 의견을 경청하려는 것이었다.
한국학중앙연구소원 박현모교수의 허조에 대한 평을 참고하면 황희가 여러 인재를 추천해 올리면 이조판서인 허조가 그 인물의 적합성 여부를 깐깐히 가려냈다. 그리고 ‘일 만들기 좋아하는’ 안숭선 등이 여러 정책 제안을 해 놓으면 그 제안을 허조가 스크린 했다. 세종은 허조의 모습을 보고 ‘허조는 고집불통이야’하면서도 늘 끝까지 그의 의견을 경청했다. 그러나 허조는 수차례 아뢰고 난 후에는 “이 정도면 중용을 이룰 수 있겠습니다”하고는 승복했다. 그는 바른 행정가가 무엇인지를 알았다.
그리고 인사정책에서는 한 번 적임자라고 뽑아 쓰면 그 자리에 일을 맡기고 또한 오랫동안 일하게 하였다. 한 예로 김종서는 파저강 토벌 이후 여진족의 보복 등의 불안을 없애기 위해 세종 15년 12월 김종서를 함길도 감사로 보낸다. 그는 전권을 갖고 그 곳의 일을 처리한다. 그런데 세종17년 10월 모친상으로 도성으로 왔는데 세종은 승정원에 “고향에 다녀온 후 100일 후에는 고기를 먹도록 권하고 돌아와 임소에 가게 하라”고 명한다. 신하들은 기왕 변방을 벗어나 도성에 왔으면 상을 치를 때까지 몇 달 아니면 1년이고 쉬었다 가려는 게 당시의 풍조였는데 세종은 장군이니 기력 회복용으로 고기를 먹게 하고 속히 함길도로 돌아가라고 명한다. 어찌 보면 야박해 보이나 철저한 행정가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다른 한 예로는 수령육기제라는 제도가 있는데 이는 관리가 한 고을에 가면 6년을 근무하게 되는 제도였다. 많은 관리는 가능하면 지방보다 중앙에서 일하고 싶어하는 것은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세종 22년에 회의를 하였는데 고약해는 ‘소신’이라고 해야 할 말을 ‘소인’이라고까지 하면서 세종에게 3년으로 하자고 제안한다. 세종이 듣지 않자 신하는 세 번 간하여 듣지 않으면 물러나는 것이라고까지 저항하며 의견을 편다. 결국 고약해는 정책대안이라기보다 자기 일신상의 편의를 위해 그리 해두는 것이라는 증거가 다른 곳에서 나타나 대안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조선시대 초기에는 한 고을에서 6년을 일하며 매년 감사와 평가를 받는 제도가 있었다. 수령으로서 자질이 있는 사람은 고을을 바꿔가며 수령으로 마치는 사람도 많았던 것을 보면 공무원의 전문직화가 이루어져 있었다고 하겠다. 오늘날에는 편의에 따라 때로 타이틀을 따기 위해 공무를 맡는 게 아닌가 하는 점을 비교케 하는 대목이다.
토론과 여론조사를 중시하고 인재를 뽑았으면 끝까지 믿고 또 그만한 공무자세를 강조한 세종시대의 정치가 새삼 생각나는 시대다.
/김 광 옥
수원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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