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 ‘아줌마’란 TV 드라마가 화제를 모은 적이 있었다. 교수 장진구란 기존에 없었던 새로운 유형의 캐릭터때문이었다. 돈을 주고 교수직을 사고 외간 여성에게 빠져 아내를 버리고 천박한 사고에 지적 허영심만 잔뜩 들어 있는 교수로 설정된 플롯은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사회적 통념상 그리고 사회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도덕적 장치로 대중매체는 지식인은 성스럽고 고고한 인격과 학식을 갖춘 이미지로 재생산됐으며 지식인을 위선적이거나 부도덕한 사람으로 묘사하는 건 마치 신을 모독하는 것처럼 매우 불경스러운 것이어서 암묵적으로 금기시하고 성역화돼 왔다. 그 점이 지식인에 대한 사회적 약속이며 질서였다. 그런 시대적 상황이니만큼 지식인의 이중적 속성을 파헤친 이 드라마는 파격적이었으며 이 땅의 비주류들에게 억눌렸던 해방구 역할과 통쾌함 그리고 카타르시스 등을 가져다 줬다.
요즘 영화 ‘왕의 남자’가 관객 1천만명 돌파란 신기록으로 영화사에 새로운 역사를 만든 이유와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장진구란 픽션에서의 캐릭터보다 더 드라마틱한 현실이 있었으니 바로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시나리오다. 지식인들에 대해 가졌던 대중들의 순진한 환상은 황우석사단의 사건으로 한순간 무너지고 사람들의 믿음체계와 정신체계 등을 흔들어 놓았으며 집단 공황상태로 몰아 넣었다.
‘영웅은 난세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다. IMF(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각박하고 삭막한 현실을 견뎌내야 하는 국민들에게 황우석 교수는 그야말로 영웅이며 희망이며 현대판 신이었다. 그의 미다스 손으로 누워 있는 장애자들이 벌떡 일어날 수 있는 기적을 만들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며 그만이 보다 나은 세상으로 만들어 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그 충격과 배신감 등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실제로 위선적이고 양심 불량 지식인들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존재하는 게 슬픈 자화상이다. 근대 지식인의 시조며 원형으로 추앙받아 왔으며 어린이 교육과 인간 정신에 가장 영향력을 행사했던 장 자크 루소가 자신의 아이들을 다섯 명이나 고아원에 보낸 비정한 아버지였다면….
독자들이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루소는 가난했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때면 자신은 위대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를 돕는 일은 스스로 은혜를 베푸는 일이라고 공언하고 다닐 정도로 자기 과시욕구가 심했으며 거짓말과 엄살을 밥 먹듯 했다.
마르크스는 어떤가. 노동자 해방을 위해 자본론을 집필한 그의 집에는 평생 임금 한 번 받지 못하고 노동력을 착취당한 가정부가 있었다. 그리스도의 나라를 지상에 세우는 게 삶의 목적이었던 톨스토이는 문란하고 난잡한 생활로 자신의 가정 하나 제대로 꾸려 나가지도 못했고 실존주의 철학자 샤르트르는 전형적인 남성 우월주의자로 여성을 인간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이외에도 러셀, 입센, 오웰, 촘스키 등 근대 지성의 거장들은 정신병적인 요소를 안고 있으며 과대망상증 환자이고 지독한 이기주의자에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착취하기도 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회구조와 인간의 행동을 근본적으로 개조하겠다며 이데올로기와 관념, 사상 등을 내놓았지만 이율배반적으로 그들의 삶은 자신들이 부르짖던 주의나 주장 등과는 정반대 삶을 살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위선으로 가득 찼다. 지식인들의 실상을 파헤친 폴 존슨은 “그들은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해 자기 선전, 거짓말, 기만, 표절, 곡해, 왜곡 등으로 가득차 있다”고 밝히고 있다. 물론 이 세상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 각계각층에서 학자의 양심과 정직함과 진실함 등을 갖고 후진을 양성하거나 자신의 분야에서 성실하게 연구하고 정진하는 지식인들이 훨씬 많다.
그렇기에 세상은 굳건하게 지탱해 나가고 좀 더 나은 세상으로 진보하고 있다고 믿는다. 지식인은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이해와 애정을 가진 태도를 가지는 게 관념적인 주의나 주장 등을 내세우는 것보다 훨씬 더 세상을 부드럽게 변화시키며 자기 함정과 모순 등에 빠지지 않고 살아가는 원동력이고 그들이 존재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이 국 진 신흥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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