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분양제 도입이 필요한 이유

임 덕 호 한양대학교 경상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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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는 어느새 새 아파트를 사려면 현물을 보기도 전에 계약금을 치루고 중도금을 내면서 3년 동안 기다리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 단돈 몇 천 원짜리 물건을 사면서도 혹시 하자가 없는지 요모조모 뜯어보는 사람들도 수 억 원짜리 아파트는 내 돈 미리 내고 주택업체의 선처만을 바라는 것을 보면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현행 아파트 선분양제는 주택업체들이 제도권 금융을 거치지 않고 소비자로부터 무이자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따라서 주택공급이 부족했던 시절, 금융기관의 대출여력이 미미했던 시절, 그리고 정부의 주택 투자 우선순위가 최하위에 머물렀던 시절에는 선분양제가 주택을 대량으로 공급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다. 그러나 주택 보급률이 100%를 웃돌고 고분양가 논란이 끊이지 않는 현 시점에서도 공급자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선분양제를 고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지나치게 공급자 편향적인 발상이다.

선분양제의 가장 큰 폐해는 소비자가 분양계약 후 입주까지 모든 진행 과정을 공급자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소비자는 단지 공급자가 제시하는 홍보물이나 모델하우스를 보고 주택업체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약관에 따라 계약금과 중도금을 사전에 지불하기 때문에 입주 후에 발생하는 각종 피해를 보상받는 데 극히 제한적이다. 이는 부실시공이나 홍보물과 다른 내용으로 공사가 이루어질 가능성을 내포한다.

둘째, 선분양 후 주택업체의 부도가 발생할 경우 그 피해의 상당부분을 소비자가 떠안아야 한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물론 대한주택보증에 의해 분양보증이 이루어지고 있다고는 하나 부도가 날 경우 공사 지연으로 입주시기가 늦어져 금전상의 피해가 불가피하다.

셋째, 주택업체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약관을 기준으로 계약이 체결되고 있으며 계약해지가 쉽지 않다. 설사 공급자의 약속 불이행으로 계약해지가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계약금과 중도금에 대한 이자보상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소비자가 금전적 손실을 감수하고 있는 실정이다.

넷째, 선분양제는 주택경기가 호경기일 때 주택경기 과열을 부추기고 주택경기가 후퇴기일 때 주택경기 침체를 부추기는 악순환을 초래한다. 주택경기가 과열될 때 주변 시세가 오르면 분양아파트에 대한 청약수요가 증가하기 때문에 주택업체들은 분양가격을 올리고 이는 다시 심리적 요인에 의해 주변 시세를 상승시키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만약 후분양제가 시행된다면 주택업체는 착공시점보다는 2~3년 뒤 준공시점의 주택경기에 맞춰 아파트를 분양하려고 할 것이다. 따라서 후분양제는 준공시점의 주택경기가 호경기일 때 입주물량이 증가하므로 주변 시세를 안정시키고, 반대로 불경기일 때 입주물량이 감소하므로 주택경기 침체의 장기화를 막는 효과가 있다.

얼마 전 대통령은 분양원가 공개는 시장원리에 맞지는 않지만 대세니 따를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민간이 공급하는 아파트에 대해서도 분양원가 공개를 추진하는 것이 좋겠다는 뜻도 밝혔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선분양제에서 분양원가 공개는 2-3년 후의 건설비용 추정치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과대 계상될 가능성이 크며 논란의 불씨가 될 수 있다. 설사 주택업체가 정확한 분양원가에 기초해서 주변 시세보다 값싸게 분양한다고 하더라도 선분양제에서는 투기적 수요의 기승으로 주택가격의 안정을 기할 수 없다. 정책 당국자들은 지극히 비정상적인 분양주택시장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분양원가의 공개도 좋지만 그보다는 후분양제의 도입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임 덕 호 한양대학교 경상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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