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공동체를 위하여

김 기 봉 경기대 인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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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통일의 초석을 닦은 건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이었다. 이는 남한 햇볕정책의 전형이 됐다. 하지만 북한 핵실험 이후 햇볕정책은 난관에 봉착됐다. 한반도 통일은 우리 민족끼리 공조한다고 성사될 일이 아니라는 점이 명백해졌다.

유럽은 2차례 세계대전의 참사를 겪고 유럽공동체란 하나의 집에 살기로 합의했다. 만약 유럽공동체란 공동의 집을 건설한다는 비전이 없었다면 지난 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마자 독일은 통일을 이룩하지 못했을 것이다. 프랑스나 영국 같은 주변 강대국들의 용인이 없었다면 독일 통일은 불가능했다. 마찬가지로 중국과 일본은 물론 미국 등의 동의가 없으면 한반도 통일은 불가능하다. 유럽공동체 건설이 독일 통일의 길을 열었던 것처럼 한반도 통일의 전제조건은 동아시아공동체 형성이다.

지금 우리에게 동아시아공동체가 요청되는 적어도 3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동아시아에서 집단안전보장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서다. 북한 핵실험은 우리가 동아시아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 준 사건이었다. 북한 핵무장은 남한은 물론 일본과 대만 등으로 이어지는 핵 확산 도미노로 이어짐으로써 동아시아 안보환경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둘째, 갈수록 심각해지는 환경문제는 동아시아를 하나의 생태공동체로 사유할 것을 요구한다. 국경은 중국에서 불어오는 황사를 막아내지 못한다. 중국의 사막화는 중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아시아 환경문제를 유발한다. 중국의 사막화를 방지하기 위해선 한·중·일 전문가들 사이에 공동연구가 이뤄져야 한다.

셋째, 경제협력을 위한 동아시아 공동체다. 20세기 전반 일본은 세계 자본주의체제 내에서의 미국 헤게모니에 대항해 대동아공영권을 형성하려다 패망하고 이후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에 편승, 번영을 누렸다. 하지만 21세기 미국은 경제 적자로 세계의 다른 지역 없이는 존립할 수 없는 세계 최대 채무국으로 전락했다. 달러 약세가 지속되면서 이에 대비해야 한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유럽은 이미 지난 99년부터 단일통화인 ‘유로’로 유럽의 경제적 통합을 이룩했다. 동아시아도 쇠퇴하는 미국경제에 대비하기 위해 화폐공동체를 형성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제 우리는 동아시아공동체를 만들어야 하는가 마는가가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질서를 구현할 수 있는 정체성을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가로 화제를 바꿔야 할 시점에 서 있다. 민족은 신화가 있지만 동아시아는 신화가 없다. 그 대신 문화가 있다. 우리는 동아시아문화를 화두로 서구적 근대에 대한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예컨대 유교적 인문주의를 바탕으로 한 인륜적 공동체가 우리시대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를 궁구해 보는 가운데 동아사아 정체성을 만들 수 있다.

전통은 집합적 기억을 조직하는 매개체인만큼 정체성은 전통을 통해 형성된다. 전통을 무시했던 게 근대의 오류다. 전통이란 타파해야 할 잔재가 아니라 시간의 시금석을 통해 가치가 검증된 우리 삶 의미의 총체다. 동양 철학자 이승환의 말대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철저한 자기비판을 거쳐 살아남은 전통, 근대성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 절실하게 요청되는 대안적 사고로서의 전통, 바람직한 삶을 위해 인류에게 보편적인 가치규범이 되어줄 전통 등이다.

이런 점에서 ‘새로운 진보’로서의 유교 정신은 비록 과거 어느 시점에서도 실현된 적이 없지만 미래 사회에선 반드시 성취돼야만 할 이상이다. 이런 이상의 실현을 위해 기꺼이 복무하고 희생할 의지가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로서 동아시아란 현재는 없지만 우리가 만들어야 할 세상이다.

/김 기 봉 경기대 인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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