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보를 넘기는 ‘다른 손(?)’

박인건 경기도문화의전당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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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연주회 때 연주자나 무대진행요원도 아니면서 연주자와 비슷한 의상을 입고, 연주회가 시작되기 전부터 무대 뒤를 지키고 있는 사람이 있다. 물론 공연 스태프도 있겠고, 연주자의 업무보조자도 있겠지만, 그날 연주할 피아니스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사람이 바로 ‘페이지 터너(Page Turner)’다.

글자 그대로 ‘쪽(페이지)을 넘기는 사람’인데, 피아니스트를 대신해서 악보를 넘겨주는 보조자 역할을 한다. 피아니스트는 당연히 두 손으로 연주를 하므로 악보를 넘길 ‘다른 손’이 필요하고, 그 역할을 ‘페이지 터너’가 맡는다.

무대 뒤에서는 ‘페이지 터너’를 부를 때 속된 말로 남자인 경우 ‘넘돌이’, 여자인 경우는 ‘넘순이’라고 한다. ‘넘돌이’나 ‘넘순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필수자격조건으로 피아노 악보를 제대로 읽을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대체로 연주자의 제자나 음대 학생들이 그 역할을 맡는다. 악보를 대신 넘겨주는 일은 보기보다 쉽지 않다. 대개의 경우 악보의 1마디 정도를 남기고, 연주중인 피아니스트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빨리 넘기는 게 요령이다. 때문에 피아니스트와 ‘페이지 터너’는 연습을 통해 서로 호흡을 맞추기도 한다.

간혹 반주를 맡는 피아니스트 가운데 공연에 임박해서 갑자기 ‘페이지 터너’를 공연장 측에 요청해 공연진행자들을 당황스럽게 하는 경우가 있다. 실제 수년전 흑인이면서 희망과 인권을 노래하는 세계적인 성악가 소프라노 바바라 헨드릭스를 초청한 공연에서 갑자기 연주회 시작 10분 전 반주자인 피아니스트 스테판 세야가 ‘페이지 터너’를 요청해 왔다. 당황한 직원들이 관객 중 피아노 전공자를 찾아 헤매다가 다행히 한국예술종합학교 피아노전공인 모 교수를 만났고, 그의 제자에게 ‘넘돌이’역을 맡겨 공연을 무사히 마쳤다.

이처럼 공연 관계자들은 인맥을 통해 ‘페이지 터너’를 긴급하게 섭외하거나 심지어 일반인 중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학생을 찾아 위기를 넘기곤 하는데 대략 5~10만원 정도의 사례비를 지급한다. 피아노 전공학생들에게는 용돈도 벌고 바로 옆에서 연주를 감상하는 행운까지 얻는다고 볼 때 ‘꿩먹고 알먹고’ 일석이조의 소득일 수도 있겠다.

간혹 ‘페이지 터너’가 당황해서 한 장 넘겨야 할 악보를 두 장 넘기거나, 악보를 넘기려다 그만 바닥에 떨어뜨리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재빨리 악보를 주워 피아노 위에 올려놓는다는 것이 이번에는 거꾸로 놓는 바람에 결국 그날의 연주를 망치는 경우도 드물게 있다.

필자도 오래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바이올리니스트 김남윤 선생 그리고 피아니스트 이경숙 선생과 동행해 부산연주회를 갔는데 이경숙 선생이 갑자기 ‘페이지 터너’가 필요하다고 해서 사람을 찾다가 못 찾아 필자가 ‘넘돌이’ 역할을 했다. 그런데 1장을 넘겨야 하는 악보를 모르고 2장을 넘겨서 연주를 망칠 뻔한 일이 있었다. 물론 재빨리 악보를 원위치시켜 위기는 넘겼지만 상당히 긴장된 순간이었다.

오케스트라의 경우 객석에서 볼 때 안쪽에 앉은 단원이 악보담당이다. 우스갯말로, 옆 자리 ‘고참’ 단원과 사이가 좋지 않을 때는 악보를 일부러 빨리 넘기거나 늦게 넘겨 골탕을 먹이기도 한다.

공연을 끝낸 연주자에게 박수를 보낼 때 무대에서 쑥스러워 하는 ‘페이지 터너’들에게도 격려의 박수를 보내주자. 어쩌면 이들의 숨은 역할이 있기에 연주회가 더 빛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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