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연주자들이 남기고 간 앙코르의 추억들

홍승찬 예술의전당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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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2일 예술의 전당 음악당에서 있었던 피아니스트 예프게니 키신의 연주회는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고 앞으로도 두고두고 기억될 것 같다. 일찌감치 티켓이 매진되어 팬들의 기대와 성원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지만 연주회가 끝나고 앙코르곡만 10곡을 연주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쇼팽의 녹턴으로 시작한 이날의 앙코르 순서는 마지막으로 연주한 모차르트의 터키 행진곡까지 모두 1시간40여분이나 경과되었고 그 후로도 사인회가 한참이나 더 이어졌다. 1988년 오페라 ‘사랑의 묘약’에서 남몰래 흐르는 눈물을 불렀던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무려 165번의 커튼콜을 받음으로써 이 부문 최고의 기록을 세웠지만 소요시간은 1시간7분이었고 피아니스트 루돌프 제르킨이 베를린 데뷔 연주회에서 앙코르곡으로 연주했던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도 1시간30분을 넘지 않았으니 키신이 이번 내한연주회에서 기록한 1시간40여분의 앙코르 시간은 예사롭게 넘길 일이 아닌 듯하다.

지금까지 우리나라를 다녀간 거장들의 무대를 하나씩 돌이켜 보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만한 일들이 참으로 많았던 것 같다. 서거 직전 처음이자 마지막 내한연주회를 가졌던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테르는 앙코르 아닌 앙코르 연주로 우리 청중들의 혼을 쏙 빼놓기도 했다. 청중들이 연주에 너무나도 몰입한 나머지 소품들로 이어진 후반부 순서가 미처 다 끝나기도 전에 박수와 환호가 끊어지지 않았고 리히테르는 어쩔 수 없이 들어갔다 나왔다가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후 남은 소품 한 곡 한 곡이 끝날 때마다 같은 상황이 되풀이되었고 그래서 결국은 단 한 곡의 앙코르곡도 연주하지 않았으면서도 마치 여러 곡의 앙코르를 연주하는 것과 같은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기억에 또렷이 남아있는 모든 앙코르들 가운데 최고의 감동을 전해준 경우를 꼽으라면 단연 바리톤 셰릴 밀른스의 내한 연주회가 아니었나 싶다. 메트로폴리탄의 간판 가수였던 그는 은퇴를 기념하는 세계 순회공연을 마련하였고 그 일정 중에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예술의 전당에서 독창회를 가졌다. 처음부터 끝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따뜻하고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연주회를 마친 이 거장에게 앙코르 순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지만 이어진 광경은 너무나도 뜻밖이었고 너무나도 감동적이었다. 키가 크고 체격이 잘 빠진 밀른스가 나타나기를 기대하며 박수를 그치지 않는 청중들 앞에 그와는 대조적으로 키가 작고 배가 나온 데다가 머리카락까지 빠져 볼품이 없는 반주자가 악보도 없이 빈손으로 당당하게 무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뒤를 나타난 밀른스는 전과는 달리 허리를 굽히고 조심스럽게 걸어 나오면서 연신 거들먹거리는 반주자의 눈치를 살피면서 비위를 맞추었다. 그리고 반주자의 손에 들려 있어야 할 악보가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설마 했던 일이 드디어 벌어졌다. 반주자가 노래를 하고 밀른스가 반주를 하는 광경이 펼쳐진 것이다. 청중을 즐겁게 하려고 몸짓과 표정은 우스꽝스러웠지만 노래와 반주는 그 어느 하나도 흠잡을 데가 없이 훌륭하고 진지했다. 밀른스의 반주는 그 어느 피아니스트 못지않았고 반주자의 목소리는 그 어떤 테너 가수보다 아름다웠다. 이날 청중들은 음악에 감동하고 뜻하지 않은 해프닝에 더 없이 즐거워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오랫동안 뭉클했던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평생을 함께 동고동락한 음악동료이자 동지에 대한 감사와 존경을 이렇게 표현하고자 한 밀른스의 따뜻하고 넉넉한 마음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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