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이야기다. 서울의 어느 대형 공연장에서 오페라 공연이 있었다. 새로운 것을 하던 시절이 아니였으니 오페라가 언제쯤 끝나리라는 것을 대부분의 관객들은 알고 있었다. 이 오페라는 휴게시간을 길게 잡아도 3시간 전에 끝나는 작품이었다. 그런데 공연은 그렇지 않았다. 서곡은 별로 특이할 게 없이 시작되었으나 시간이 가며 연주가 점점 느려지기 시작했다. 휴게시간이 있어 그나마 다소 페이스를 찾았던 연주는 후반부에서 더욱 느려져 끝부분에 다가갈수록 거의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막차를 놓치지 않으려는 (혹은 더 들어줄 수 없다고 생각한) 관객들이 빠져나갔지만 나는 대체 어떻게 되는지 끝까지 지켜보았다. 연주는 평균 공연시간을 넘겨 4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끝날 수 있었다. 저녁 7시 반에 시작된 공연이 11시 반 경에야 끝난 것이다. 일생에 드물게 만날 특이한 연주였던 것만은 사실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간단한 이유에서다. 요즘과 달라 지휘자가 부족하다보니 제작자 측에서 할 줄 안다는 소리만 믿고 지휘를 맡긴 것이다. 이 지휘자는 악보를 읽을 줄 알고 지휘봉을 흔들줄 아는 정도를 ‘지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휘란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행위를 말하는데 이 지휘자는 아마 음반을 들으면서 연습을 한 것 같다. 음반이야 지휘자와 상관없이 스스로 연주했을 터이고 거기 맞춰 지휘봉을 흔들었으니 문제가 생길 리가 없다. 그리고 나서 이 지휘자는 오케스트라 연주에 맞춰 지휘한 것이다. 한마디로 지휘자는 오케스트라에 맞추느라 느려지고 오케스트라는 지휘자를 보며 느려지고 서로서로 맞추면서 계속 느려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템포가 느려지는 것을 이 지휘자가 알았다 치더라도 그것을 바로잡지 못했으니 지휘자로서 전혀 능력이 없는 사람인데 아마도 느려진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을 것으로 짐작한다. 관객은 연주가 느려진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는데 그것을 모를 뿐아니라 관객은 정확하게 느낀다는 철칙은 더더구나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저 피상적으로 할 줄 안다는 연주자와 진정한 아티스트의 차이는 이 점에서 드러난다. 즉 진정한 아티스트는 무대에서 연주하며 동시에 분신을 만들어 객석에 내려보낸다. 그리하여 그 분신은 자신의 연주를 관객의 입장에서 보고 들어 다시 연주자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여기서 연주가 존재하는 이유인 ‘공감’이 형성되는 것이다.
연주자가 관객에게 신선한 감동과 경이감과 새로운 성찰을 주지 못한다면 존재의 가치조차 없다. 관객이 공연 도중에 지루해서 일어나게 만드는 것은 무대와 객석의 위치가 전도된 것을 의미한다. 다시말하면 지휘자는 오케스트라를 이끌 뿐아니라 함께 객석을 이끌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무대가 객석보다 좀 더 높은 위치에 있는 것 아닐까?
이것은 연주 자체 만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 전반에 적용할 수 있는 이야기다. ‘문화전달자’는 무대와 객석이 가깝듯 일반인들에 가까이 있어야 하지만 무대에 선 사람처럼 일반인들보다 ‘한 발 먼저’ 이끌어야 하는 것이다. 진정한 문화전달자는 진정한 아티스트처럼 무대에 있되 분신을 만들어 일반인들 틈에 들어가 자신을 볼 줄 알아야한다. 무조건 관객의 ‘입맛’에 맞는 것만 연주하는 사람을 관객이 결코 높이 평가하지 못하듯 일반인들에 앞서 이끌 줄 모르는 문화전달자들도 결국에는 외면당할 수밖에 없다.
물리적 시간과 느낌의 시간이 다르다는 것은 베르그송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상식적으로 아는 사실이다. 한국의 시간은 그 속도가 무섭게 빠르다는 것도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객석에서 지루한 템포를 느끼고 있는데 연주자는 까맣게 모르고 있는 것처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있는 한가한 문화전달자들을 볼 때마다 오래 전에 보았던 그 희한한 오페라 공연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시간과의 싸움은 지휘자만 하는 일이 아니다. /조성진 성남아트센터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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