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연근무제 유감

가사·육아가 여성몫이라는 대전제

일·남성 중심 문화를 바꿔야

경제위기의 최대 피해 계층인 여성과 청년층의 취업률이 드디어 상승 기조로 바뀌었다는, 미심쩍지만 반가운 기사가 눈에 띈다. OECD 회원국 가운데 최장인 연간 2천250시간 노동을 수행하고 있는 우리나라 근로자의 연평균 근로시간을 2020년까지 1천800시간대로, 무려 450시간이나 단축하기로 합의했다는 노사정 위원회 소식도 들려온다. 연간 450시간이면 무려 30주일 동안 매일 3시간씩의 초과 근무에 해당하는 양이니 계획대로 실현만 된다면 앞으로 10년 후에는 많은 근로자들이 야근 없는 일상의 축복을 만끽하게 될 것이다. 노동부와 여성가족부에서는 일자리 나누기와 일·생활의 조화를 위해 시간제 근무와 유연근무제도 도입 방안을 연일 모색중이라고 한다. 경제가 어려운 가운데서도 이렇게 근로 여건을 개선하려는 정부의 노력이 뜨겁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유연근무제도 도입 관련 소식이 언론에 등장할 때마다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여성, 노령자 등 취약계층’의 일자리 창출을 위한 제도라거나 출산과 육아로 직장을 포기했던 구직자들(즉, 소위 경력 단절 여성들)이 재취업을 할 수 있도록 마련된 제도라는 설명이다. 이는 유연근무제 사용자로 ‘여성’을 전제하고 있다는 뜻이다. 노동부와 여성가족부에서 ‘일·가정 양립’ 혹은 ‘일·생활 조화’라는 화두를 들고 나올 때에도 그 앞에 ‘여성의’라는 말이 생략돼 있는 것처럼 받아들이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일·가정 양립을 가능케 하는 시간제 근무, 유연근무 등의 제도가 모두 우선적으로 여성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은 여성들이 우리 사회에서 가사와 육아의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초강력 대 전제를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단언하건대, 이 전제의 유효성이 유지되는 한 이 모든 제도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여성(특히 고학력 여성)의 경제활동 촉진이나 출산율 제고 같은 목적은 달성될 수 없을 것이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 기혼부부의 맞벌이 비율은 40%이고 결혼한 남성의 82%가 여성 취업에 긍정적이다. 가사나 출산, 육아와 상관없이 여성이 직업을 갖는 게 좋다고 말하는 남편이 47%에 달한다. 그런데 이들 남편이 가사일에 할애하는 시간은 주말을 포함해 하루 평균 24분(맞벌이)~19분(홑벌이)이고 가족 돌보기에 할애하는 시간은 역시 주말을 포함해 하루 평균 13분(맞벌이)~20분(홑벌이)이다. 흥미롭게도 맞벌이 남편이 가족 돌보기에 더 인색하다. 맞벌이가 아닌 가정에서는 주말이면 아내의 가족 돌보기 시간이 평일보다 줄고 남편들이 조금 더 많은 시간을 가족 돌봄에 투자한다. 하지만 맞벌이 남편들은 주말에도 평일과 별로 다르지 않게 가족 돌봄에 인색하다. 그래서 맞벌이 여성들의 노동 시간을 더 탄력적으로 조절할 수 있게 해주고자 온 사회가 이처럼 힘을 쏟나보다.

 

여성의 노동 시간이나 고용 형태를 더 유연하고 탄력있게 해주기 위한 정부의 노력에는 정체된 출산율을 높이고자 하는 의도가 함께 들어있음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중차대한 현안 해결을 위해 우리 사회 전반의 무수히 많은 실제 변수들을 모두 상수로 묶어둔 채 여성 요인만을 변수로 이리저리 조작한다면 달라지는 것은 결국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이제는 여성 요인을 상수로 묶어 두고 일 중심, 남성 중심의 조직문화와 가치관 등을 주요 변수로 조작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유연근무제 유감은 그 때문이다.  /손영숙 경기도가족여성연구원 성평등교육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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