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서애 류성룡은 명재상이기 이전에 훌륭한 학자였다. 서애가 명재상, 명정치가로서의 재목을 갖춘 것은 사실이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나름대로 자신만의 뚜렷한 학문관을 완성하고자 남다른 노력을 하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는 ‘대학’을 즐겨 읽으면서 유학뿐 아니라 도가, 의학, 풍수지리 등 학문을 넓히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여러 분야의 서적을 두루 탐독하였다고 한다. 한 마디로 전문가이기 이전에 상식이 풍부한 선비가 되고 싶어 했던 것. 그의 풍부한 지식과 식견은 이분삼열의 혼돈에 빠진 조정과 고난에 처한 백성을 이끄는데 십분 활용됐다.
그러나 서애는 책을 읽되 그 내용을 깊이 음미하는 것을 철칙으로 여겼다. 만약 서애가 과거 선현의 명귀를 암기하고 지식을 습득하는 학자였다면 그는 많은 유생중의 하나로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하나의 이치를 깨닫는 과정 즉, 생각과 사색의 과정을 매우 중시하였다. 선현의 책을 읽되 가능하면 주석을 읽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던 것이었다.
학문의 깊은 사색 오늘날 쇠퇴의 길
학문을 연구함에 있어서 깊은 생각과 사색은 기본이 됨에도 불구하고 이를 소홀히 여기는 풍토가 우리 사회에 만연되고 있다. 서애의 학문태도는 오늘날 진정성이 훼손된 사이비 지식인들에게 따끔한 경종을 울릴 뿐 아니라, 효율성과 순간적 감성주의·한탕주의가 판을 치고 있는 우리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최근 캄보디아에서 한국에 대한 좋지 않은 얘기가 들려온다. 국경을 접하고 있는 베트남사람을 제외하고 캄보디아를 찾는 최다 관광객이 한국사람이다. 지난해 약 28만 명이 관광, 사업, 교육, 봉사 등 갖가지 명목으로 캄보디아를 찾았고 이 숫자는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 그런데 프놈펜에 한국기업이 짓다만 고층아파트가 흉물스럽게 놓여있는데 인기가 없어 건설이 일시 중단되었다는 것이다. 분양가격이 높다는 이유보다 이 아파트가 더운 열대지방의 생활에 맞게 지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인기가 떨어진 주요 이유이다. 열대지방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통풍, 냉방, 그리고 경제성을 깊이 고려하지 않은 채, 우리 방식을 그대로 밀어 붙였던 것이다. 원래 우리는 배산임수와 주변의 지형을 충분히 고려한 건축전통을 가지고 있건만 도대체 무슨 이유로 가장 상식이 되는 이러한 원칙조차 고려하지 않은 아파트 건설이 이뤄졌는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진 것이다.
최근 우리의 아이돌 그룹들이 파리에서 인기리에 공연을 마쳤다. 우리 노래, 우리 문화에 관심을 가진 외국아이들을 보면서 스스로 한국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한 두가지 사실로 한국문화의 세계화가 이뤄졌다고 자만에 빠져서는 안 된다. 오늘날의 대중문화는 많은 투자와 자본이 결합된 상품일 뿐이다. 그것이 우리의 문화수준을 보여주고 한류가 유럽을 상륙해서 전 세계인이 한국을 주시하기 시작했다고 교만을 떠는 것은 서애선생이 강조했던 생각하는 학문을 무시하는 어리석음과 다를 바 없다.
지식보다 생각이 힘되는 사회 조성을
우리들은 각종 정책과 사업들이 치밀한 준비와 깊은 생각, 폭넓은 성찰을 하면서 시행되고 있는지 반성해야 한다. 벌써 내년 총선을 앞두고 이런 저런 사업들이 봇물 터지듯 나오고 있다. 왜 필요한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떤 결과가 있는지 진지한 생각과 까다로운 생각, 복잡한 생각들을 생활화해야 한다. 크고 작은 모든 사업과 정책, 행사에 좀 더 깊은 생각이 반영될 수 있는 우리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21세기 문화의 시대, 국민소득 3만불, 글로벌 국가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지식’보다는 ‘생각’ 그 자체가 힘이 되는 사회가 바람직하다.
허권 유네스코평화센터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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