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유감

요즘 디자인(design)이라는 단어가 정치나 문화는 물론 도시 분야에서도 이슈가 되고 있음은 부정하기 힘들다.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이제는 도시 미관이나 공공 디자인이라는 용어가 들어간 문장 한 구절 정도는 누구나 어렵지 않게 구사하고 있으며 지자체의 시장이나 공무원들도 도시 미관이나 디자인 운운하는 대세를 반영이나 하듯 해당 분야의 전문가 모시기나 위원회 인원 보강 등에 힘을 쏟고 있는 것이 아마도 요즘의 일반적인 추세일 것이다. 간혹 건축이나 도시 심의라도 들어갈 양치면 왠지 디자인이라는 단어를 언급하면서 도시 맥락 따지기 정도 한 두 마디 하지 않으면 머쓱해지기도 하는 게 요즘 세태일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응용 미술이나 산업 디자인 등의 영역에서 조용히 힘을 키워나가던 디자인이라는 개념이 이제는 건축이나 도시 나아가서는 문화를 모두 아우르는 전지전능의 화신처럼 둔갑해버린 느낌이다.

 

결코 나쁜 일은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나 건축을 아름답게 꾸미고 치장한다는데 어찌 토를 달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아름답고 삶의 질이 높은 예쁜 건축이나 도시는 그 자체가 랜드마크화되어 상품화 가능할 것이며 그러다보면 내적으로는 자신의 건축이나 도시에 대한 자부심과 공동체 의식이 함양될 것이고 외적으로는 두바이나 스페인의 빌바오처럼 잘 나가는 도시와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관광이나 기술 이전 등을 통한 외화 벌이도 가능할 것이니 그 누가 어깃장을 놓거나 비판을 할까 싶다. 또한 내가 사는 건물이나 도시를 예쁘게 만들겠다는데 언감생심 그 누가 불만을 토로할 수 있을까 싶다.

 

동가홍상(同價紅裳)이라 했던가.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이고 같은 값이면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말일게다. 그 누구라도 토를 달거나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보기 좋다는 것이 딱히 나쁜 것도 아닐 바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동가홍상이라는 말은 동가(同價), 즉 가격이 같을 경우를 우선 전제한다. 같은 값일 경우에 빨간 치마가 더 나을 수 있다는 것이지, 무작정 빨간 치마가 더 좋다거나 그래서 더 비싸게 팔거나 사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가격 관계없이 다홍치마만 고르리라는 법은 없다. 그렇다면 그 옆에 진열되어 있는 다른 치마들이 너무 속상할 일이다. 다홍치마라는 것은 가격이 같다는 전제하에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답인 셈이다. 여기서 가치의 문제가 대두된다. 특히 다홍치마가 지니는 절대적 가치 말고 그것을 사고자 하게끔 하는 상대적 가치가 더 문제가 될 것이다.

 

요즘 디자인이라는 단어는 그 원래의 목적과는 달리 절대적 가치가 강조되는 경향이 강하다. 오히려 요란하기까지 하다. 서울을 비롯한 많은 도시들이 예뻐지려 하고 있고 명품 운운하는 도시나 단지부터 길거리의 간판에 이르기까지 사방이 디자인의 포장으로 넘쳐나고 있다. 또한 공공 디자인이라는 이름 아래 불요불급한 디자인이 중복되거나 특정지역에 편중되기도 한다. 아마도 디자인이라는 것의 주체와 객체의 관계가 애매해진 탓일 것이다. 디자인은 만드는 주체의 생각과 아이디어도 중요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것을 즐기고 향유하는 객체의 니즈(needs)와 심리적 물질적 만족을 전제한다는 점을 잠시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디자인(design)은 희화적으로 표현하자면 de+sign으로 볼 수 있다. 원어에 충실하자면, 생각이나 관념을 구체화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학술적인 근거 등과는 별도로 de라는 접두사가 감소하다(down or away), 품격 등을 떨어뜨리다(debase), 제거/철거하다(removal) 등의 사전적 뜻도 지니고 있음을 생각하면 디자인이 우리에게 주는 일종의 경고를 읽어낼 수 있다. 이는 디자인 주체의 의도나 뜻(sign)이 너무 지나치면 품격을 떨어뜨릴 수도 있으며 의미가 전도될 수도 있고 결국에는 그 사명을 다하지 못한 채 제거될 수도 있음을 경고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혹은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하기 전에 또는 다다익선(多多益善)의 환상이 몰개성과 낭비의 도시를 만들어내기 전에, 디자인이라는 단어가 지니고 있는 현란한 의미 체계나 확대 해석을 경계하라는, 아니 오히려 줄이거나 없애라는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김영훈 대진대 건축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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