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영학교 소풍가는 날은 비 오는 날

 

 

기찻길 옆 오막살이. 창영동은 지난 한 세기 동안 경인선 기찻길과 함께 해 온 동네다. 개화를 알리는 기적(汽笛) 소리에 잠을 깨며 한동안 신식 동네로 살아왔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바뀌었지만 묵은 것만 움켜쥐고 바튼 기침만 하던 이 동네가 하마터면 큰 수술을 받을 뻔 했다. 박제가 돼 가던 이 동네에 불어 닥친 개발바람은 호불호의 논쟁을 일으키며 오히려 관심과 활기를 불어넣었다. 한동안 수면무호흡증에 빠져있던 동네는 이제 다시 기지개를 펴고 있다. 인천의 자존심을 지키며 나잇값 하는 ‘꼰대’로 다시 돌아오고 있다.

#류현진의 후예들

산업도로가 관통할 뻔 했던 창영동은 인천의 근대역사가 관통하는 곳이다. 1899년 경인선 철도가 놓이기 전 제물포항에서 서울을 가려면 이 길을 거쳐야 한다. 개항후 포구에서 싸리재 거쳐 배다리 옆을 지나 쇠뿔고개로 가는, 이름하여 경인가도(京仁街道)다. 사람들이 오고가다보니 낯선 풍경의 집들도 들어섰고 별난 이야기도 만들어졌다.

 

창영초등학교는 인천 최초로 조선 어린이들을 가르치고자 1907년 ‘인천공립보통학교’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고 1910년 3월 18명의 첫 졸업생을 배출했다. 현재도 건재하고 있는 빨간 벽돌의 교사(校舍)는 당시 교육을 열망하는 조선인 유지들이 정성껏 모금한 2만원을 밑거름으로 1922년에 완공됐다.

 

70년대 말까지 창영동이 인천의 중심지였기 때문인지 창영학교 아이들은 송현동, 만석동 등 변두리 아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얼굴색이 좋았다. 부잣집 아이들만이 할 수 있는 고적대와 야구부 등이 있어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창영학교 소풍날은 어김없이 비가 내렸다.

징크스가 계속되다보면 ‘설화’가 만들어지는 법. 우물을 팔 때 용을 죽였다는, 혹은 소사 아저씨가 막대기로 용의 꼬리를 쳤기 때문에 그  용이 원한에 사무쳐 저주를 내린 것이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변두리 학교 아이들에게는 창영학교 아이들의 이런 불운을 보면서 자신들은 참 좋은 학교에 다닌다고 애써 자위하곤 했다.    

 

맑은 햇살이 빨간 벽돌건물을 선명하게 비춘 늦가을 날, 창영학교를 찾았다. 야구부원들이 함성을 주고받으며 운동장에서 땀을 흘리고 있다. 학교 담벼락에는 ‘대한민국의 에이스 류현진의 모교 창영초 야구부원 모집’이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세월은 흘렀어도 여전히 부러움의 대상이다. 문제는 학생 수다. 많을 때는 한해 1천명 이상이 입학했다. 올해 입학생 수는 40여 명. 이제는 야구팀 하나 채우기가 벅찰 만큼 아이들이 없다. 창영은 소풍날의 징크스가 있던 그 시절이 못내 그립다.

 

#에즈버리 동산 위 파란 지붕

창영학교 옆으로 영화학교가 있다. 미국인 처녀 마거릿 벤젤, 독실한 크리스천인 그녀는 1891년 스물 둘의 나이에 평양을 건너 조선으로 왔다. 그녀를 마중 나온 존슨 목사는 당시 내리교회 담임목사였다.

 

인천으로 온 벤젤은 내리교회 한국인 전도사의 딸을 가르쳤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초등교육기관인 영화초등학교의 출발이다.

 

출발부터 어려움이 많았다. 서양인이 어린이의 간을 약에 쓴다는 흉흉한 소문에 초기 학생 수는 남자 3명, 여자 2명뿐이었다. 싸리재에 있던 학교는 1911년 현 위치에 2층 벽돌집 교사를 마련해 이전했다. 이 건물은 올해로 꼭 100년이 됐다.

창영교회 옆에는 야트막한 언덕이 있다. 존스 목사는 이곳을 ‘에즈버리 동산’이라고 불렀다. 1893년 선교기지를 세우기 위해 이 일대의 땅을 매입해서 지금의 동인천세무서 자리에 남자선교사 사택을 지었다. 그 옆에는 안데르센 동화책에서나 나올법한 고풍스러우면서도 앙증맞은 여선교사 사택을 지었다.

 

지상 2층, 지하 1층에 건평 469㎡(142평) 짜리로 마루가 깔린 복도를 따라 아래 윗층에 각각 5개의 방이 있다. 지하에는 당시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던 보일러 시설이 그대로 남아 있다.

#실패처럼 도는 게 인생인가

‘미싱이 돌아갈 때 실이 실패에서 풀려나가듯 인생도 자연에 순응하며 그렇게 흘러가는 것. 어떤 모양으로 풀려나갈지 박음질이 되어질지, 그 숙제는 우리가 푸는 것…’ 창영동 길 중간쯤에 있는 박의상실 쇼윈도에 써 있는 글귀다. 의상실 주인이 궁금해 불쑥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바느질 인생에 대한 제 이야기이자 소회죠” 박태순(60)씨는 6번지, 3번지, 9번지 등 창영동 골목에서만 40년 넘게 바느질을 했다. 1976년 당시 인기직장이었던 동일방직에 취업하려고 했는데, 키가 작아 떨어졌다. 회사에서 요구하는 키는 155㎝. 거기에서 딱 1㎝가 모자랐다.

친구와 함께 양재기술을 배웠다. 그리고 배다리에 ‘미스박 의상실’이란 간판을 걸었다. 동생 뒷바라지 때문에 결혼도 안하고 돈을 벌 요량이었다. 처녀가 결혼 안 한다는 말은 거짓말 중의 거짓말. 그는 결혼했다.

 

그래서 슬그머니 간판에서 ‘미스’를 지워버렸다. 함께 오랜 세월을 보낸 사람들은 골목만 늙어갈 뿐 자신들은 서로 늙지 않은 것으로 착각하는 지 아직도 삼성서림 사장님은 그녀를 ‘미스 박’이라고 부른다.

 

“한때 이곳은 일류는 아니지만 골든의상, 정의상, 르네의상 등 대여섯 개의 의상실이 있었어요. 지금은 단골 10여 명의 옷만 만들 정도예요.”

 

한창 때는 미싱사 등 4~5명을 두고 하루 세벌을 만드느라 밤새기 일쑤였다. 박 사장은 중구 사동에 살았는데 10세 때 집이 철거돼 송림3동에서 살았다.

 

이런 아픔 때문인지 길을 뚫기 위해 집들이 철거될 때 맨 앞에 서서 반대했다. 그는 배다리에서 그의 실패가 다 돌아갈 때까지 일하고 싶은 소망을 갖고 있다.

 

“우리집이 동인천 대한서림 다음으로 오래된 책방이야”. 헌책방거리에서 60년간 ‘집현전’이란 헌책방을 운영하고 있는 오태운(85) 사장. 헌책방 거리는 6·25 전쟁 직후 폐허가 된 거리에 이동식 리어카 책방이 하나둘 모여들면서 시작됐다.

1960년대 서울 청계천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로 큰 헌책방 거리가 형성됐다. 오 사장은 영어 관련서적을 구하기 힘들었던 시절 학생들의 성화에 못 이겨 미군부대 등을 돌아다니며 헌책을 구하기도 했다. 그러면 책을 사려는 학생들이 책방 앞에 줄을 섰다.

 

“1960, 70년대 줄을 서 책을 구하려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한국의 미래가 밝겠구나 생각했지요. 하지만 요즘 학생들은 참고서 외에는 책을 찾지 않아 그게 안타까워.”

 

헌책방 가게의 주인들은 이제 헌책만큼이나 긴 인생을 보냈다. 최근 삼성서림과 국제서림이 가게를 내놓았다. 이제 머지않아 헌책방 거리는 그들과 함께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질지지도 모른다.

 

#토끼고기의 추억

책방거리 뒤쪽에는 배다리 큰 도로와 이어지는 좁은 골목이 하나 있다. 방값이 싸 요즘 외국인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길조여인숙이 나온다. 60~70년대 전형적인 여인숙의 모습인 이 집 벽에는 한 달 이상 숙박하는 손님을 위한 ‘달방’이 가능하다는 종이가 붙어 있다.

 

그 옆에 ‘대인상회’라는 간판이 붙은 오래돼 보이는 2층 건물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데 한때 쌀을 크게 취급했다고 한다.

 

지금은 1층에 토시살 숯불구이집이 자리잡고 있다. 황인순 할머니(78)는 황해도 은율 출신으로 1·4후퇴 때 피난 내려왔다. 처음에는 빈대떡, 되비지 등을 팔았지만 이 집이 한때 유명세를 치른 것은 토끼고기를 팔았기 때문이다.

 

토끼뿐만 아니라 오리, 참새, 꿩 등 날개 달린 거의 모든 조류가 그곳에서 요리되었다. 지금은 손자 고원기(36)씨가 할머니와 함께 토시살 등을 팔고 있다. 

 

“우리는 개발을 원해요. 비만 오면 물이 줄줄 새요. 반대하는 사람들 중에 이 동네에서 먹고자는 사람 별로 없어요. 우리에겐 생존인데 그들에겐 그게 문화래요.”

 

사라진 흔적의 덧없음과 사라지지 않은 흔적의 견고함이 겹쳐진 창영동에서는 모든 게 인천 역사의 ‘밑줄 쫙’이다.

 

글_유동현 굿모닝인천 편집장   사진_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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