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마이클샌들 교수가 우리나라에서 인기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그의 저술이 베스트셀러가 됐고, 그의 강의는 매우 품격높고 독특한 강의스타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런데 왜 그의 정의론이 한국에서 관심을 끌게 된 것일까.
왜 하필 ‘정의’일까. 우리나라 사람들이 과연 샌들 교수의 이론에 관심이 있어서일까. 아마도 그것은 아닐 것이다. 그의 이론은 결코 쉬운 내용이 아니다.
그가 사례를 들어 쉽게 해설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이면에는 순수철학과 법철학에 뿌리를 둔 정치철학의 깊은 담론을 담고 있다.
그 때문에 ‘정의’에 대해 한 마디의 해답을 쉽게 찾고자 책을 구입하였던 일반 독자들이라면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느끼고 결론적으로는 실망감을 가졌을 수도 있다.
오히려 우리나라가 처해 있는 정치, 사회 상황이 ‘정의’에 대한 막연한 관심을 불러온 것은 아닐까. 예컨대 이 시대 우리나라 최고의 가치는 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람들은 돈 잘 벌게 해주는 지도자를 희망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돈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어디에 표준을 둬야 할까.
어디에서 가치를 찾아야 할까. 우리는 방황할 수밖에 없다. 샌들 교수는 말하고 있다. “경제가 화두인 시대, 경제적 풍요가 최고의 선이 돼버린 상황에서 여타의 가치들은 쉽게 무시되곤 한다.
물질이 최고의 가치가 된 사회
그래서 사람들은 자연스레 가장 기초적인 가치, 도덕의 목마름을 호소한다”고.
그런데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 보면, 또 다른 큰 변화가 우리 주변에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즉 가치의 기준을 정해주는 도덕의 결핍이 우리를 매우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오랜 기간 유교적인 문화에 근간을 두고 있었고, 그 원리는 국가와 사회, 가정을 이루는 기본적인 틀이었다. 안정된 사회를 위해 이러한 정신적인 틀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왔다.
지금까지도 우리 가정에서 자식들을 교육할 때, 가장 강조하는 것은 결국 유교적인 문화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이러한 유교문화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 근엄한 가부장적인 아버지에서 친근한 아버지상으로 변하고 있고, 부부간 또는 남녀간에 차별은 이제 더 이상 환영받는 덕목이 될 수 없게 됐으며, 지금같이 능력과 효율이 강조되는 사회에서 더 이상 나이가 많다는 것만으로 어른으로 대접을 받기는 어려운 사회가 됐다.
새로운 정신문화 필요
과거에는 기본적인 삶의 표준이나 사태의 해결원리를 유교원칙에서 찾을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다. 현대사회에 잘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신적인 공황상태는 안정적인 사회형성을 해치게 된다.
선생님이 아이들을 가르칠 수 없고, 부모가 자식을 야단칠 수 없으며, 국가가 국민들을 설득할 수가 없다. 이러한 시대에 도덕을 강조하는 샌들 교수의 ‘정의론’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길을 잃고 헤매던 중 찾아낸 이정표같은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본다면 샌들 교수에 대한 국민들의 반응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단지 이는 샌들 교수나 그 이론에 환호한 것이라기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신적 공황상태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역사적으로도 나라를 세우거나 영토를 확장한 후 안정을 추구하고자 할 때, 등장하는 것은 종교였다.
그 사회의 정신적인 근간을 형성하는 원리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현 상황에서도 유교를 대체하거나 유교를 변형한 새로운 정신문화의 자리매김이 사람들에게 필요하다. 돈 중심의 사회가 된 채, 정신적인 의미를 잃어버린 사회가 된다면, 그 사회는 건강하지 못하고 강해질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재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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