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집계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소설이 사라진지 오래다. 더러 한 두 권 끼긴 하지만 그조차 온전한 소설의 힘이라고 보기 힘들다. 드라마 혹은 영화의 흥행에 힘입어 반짝 관심을 받고 있을 뿐이다. 무관치 않은 얘기겠다. 국내 저자 중 순전히 글만 써서 먹고 사는 사람은 열 손가락을 다 펴지 못할 만큼 그 수가 적다. 그중 소설을 쓰는 사람, 소위 전업작가는 굳이 열 손가락을 동원할 필요조차 없다. 신경숙, 이외수, 공지영, 김훈 정도나 그에 해당될까.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걸까. 어쩌다 우리의 소설문학이 이토록 찬밥 신세로 전락한 걸까. 이유가 있을 테다. 가만 들여다보자. 거두절미, 소설보다 현실이 더 재미있고 흥미진진하기 때문이다. 멀리 갈 것 없다. 정치만 보면 알 수 있다. 점입가경이다. 예측불허의 파행을 거듭하고, 매일 아침 코미디를 연출한다. 선거를 앞둔 요즘 최고조에 이른 느낌이다. 지금 웃기지 않으면 영원히 묻힐 것이 두렵기라도 한 듯 너도 나도 촌극을 벌인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정치현실이다.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문단 내부와 출판계도 둘러 볼 필요가 있다. 문단 내부라 하면 문학의 본령에 대한 논의여야겠지만 여기선 한 가지만 언급하기로 하자. 어찌 보면 그게 본질일 수 있다. 요는, 작가다. 어느덧 우리 문단은 ‘문창과’ 출신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탄탄한 기본기를 갖춘 문창과 출신들의 소설은 말 그대로 웰-메이드 소설이다. 딱 거기까지다. 독자들이 원하는 것은 기본기가 충실한 소설이 아니다. 보다 깊이 있고, 보다 재미있으며, 보다 다채로운 이야기가 담긴 소설을 원한다. 페이소스와 웅숭 깊은 이야기의 맛을 즐기려 한다.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세계와 당당하게 맞설 경험과 배짱을 가진 작가가 필요한 거다.
소설의 총체적 난국 그러나…
출판계는 어떤가. 영세하다거나 불황의 늪에 빠졌다는 말은 귀가 닳도록 들어왔으니 그만 하도록 하자. 요는 불황을 타개하기 위한 노력일 테다. 당장의 이익에만 눈이 멀어, 소위 좀 떴다 싶은 스타들, 특히 ‘폴리테이너’에 의존하느라 정신없다.
근래 출판계는 몇몇 대중적 인지도로 무장한 사람들에 지나치게 의존한다. 베스트셀러 목록이 입증한다. 성직자 몇몇과 김어준, 박경철, 김난도 등이 상위권을 휩쓸고 있으니 말이다. 다양하고도 참신한 기획이 보이지 않는다. 순수문학에 대한 투자는 일천하다. 스스로 제살깎기 경쟁을 하고 있는 거다.
이쯤되면 총체적 난국이란 말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섣불리 절망을 말하진 말자. 희망이 없지 않다. 찾으려 노력하고, 발굴하려 애쓰면 보인다. 역량을 갖춘 몇몇 작가들의 선전이 눈에 띄어서다. 김훈, 신경숙의 뒤를 받혀 줄 든든한 문단의 허리가 있다. 정유정, 김연수, 김영하, 천명관이 그들이다.
일찍이 묵직한 주제의식으로 문단의 기대와 독자들의 지지를 골고루 받아왔던 김연수의 느린 걸음이 어느새 독자들의 호흡을 읽어내기 시작했다. 정유정의 꼼꼼한 취재에 바탕한 탄탄한 내러티브가 독자들의 마음을 출렁이게 한다.
인간에 대한 이해를 넓혀준다
김영하의 농익은 상상력이 소설읽기의 재미를 배가시키고 있으며, 천명관의 눙치는 이야기꾼 기질이 사뭇 반갑다. 그들의 앞서거니 뒤서거니 뚝심 행보로 밀고 나아가는 한 우리 소설은 희망을 말할 수 있다. 더 박차를 가해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현실을 능가하는 소설미학의 본령을 불러내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그나저나, 소설은 왜 읽어야 하는 건가. 천만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를 꼽으라면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를 더할 수 있게 해줘서다. 겪은 것과 보이는 것만을 진실이라 믿으며 사는 건 어쩜 위험한 일일지 모른다. 소설읽기를 통해 세상사의 숱한 국면들을 겪어내는 것이야 말로 삶을 살찌우는 방법일 수 있어서다.
최준영 작가·거리의 인문학자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