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인터뷰] ‘체육계의 마이클 샌델’ 전병관 경희대 교수

체육학을 인문학에 접목, 강의 최고인기

경상남도 진주에서 ‘수호지(水滸誌)’를 탐독하던 소년이 있었다. 중학교 한문 시험시간, 10개의 문항 중 2개의 정답을 적은 소년은 나머지 답안지에 수호지 108두령의 이름을 빽빽히 한자로 적어 내려갔다. 소년은 맞은 2개의 문항에 100점을 더해 120점을 받았다.

유도를 시작한 소년은 “대표선수가 돼 메달을 따지 않으면 깡패가 되겠다”는 말을 고향에 남긴 채 도복을 메고 서울로 올라왔다. 운동하다보니 공부하기가 싫어져 체육대학에 진학했다는 청년의 패기와 솔직함을 어여삐 여긴 스승의 도움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유학이 흔치 않던 시기, 열심히 공부하고 돌아온 그는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체육인은 무식하다’는 편견에 맞서기 위해 동·서양 고전을 읽고 영시(英詩)를 외우며 다양한 삶의 지식을 학생들에게 전수하고자 열정적인 강의를 펼쳤다.

경희대학교 국제캠퍼스 내에서 최고의 인기강좌로 손꼽히는 ‘현대생활과 체육’을 강의하는 전병관 스포츠지도학과 교수(57·한국체육학회장 당선자)가 바로 주인공이다.

‘한국 체육의 마이클 샌델’이라고 일컬어지는 그의 연구실 벽면 한켠 책장은 전공 관련 서적보다 다양한 고전과 인문도서들로 가득차 있는 점이 눈에 띄었다.

그는 최고의 석학들이 모인 하버드대학교에서 명강의를 펼치는 교수의 이름을 딴 별명에 대해 “학생들이 많이 모이는 강의를 한다는 점에서 영광스러운 별명이 붙은 것 같다”며 “체육은 페어플레이 정신을 가르치는 것인데, 불의에 타협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나를 평가하고 채찍질해 준 것이라 생각하니 감사하다”고 겸손하게 말했다.

다음은 전 교수와의 일문일답.

-흔히 자연과학 분야로 알려진 체육학을 인문학과 접목시켰다는 점이 흥미로운데.

▲체육학을 자연과학이라 하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체육은 인간의 본성과 생활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인문학에 가깝다. 정신 없는 육체 활동은 없고, 최고의 육체 활동을 조작하는 것이 뇌라는 점에서 인간의 정신을 연구하는데 가장 중요한 학문이 체육학이라 본다.

단테의 ‘신곡’, 괴테의 ‘파우스트’, 톨스토이의 ‘부활’ 등 고전문학들은 좋은 인간이 되기 위한 것으로 귀결된다. 또 인간은 육체의 고통을 심화시킬수록 맑은 영혼을 갖게 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런 측면에서 문학과 체육의 목표는 동일하되 목표를 달성하는 방법이 글 또는 운동으로 다를 뿐이다.

신체 활동 만으로는 고통스럽고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좀 더 빨리 행복하고 좋은 인간에 다가갈 수 있도록 체육과 인문학을 연결했다.

-교양강좌 ‘현대생활과 체육’의 수강생이 540명에 달할 정도로 인기라 들었다. 비결은.

▲지난 2000년 이후 20~30명으로 시작한 강의가 현재 540명이 듣는 대강의가 됐다. 우리 교내 강의실에서 수용할 수 있는 최대 인원이 수강하는 것이다. 강의가 이렇게 인기를 끈 데는 현대 대학의 전공이 세분화되고 직업교육에 치우쳐 교양강좌가 많이 사라진 상태에서 학생들이 재미와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강의에서는 어떻게 직장을 구하고, 어떻게 가정을 꾸리고, 사회생활은 어찌할지, 어떤 성향을 가져야 할지에 대해 많은 시간을 할애하다보니 학생들 사이에 입소문이 났다. 또 사회에 진출한 선배들이 이 강의가 도움이 됐다고 후배들에게 권하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다.

-강좌의 내용을 간단히 소개해달라.

▲우리 사회는 짧은기간 동안 소득 수준이 높아진 대신 갈등이 많아졌다. 가족, 세대, 남녀, 지역 등 다양한 갈등이 존재하는데 특히 세대간의 갈등이 많았다. 이는 민주주의를 이룩하는데 영국은 750년, 미국은 250년, 일본은 150년 걸린데 반해 우리나라가 너무 단시간에 이뤄졌기 때문이다. 결국 단계적으로 발전하지 못한채 농경사회, 산업사회, 지식정보사회가 함께 공존함으로써 농경세대, 산업화 세대, 지식정보화 세대 등 3세대가 함께 뒤엉켜 살다보니 세대간 갈등이 발생한 것이다.

이런 갈등을 극복하고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젊은 학생들이 윗세대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고 판단해 강의에 이런 내용을 담고자 했다. 그래서 첫 시간은 우리들의 지혜와 젊은이들이 성공하기 위해 어떤 부분을 노력하며 살아야 하는지 등을 강의한다. 또 남녀간의 사랑과 성관념, 성차이 등을 강의하기도 하고, 암, 당뇨 등 질병문제는 물론 건강하게 살기 위한 양생법 등 폭넓은 내용이 펼쳐진다.

-청강생들도 많다고 들었는데 에피소드가 있다면.

▲실제로 지역 주민들이나 인근 대학교 학생 등이 종종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 어느날 수원지역의 학부모라는 분이 전화를 해 중학생 2명의 자녀들을 데리고 와 청강을 하고 싶다고 요청을 했다. 꼭 듣고 싶다고 부탁했지만 학생의 나이가 어려 거절을 했는데 결국 어느날 강의실에 아이들과 함께 앉아 듣고 갔다.

또 한번은 강의 중 학생들이 유난히 많이 웃기에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학교 앞 식당 아주머니가 강의를 듣고 있었다. 아주머니께 ‘왜 들으려 하느냐’ 물었더니 학생들이 학기초만 되면 교수님 성대모사를 해서 궁금해서 와봤다고 하더라. 워낙 수강생이 많아 졸거나 떨어지는 학생들을 잡아주기 위해 “바보”라고 약간 강한 목소리와 제스쳐로 주의를 주는데 그것이 학생들 사이에 유행어가 됐다.

-인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는지.

▲유학을 계기로 다양한 학문을 섭렵하게 됐다. 운동을 했기 때문에 전공 관련 지식은 조금만 공부해도 다 녹아 있었다. 체육인이 잘 하지 않는 문학을 하고 싶어 일본소설부터 시작해 영미 4대 시인의 시, 유명 논문 등을 듣고 외워 열심히 공부했다.

책을 읽어보니 체육학이 절대 몸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구나, 종합적인 인간학을 공부하지 않으면 좋은 인간성 기르는 인문학은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교수로 임용되던 당시 조영식 경희대 설립자께서 “운동하는 사람이 다른건 다 좋은데 책을 안 읽어서…책을 읽어야지”라고 말씀하신 것도 많은 자극이 됐다. 실제로 우리 아파트 아줌마들도 내가 경희대 교수라니 90도로 인사하다가 체육학과라고 하니 15도로 바뀌기도 했다. 이런 인식을 타파하고 싶었다.

-평소 강의 준비는 어떻게 하는지 궁금하다.

▲지나간 사람들에게 어떤 낭만적인 요소들이 있었는가, 지금은 어떤가,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을 모두 다 알아야 학생들에게 충분한 이해를 시킬 수 있다. 학생들이 책을 읽지 않는 것을 탓하지 않고, 내가 열심히 공부해서 알려주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한 달에 20여권의 책을 읽을 정도로 독서를 많이 하고, 줄거리나 핵심적인 부분을 원고지 형식의 종이에 직접 손으로 메모해 둔다. 이렇게 모아둔 메모책자가 20여권에 달하는데 이 중에서 필요한 내용을 그때 그때 발췌해 강의에 사용한다.

-교재가 없는 수업으로 유명한데, 고전적 형태의 칠판강의를 고수하는 이유가 있나.

▲파워포인트로 수업을 하면 학생들이 오랫동안 잘 기억하지 못한다. 대신 자신이 직접 손으로 쓰면 기록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어 무엇이 어디에 있다는 것을 알기 쉽다. 이야기를 스토리텔링할 수 있는 방식으로 강의를 진행해야 졸리지 않고 한번 들으면 다시 써먹는 지식이 될 수 있다. 재미난 유머로 시작해 학생들이 집중하기 시작하면 내용을 풀어나가기도 쉽기 때문이다.

또 교재가 없는 대신 궁금증을 유발할 수 있어 집중도도 높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대신 시험은 ‘사랑은 무엇인지’, ‘청춘은 무엇인지’ 등 철학적인 질문과 실용적인 물음을 섞어 출제하는데 해답보다는 강의를 들은 사람이 이해하고 답을 써 낼 수 있도록 준비한다. 채점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500여장의 시험지를 일일이 다 읽어보고 평소 조교들이 체크한 수업태도 등을 합산해 점수를 준다.

-제23대 한국체육학회장에 당선돼 내년 임기를 시작한다. 변화와 개혁, 발전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운영방향과 목표는.

▲체육의 공부는 뭐니뭐니해도 운동이다. 체육대학은 그동안 생리학, 해부학 등 조금만 알아도 되는 분야에 너무 치중해 운동을 통해 좋은 인간성을 기르는데 소홀했다. 좋은 기술을 가지기 위한 연구보다는 연구를 위한 연구, 다른 학과목의 주변 연구가 주가 됐다.

따라서 앞으로 체육학은 체육에 필요한 좋은 인간성, 기술을 발달시킬 수 있는 연습법 등을 연구해야 한다. 특히 학자의 개념에 대해 변화가 있어야 한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들이 사회에 공헌할 수 있도록 학자들이 스포츠의학이나 사회학 등에 대해 조언하고, 공부시키는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체육의 주역은 실제 엘리트선수들이 되고 학자들은 보조자 역할을 하는 체육사회를 만드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선수들을 가르치고 보조해 이들로 하여금 국민들에게 도움이 되고, 실질적으로 뛰는 체육을 만드는 것이 학자라는 개념으로 패러다임을 바꿔보겠다.

-마지막으로 체육인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체육인들에게 실력을 쌓으라고 강조한다. 체육행정, 외교, 스포츠의학, 마케팅 등 분야가 세분화되면서 전문가시대가 도래했다. 과거에 비해 전공을 살리는 기회가 많아진 만큼 대학생들도 형식적인 스펙 대신 실질적인 실력을 쌓아야 한다.

‘강이 맑으면 만리로부터 기러기가 와서 머물고(江淸萬里鳩長在), 꽃이 만발하면 아무리 깊은 정원에도 나비가 스스로 찾아온다(花發深園蝶自來)’는 말처럼 실력을 키워 좋은 평판을 받으면 어디서든 인재를 찾게 돼 있다.

대담=황선학 지역사회부장 2hwangpo@kyeonggi.com

정리=이지현기자 jhlee@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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