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흠모하되 넘어서라

화가에게도 사랑하는 화가들이 있다. 물론 이때 사랑의 대상은 존경하는 선배 화가들이다. 그중에는 이미 하늘의 별이 된 화가도 있고, 살아 있는 화가도 있다. 뛰어난 선배 화가는 ‘샘이 깊은 물’이다. 쉽게 마르는 법 없이 부단히 영감을 자극한다. 후배 화가는 선배의 색다른 작품세계로 조형의 신천지를 만나고, 그 영향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또 한명의 위대한 화가로 거듭난다.

인체의 왜곡과 생략으로 인간 존재의 심연을 탐구했던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 그는 빈센트 반 고흐의 열렬한 팬이었다. 고흐의 그림을 재해석하는 도상학적 테마를 빈번하게 다룰 정도로, 고흐에 대한 경외감이 대단했다. 같은 구상화가로서, 베이컨은 고흐의 그림이 포착한 삶의 리얼리티에 깊이 매혹되었다.

이런 베이컨의 영향을 받은 화가로 데이비드 호크니가 있다. 인체를 그림의 가장 아름다운 주제라고 생각했던 만큼 호크니는 젊은 시절 베이컨 그림에 표현된 벌거벗은 형상에 매료되었다. ‘3월 24일 이른 시간에 차차춤’(1961)은 베이컨 식의 뭉개지고 일그러진 인체 표현기법과 화면구성을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조형언어는 없다. 새로운 조형언어는 그림과 그림 사이에서 태어난다. ‘화가는 창을 통해서 자연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선배나 스승의 작품을 통해서 자연을 보기’(리오넬로 벤투리) 때문이다. 18세의 베이컨이 입체파의 거장 피카소의 데생을 보고 작업 충동을 느껴, 화가의 길로 들어선 것처럼 화가들은 선배 화가들의 작품을 통해 세상 보는 법을 배운다. 그래서 풋내기 시절의 그림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화가의 스타일이 문신처럼 흔적을 남긴다.

화가는 선배의 작품 통해 세상을 본다

고흐가 평생 흠모한 화가는 장 프랑수아 밀레였다. 밀레처럼 농민의 화가가 되고 싶었던 고흐는 생레미 요양원에서 밀레의 ‘씨뿌리는 사람’(1850)을 무려 스물한 번이나 따라 그릴 정도로 밀레의 그림과 삶에 매료되었다. 그의 ‘씨뿌리는 사람’(1888)은 밀레의 작품을 모사했으면서도 고흐 특유의 꿈틀거리는 듯한 붓질이 살아 있다. 고흐의 이 그림과 밀레의 그림을 비교해보면 한 화가가 어떻게 선배 화가의 그림과 만나서 자기 개성을 찾아가는지, 그 과정을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밀레는 우리의 ‘국민화가’ 박수근의 빛이기도 했다. 박수근이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데는 어린 시절에 접한 밀레의 ‘만종’의 영향이 컸다. 주어진 운명에 순종하는 사람들과 시골의 풍경을 화폭에 담아낸 박수근의 작품세계는 따라서 자연을 찬미하고 신의 은총을 재발견하고자 한 밀레의 작품세계와 통한다.

또 표현주의적인 화풍으로 강렬한 필력을 구사한 이중섭은 어떤가. 유학시절 별명이 ‘루오’였을 만큼 굵고 거친 붓질이 돋보이는 초기 그림들은 야수파 화가 루오의 영향 아래 있었음을 뚜렷이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온가족이 강강술래를 하는 듯한 ‘춤추는 가족’(1953~54)은 마티스의 ‘춤’(1910)과 상당히 닮은, 조형적인 유사성을 띠기도 한다. 비록 이 그림이 이중섭 특유의 원형적인 미의식의 연장선에 있다는 견해가 있긴 하지만 선배 화가 마티스를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 영향 극복하며 예술적 독립 성취

새내기 화가는 눈으로 보는 것조차 배운다. 초기에는 선배 화가들이 보았던 것처럼 볼 수밖에 없다.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의 말투 흉내 내기를 통해 말하기를 배우는 것처럼. 화가들은 선배 화가의 작품과 세계관을 통해서 조형언어를 배우고 익히며 마침내 조형적인 독립을 성취한다. 이런 과정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보다 영향의 철저한 자기화다. 흠모하되 넘어서야 한다. 선배 화가의 열정에 힘입어 자기 세계를 구축한 화가는 다시 후배 화가들의 뜨거운 빛이 된다.

정민영 출판사 아트북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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