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인터뷰] 이화숙 2012 런던 패럴림픽 양궁 금메달리스트

긍정의 땀방울에서 얻은 값진 메달

2012 런던 패럴림픽에서 금메달 1개와 은메달 1개를 따내며, 국민들에게 진한 감동을 선사했던 ‘장애인 양궁계의 살아있는 신화’ 이화숙(47·지체 3급) 선수를 지난 18일 수원시체육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감각이 돋보이는 보라색 뿔테 안경에 흰색 티셔츠와 조끼, 면바지를 편안하게 차려입은 이화숙 선수는 마흔일곱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주름살 한점 없는 ‘동안’ 외모에 밝고 명랑한 미소가 멋스러운 여성이었다.

‘그늘’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너무나도 밝은 모습에 손에 쥔 목발만 없으면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이화숙 선수와 반갑게 인사를 나눈 뒤 본격적인 인터뷰에 들어갔다. 이화숙 선수는 밝은 ‘첫인상’만큼이나 긍정적인 사고를 갖고 있으면서도 뜨거운 열정으로 가득한 사람이었다.

이화숙 선수가 10여 년 간이나 세계 정상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원동력은 아마도 ‘긍정의 힘’과 ‘뜨거운 열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을 비우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자’는 긍정적인 좌우명과 ‘후배들을 위해 양궁에서 은퇴한 뒤 사격에도 한번 도전하고 싶다’고 밝힐 만큼 못 말리는 열정을 가진 그녀, 이화숙 선수를 만나봤다.

-2004년 아테네와 2008년 베이징에 이어 런던 패럴림픽에서 금메달 1개와 은메달 1개를 획득했다. 소감은?

정말 ‘하늘을 나는 기분’이라고 할 만큼 기쁘고 감사하는 마음이다. 사실, 런던 패럴림픽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서 동고동락했던 코치 대신 외부 코치가 대표팀으로 영입되면서 갈등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결국 계속된 갈등 끝에 코치 없이 런던 패럴림픽에 참가하는 최악의 상황이 연출됐고, 이 과정에서 컨디션도 최악으로 떨어졌다. 여기에 고질적인 어깨 통증까지 겹치면서 사실상 메달을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팀 동료와 함께 참가하는 단체전에서 ‘피해만 주지말자’는 생각으로 경기에 임했다.

그런데 개인전에서 예상 밖의 은메달을 따내면서 좋은 흐름을 탔고, 고희숙·김란숙 등 ‘숙자매’들과 함께 참가한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거는 기대 이상의 성적을 거두게 됐다. ‘마음을 비우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자’는 좌우명을 되새기며 한발 한발 최선을 다해 쏜 것이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나 싶다.

- 위기의 순간도 많았을 텐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를 꼽는다면.

많은 위기의 순간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네덜란드 선수와 맞붙었던 개인전 8강전 경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날따라 어깨 통증이 심해 제 기량을 발휘하기 어려웠다. 여기에 2엔드까지 0-4로 일방적으로 몰리면서 내심 경기를 포기하기 직전 상태까지 갔던 것 같다.

그때 안태성 감독님이 웃는 얼굴로 어깨가 축 쳐져 있는 내게 오시더니 “화숙아, 뭘 그렇게 부담을 갖냐. 져도 돼. 그냥 지금부터 시작이니까 한발 한발 끝까지 최선을 다하고 내려와”라고 조언을 해주셨다. 그 말을 듣고 난 뒤 ‘그래 이제부터 시작이야’라는 생각이 들면서 왠지 모르게 힘이 솟는 게 느껴졌다.

결국, 3엔드에서 쏜 세 발의 화살이 모두 10점에 꽂히면서 감각을 찾았고, 4엔드마저 30점 퍼펙트를 기록하면서 동점을 만들었다. 내가 연속 퍼펙트를 쏘는 것을 보더니 상대도 심리적으로 크게 흔들리는 것 같았다. 결국 5엔드마저 승리하고 결승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전율이 올만큼 아찔한 순간이었다.

-양궁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나.

3살 때 소아마비를 앓으면서 장애를 갖게 됐고 이후 지난 1998년 결혼과 동시에 재활을 위해 서울 정립회관을 찾았다가 양궁을 접하게 됐다. 원래는 사격 강좌에 참가하려 했는데 이미 접수가 마감되는 바람에 자리가 남아있던 양궁을 배우게 됐다.

그때 사격 강좌에 자리가 남아있었더라면 아마 사격으로 세계를 제패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웃음). 원래 뭘 하나 시작하면 몰두하고 열심히 전념하는 성격이다 보니 아들을 낳고 가정주부로 생활하면서도 한 번도 양궁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대담하고 밝은 성격에 손재주가 있는 내게 양궁이라는 종목이 참 잘 맞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결국, 양궁에 입문한 지 3년 만인 지난 2001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개인전 금메달, 단체전 금메달을 따냈고, 그 이후 세계 신기록들을 수차례씩 갈아치우고 3차례의 올림픽을 거치면서 오늘날까지 오게 됐다.

올해로 47살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인데 4년 뒤 올림픽에 다시 한번 도전해야 하나, 아니면 후배들을 위해 대표팀 자리를 물려주고 그때 하지 못했던 사격에 한번 도전장을 내밀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다. 새로운 분야인 사격에 도전해보는 것도 정말 재밌을 것 같다.

- 이천 장애인종합훈련원이 생긴 이후 치른 첫 패럴림픽이다. 간단하게 총평한다면.

몸 관리를 위해 개인적으로 병원을 찾아야 했던 과거에 비해 여건이 많이 좋아진 게 사실이다. 장애인들을 위한 기본적인 편의시설은 물론 선수들의 체계적인 몸 관리를 위해 필요한 물리치료실 등 최적의 시설을 갖추고 있어 정말 편하게 운동할 수 있었다.

나도 어깨 통증 때문에 매일 물리치료실을 전세 내다시피 했으니 이천 장애인종합훈련원의 큰 수혜자라 할 수 있다.(웃음) 선수들이 운동을 마친 뒤 차 한잔 마시면서 쉴 수 있는 마땅한 공간이 없다는 것 이외에는 거의 흠잡을 것이 없는 것 같다.

- 고마운 사람과 후배 등에게 하고 싶은 말

우선, 저에게 양궁은 물론 ‘성실과 겸손’이라는 인생의 교훈을 가르쳐 주신 박용석(전 대한양궁협회 부회장) 선생님께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또 위기의 순간마다 진심 어린 조언으로 격려해주신 안태성 감독님과 출국 전 선수촌을 방문해 ‘원포인트’ 레슨을 해주신 장영술 국가대표 감독님, 그리고 개인 훈련을 할 수 있도록 운동장 사용을 허락해주신 한용규 경기체고 교장 선생님께도 감사의 말을 전한다.

또 체육을 하는 후배들에게는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성실한 자세로 꾸준하게 해야 한다’는 조언을 해주고 싶다.

장애인 선수층이 얇다 보니 조금만 하면 금방 정상에 오를 수 있다고 착각하는 후배들이 많다. 그렇다 보니 조금 하다가 안된다 싶으면 쉽게 포기해 버리는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세계 각국의 우수 선수들과의 경쟁에서 이기려면 남다른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꾸준하게 정진해 줬으면 좋겠다.

끝으로 장애를 가진 체육인의 한 사람으로서 장애인 체육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가져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세계 정상급의 기량을 갖추고도 생계의 어려움 때문에 꽃을 피워보지 못하는 후배들이 정말 많다. 실업팀까지는 어렵다고 할지라도 우수한 선수가 생계의 어려움 때문에 운동을 접는 일이 없도록 지자체나 체육회 소속 선수로 활동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대담= 정근호 체육부장

정리=박민수기자 kiryang@kyeonggi.com

사진=추상철기자 scchoo@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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