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레미제라블’의 또다른 이름 ‘사랑으로’

노도처럼 흘러가는 시간 속에 내던져진 개인의 삶은 나룻배처럼 격랑에 휩쓸려갔지만 유일한 탈출구는 오직 사랑이었다. 조건 없는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한 가톨릭 사제의 따뜻한 배려는 절망하는 한 인간을 어둠에서 밝은 빛으로 이끄는 원동력으로 승화된다. 1862년 프랑스에서 발간된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Les Miserables)이 바로 그 사랑을 나타내고 있다.

소설 속 장발장은 빵 한 덩어리를 훔친 죗값으로 19년간의 형벌을 받고 풀려나지만 프랑스 대혁명 이후 전개된 혼돈의 시대에서 방황한다. 성당에서 다시 물건을 훔쳐 달아나는 죄를 저지르고 붙잡히지만 미리엘 주교의 종교애적 사랑에 구원을 받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참혹한 운명을 지닌 장발장은 신분을 속이고 산업혁명의 와중에서 시장으로, 기업의 대표로 출세하지만 운명의 여인 판틴을 만나게 되고, 그로 인해 그녀의 딸 코제트를 양녀로 키우게 된다. 또한 1832년 6월 공화파의 무장봉기에서 양녀 코제트를 사랑하는 혁명가 마리우스의 목숨을 구하는 헌신적 사랑을 실천한다.

그의 인간적 가치를 존중하는 인간애적 사랑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에서 비롯된다. 그가 가톨릭 사제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러한 희생적 사랑은 없었을 것이다. 절망 속에서 종교적 사랑의 힘으로 정신적 구원을 받았던 장발장은 한없는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다 하느님의 품에 안기며 눈을 감는다. 그래서 소설 레미제라블의 또 다른 이름이 ‘사랑으로’라고 생각된다.

지난주 휴 잭맨 주연의 레미제라블이 극장가에 개봉되었다. 2012년 말 최고의 흥행을 기록하고 있는 레미제라블은 최근 선거로 분열된 우리 사회를 다시 결속시킬 좋은 소재가 되고 있다. 소설 속 장발장의 행동에는 시종일관 가톨릭의 사랑이 근저에 깔려 있었다. 어찌 보면 종교적 색채가 강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우리의 마음에 진정한 화해와 용서의 샘을 가져다주는 것은 사랑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수단이자 목적이 종교가 아니겠는가! 지난 12월 19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 후폭풍은 우리 사회를 세대별로 분열시키고 있다. 편가르기와 상호 비방은 프랑스 혁명기의 혼돈과 다를 바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장발장의 무한한 사랑과 희망이 자베르 경감의 가혹한 정의를 굴복시켰듯이 우리의 계층간 불화도 슬기롭게 극복되리라 믿는다.

최근 레미제라블의 인기가 다시 치솟고 있다. 지난달 뮤지컬 레미제라블이 공연을 시작했는가 하면 출판계에서도 난리다. 이러한 풍조는 결코 최근 우리 사회의 혼란상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여 해묵은 감정을 털어내고 서로 화합하라는 교훈을 던져주는 것은 아닐지? 레미제라블의 또 다른 이름이 ‘사랑으로’라는 첫 번째 이유가 소설 속의 사랑이라면, 사랑을 현실에 반영하고 실천하라는 것은 두 번째 이유다.

대통령 선거는 끝났다. 과거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위기를 얼마나 슬기롭게 대처하느냐가 향후 국운을 좌우한다. 내 잣대를 갖고 자베르 경감처럼 맹목적으로 내 주장만을 내세워서는 발전이 없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사랑을 실천하여 분열된 사회를 포용과 통합으로 이끌 수 있는 장발장이 더 중요하다. 새해에는 분노와 증오로 소외된 질곡의 시간에 빠져드는 것보다 레미제라블의 줄거리처럼 사랑을 실천하고 화합을 이루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진 종 구 환경안보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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