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쌀 퍼주기 경쟁

얼마 전 고향집에 들렀다. 고향집을 홀로 지키고 사는 노모가 무척 심란한 표정을 짓고 계셨다. 사연인즉, ‘큰애기(처녀) 적 한 마을 동무였던 엄마’가 읍내 병원에 입원하고 있어서 그렇단다.

팔십 노인들이 입원하는 거야 으레 늘 있는 일이지만, ‘ 엄마’가 입원하자 어머니는 더욱 마음이 편치 않으신 모양이었다.

“병문안 갔다 온 넘들(남들) 말 들은께 배에 물이 찼는지 맹꽁이 배맨치로(배처럼) 부풀어 올랐다는디, 얼마나 더 살란가 모르제….”

어머니는 옛 동무의 말년이 안타까워서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불쌍해서 으짠디야. 워낙 읎는 집으로 시집와서 자식들 갈치도 못허고 지구나다(가까스로) 국민핵교에 못 보냈는디, 그려도 그 자석들이 매달 생활비 보내줘 후불(노년) 치레는 했는디….” 지난 겨울에 집에 갔을 때 ‘ 엄마’ 가 집에 오셨다. 거동이 불편하신 노모를 보러 날마다 우리 집에 들르신단다. “나도 여그저그 안 아픈 디가 읎제만 느그 엄매가 더 걱정이여. 모실(마실)도 못 댕기니….”

그러면서 ‘ 엄마’는 내 손을 다정하게 잡으며 치사를 아끼지 않았다. “바쁜디 일부러 어무니 보러 와 주어서 고맙다잉. 부모가 늙은께 인자다 자식들 짐이네.” ‘ 엄마’는 어머니보다 우리 동네에 시집을 조금 늦게 왔다. 그런데 할머니 친정이랑 먼 일가가 되는 모양이었다. 할머니는 ‘ 엄마’의 시댁 사정을 잘 아는지라 무척 안타까워하셨다. “우리 마을로 시집 올 거믄 나헌티 시댁 사정 먼저 물어보고 오제. 거그다가 우리 메느리가 지 큰애기 때 동무였담시롱….”

우리 부모 세대는 얼굴도 보지 않고 결혼했다. 고등학교 졸업반 때 선친은 6•25를 만나 그 이듬해인가 입대를 했다. 나중에 휴전은 되었지만 아직 군문에 있을때 고향에서 약혼할 이의 사진이 왔는데, 어머니는 사진이 없어 친구 사진을 보냈다고 한다. 아마 ‘ 엄마’도 시댁 사정을 잘 알아보지 않고 시집을 왔나보다.

어쩌면 농촌 살림살이가 다 거기서 거기겠지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결혼 풍속도는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얼굴도 제대로 보지 않고, 집안 사정도 잘 살피지 않고 결혼한 세대가 있는가 하면 죽기 살기로 사랑하다가 결혼하는 세대도 있다. 할머니는 ‘ 엄마’가 마을에서 가장 어렵게 사는 집에 시집 온 게 마음에 걸리셨다. 그래서 며느리 몰래 늘 부엌의 ‘좀두리쌀’을 퍼다 주셨단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뒤주에서 박 바가지에 쌀을 담아 시어머니 몰래 퍼다 주셨단다. 그 당시 농촌 사정은 거기서 거기였다.

하지만 우리 집은 상대적으로 그 집보다 나아서 오랫동안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쌀 퍼주기 경쟁이 이어졌다. 서로 알고도 모른 체하면서…. 본디 5월 8일은 어머니날이었다. 어머니날이 어버이날로 바뀐 지 제법 오래 되었다. 이렇게 바뀐 건 아마 5월 8일 하루가 어머니날이라면 1년 가운데 나머지 364일은 아버지날이라고 큰소리 치던 아버지들 때문인 듯싶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 이게 뭘까? 부모도 누구의 부모가 되고 싶어 된 건 아니다. 자식도 마찬가지이다. 누구의 자식이 되고 싶어 된 이는 없다.

심지어는 세상에 태어난 것도 자식 탓은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 갈수록 부모 자식 간의 사이가 수상쩍어지고 있다. 5월을 흔히 ‘가정의 달’이라고 일컫는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성년의 날이 다 5월에 들어 있다. 한 달에 그런 날이 다 들어 있는 건 어쩌면 이 달 만이라도 가정, 나아가 가족에 대해서 생각해보자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박상률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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