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구별짓기, 취향, 기억

오래전 기억이다. 일요일 아침 8시에 늘어져 자고 있는 내게 퉁명스럽고 짜증난 목소리의 전화가 왔다. 예비군 중대에 근무하는 방위병인데 예비군 훈련통지서를 내게 전달하려 해도 전달할 방법이 없었다며 “왜 그렇게 통지서를 전달할 수 없느냐?”며 불평을 쏟아냈다.

통지서는커녕 아무런 메모조차 전달받지 못했던 나는 어떻게 이 시간에 무례한 전화를 할 수 있느냐며 화를 냈고 결국 말싸움으로 이어졌다. 혈기를 주체 못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인데, 그 대가는 가혹했다. 얼마 뒤 날아 온 동원예비군 통지서에는 훈련지가 서부전선 최전방 어느 부대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꼼짝없이 3박 4일을 그곳에서 보내게 되었는데, 애당초 그곳에서 훈련을 받게 되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전의 동원예비군 훈련은 동네에서 가까운 곳에서 편하게 받았었는데 낯선 곳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고생하게 되었으니 나로서는 방위병의 보복(?)으로 여길 여지가 많았다.

버스가 몇 시간 달려 도착한 그곳은 내가 제대한 동부전선 전방부대에 비해서도 나은 구석을 찾기 힘든 곳이었다. 닳아빠진 텐트 속에서 먹고 자며 낮에는 뙤약볕, 밤에는 추위와 싸우다보니 현대식 막사에서 생활하던 예전 훈련이 천국 같았다. 사격, 전술훈련 등은 별 일 아닌데 식사가 번거로웠다. 총 메고 철모 쓰고 밥과 국을 타서 나무 그늘 밑에 쪼그려 앉아 홀로 꾸역꾸역 먹어야 하는 신세가 처량했는데, 식사 때마다 둘러 앉아 왁자지껄하게 밥을 먹는 예비군들이 있었다.

그들은 ‘사제’김치는 물론 제육볶음, 장조림, 닭발, 멸치볶음, 무말랭이, 삶은 계란, 튀김, 쌈장과 상추, 마늘 등등 얼핏 보아도 10여 가지가 넘는 온갖 반찬을 늘어놓고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어떻게 제대로 된 반찬 없이 밥을 먹을 수 있느냐”며 주변에 합류하기를 큰 목소리로 강권하는 그들의 모습이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다. 식사 때마다 벌어지는 일이라 본의 아니게 그들을 관찰하게 되었는데, 대체로 그들은 같은 동네에서 자란 친구들로서 자신들이 자란 지역에 계속 사는 토박이들이었다.

산해진미는 아니더라도 산속 군부대에서는 도저히 구할 수 없는 다양한 먹거리로 식사를 즐기는 이들을 보니 예전 우리 집에 세 살던 할아버지가 생각났다. 할아버지는 일생을 막노동으로 살아온 분으로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 우리 집의 건넌방에서 홀로 사셨다. 사실 홀로 사셨다는 표현이 적절하지는 않다. 미니 2층이던 우리 집의 반 지하 방에는 할아버지의 딸과 사위 내외가 살고 있었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건넌방에서 홀로 지내시던 할아버지는 언제나 단정한 넥타이 차림이었다.

어쩌다 일이 생겨 날품팔이를 하실 때를 제외하면 집 앞 구멍가게의 기다란 의자에 앉아 쥐포에 소주를 비우실 때도 그랬고 한 여름 동네 놀이터에 손녀를 데리고 가실 때에도 늘 넥타이를 하고 계셨다. 어른이 되고 나서 넥타이가 얼마나 귀찮은 것인지를 알게 된 후 언제나 넥타이를 하고 계시던 할아버지는 얼마나 불편했을까 종종 생각하곤 했다. 지금 생각하니 그 할아버지는 평생 대우받지 못한 막일꾼으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떨쳐버리고 싶으셨기에 노년에나마 넥타이로 옛날의 자신과 구별 지으려 하셨나 보다 짐작할 뿐이다.

예비군 훈련장에 온갖 반찬을 가져와 왁자지껄하게 먹어대던 동네 친구들의 모습, 집안에 혼자 있을 때도 넥타이를 항상 매고 계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은 전혀 달라 보이지만 결국 남과 자신을 구별 짓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된 행위가 아닐까 싶다. 두 에피소드는 남의 시선을 끊임없이 의식하고 비교하는, 그래서 일상의 행복이나 만족마저도 다른 이의 평가를 통해 검증받으려는 우리의 의식구조가 적나라하게 반영된 경우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김상엽 건국대 연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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