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시론] 우리는 왜 항상 바빠야만 하는가

우리는 너무 바쁘다. 자라면서 항상 시간에 쫓겨서 자라고, 그렇게 길들여진 우리는 다시 우리의 아이들을 바쁘게 한다. 사색이라는 것을 모르고 학교에서 학원으로, 학원에서 집으로의 바쁜 일정을 반복하는 요즘 아이들….

어른이 되어서도 별반 달라질 것은 없다. 집에서 직장으로, 직장에서 회식으로, 고주망태가 되기 직전에 귀가하고 다시 흐릿한 정신으로 똑같은 일상을 반복한다.

모두 바쁜 것을 추구하는 시대다.

‘바쁘게 산다’라는 명제가 세상 곳곳에 깔렸고, 요즘 시대에 바쁘게 산다는 것은 마치 우리 자신이 매우 중요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주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러한 느낌은 순간적으로 만족감을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 자신을 ‘나’라는 한 사람으로 정확하게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진정한 ‘나’를 무시하게 할 뿐 아니라 직장인 또는 학생 개개인의 삶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해 본다거나 진정한 의미를 찾아볼 수 없게 방해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 급히 뛰어가고 있어서 멈출 수도 없고, 고작 반복되는 이야기와 행동들, 떠밀리듯 밀려드는 요구 사항에 답하고, 하찮은 일에 몰두하고 있느라고 늘 바쁜 것이다. 그저 열심히 의미도 모른 채 열심히 살았는데 해놓은 게 없다고 스스로 자조한다. 늘 ‘조금만 더 고생하면, 조금만 더 고생하면….’ 행복을 즐길 수 있으리란 생각에 현재의 자신을 극단으로 몰아가는 모습이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다음의 짧은 일화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한 탐험가가 아프리카 오지를 사냥술과 전설적인 용맹함으로 무장된 마사이족을 대동하고 탐험하고 있었다고 한다. 한참을 긴장감 속에서 행군하고 있다가 탐험가는 문득 자신이 외로운 선두주자로 정글 속에 혼자 남겨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마사이족들은 한참 뒤에 떨어져서 불안한 눈빛으로 따라오고 있었다. 탐험가는 그들에게 왜 그렇게 뒤쳐져 있느냐고 물으니, 마사이족은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짓고는 더듬거리며 “마음이 뒤에 있어서요” 라고 대답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자, 마사이족은 분명한 목소리로 “우리는 너무 빨리 전진하고 있어요. 그래서 몸은 앞으로 가고 있지만, 마음은 저 뒤에 따라오고 있답니다. 마음을 뒤에 둔 채 몸만 앞으로 나갈 수 없지 않습니까? 마음이 따라올 때까지 잠시 기다려야 합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비 온 뒤에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갠 하늘, 어둠이 내리기 직전, 석양의 투명한 빛…. 자연의 아름다움과 신비를 그저 무감각하게 흘려버리는가. 주어진 아름다움과 신비를 우리는 한 생애를 통해 몇 번이나 바라보며, 놀라움을 느낄 수 있는지.

사는 즐거움은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그 즐거움은 누가 가져다주는가. 우리는 우리 세상 어디쯤 와 있는가. 우리의 삶의 가치는 어디에 두고 있는가. 따뜻한 가슴은 어디서 오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인간이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그 누가 내일 죽음이 닥칠지 알 것인가.

우리는 왜 항상 바빠야만 하는가? 우리는 늘 바빴다. 영문도 모른 채 그냥 하루하루 눈코 뜰 새 없이. 그리고 내일도 아마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눈을 뜨면 어려서부터 항상 그래 왔듯, 열심히 최선을 다해 바쁘게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정신없는 삶 속에서도 내가 무엇을 위해 이렇게 바쁘게 뛰고 정신없이 살아가는지 회의감을 느낀다면, 그때는 한 번쯤 발걸음을 멈추고 하늘 한번, 지평선 한번, 그리고 우리의 두 발을 한번 내려다보며 생각할 여유를 가져보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으면 우린 그저 이유없이, 커다란 바람도 없이 무작정 또 바쁘기만 할 테니까.

내 소망은 단순하게 사는 일이다. 내 느낌대로 자연스럽게 살고 싶다. 그 누구도 내 삶을 대신해서 살아줄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나답게 살고 싶다.

공경호 오산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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