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선옥서 개명후 세계선수권 3관왕… ‘제2의 인생’도 스트라이크
그녀가 성씨를 황씨에서 류씨로 바꾼 것은 류씨 성을 가진 아버지가 어렸을 때 대를 이을 자식이 없는 황씨 집안으로 입양돼 성씨를 바꾼 뒤, 입양가정에서 후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황씨 성을 유지해 그의 자녀들도 황씨 성을 갖게 됐고, 태어나면서 황선옥이 된 것이다.
그러나 지난 3월 아버지가 황씨와 류씨 가정의 형제들과 상의해 류씨 성을 되찾으면서 황선옥도 ‘류서연’으로 바뀌게 됐다. 지난 25년 동안을 ‘황선옥’으로 살아오면서 2009년 세계선수권대회 2관왕과 광저우 아시안게임 4관왕 등 화려한 성적을 남겼던 그녀는 개명뒤 처음 출전한 지난달 2013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개인전과 3인조전, 5인조전에서 우승하며 3관왕에 올라 새로운 인생의 출발을 세상에 알렸다.
국내 볼링계에서는 유일하게 아시안게임 총 5개의 금메달, 세계선수권 금메달 5개, 전국체전 볼링 최초 4관왕 등 각종 기록을 세우며 제2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류서연을 지난 12일 오후 수원 퍼펙트볼링장에서 만났다.
Q. 새로운 이름으로 세계선수권 3관왕에 올랐다. 특히,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개인전까지 우승해 감회가 남다를 텐데 어느정도 성적을 예상했나.
A. 이번 대회가 여러가지 상황에서 타이밍이 좋지 않아 성적을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메달에 대한 색깔 구분없이 5인조전에서 1개 정도의 메달을 생각했는데 운이 좋았던것 같다. 개인전에서 처음으로 우승할 수 있었던 것은 특히 많은 운이 따라줘 가능했다고 본다. 대회 기간 중에는 ‘류서연’이라는 이름으로 우승한 것에 크게 기분을 느끼지 못했는데, 개명 후 첫 세계대회 경기가 잘 풀린 것이 이름 덕도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Q. ‘황선옥’이란 이름을 버리고 ‘류서연’으로 개명을 할 때 충격이나 서운함은 없었나. 25년을 살아온 이름을 포기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A. 아버지로부터 이미 가족사에 대해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충격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한 이름으로 25년을 살아봤으니, 이왕 새로운 이름으로 바꿀 것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바꾸고 싶었다. 성씨와 개명에 따른 부담감은 없었는데, 개명의 이유에 대해 주변 사람들에게 일일히 반복 설명하는 것이 오히려 더 번거롭고 귀찮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감수해야 하는 것 아닌가.
A. 초등학교 6학년 때 시니어 볼링을 하시던 아버지의 지인인 한 할머니께서 제 체격을 보시고 권유해 부모님의 뜻에 따라 중학 1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볼링을 시작했다. 3~4년 동안은 볼링에 재미를 느껴 학교 수업을 마치고 밤 10시까지 정말 열심히 훈련했다. 부모님이 운동을 처음 시작할 때 ‘어설프게 하려면 아예 시작도 하지말라’고 말씀하셨기에 가끔씩 운동이 힘들고 포기하고 싶을 때는 그 말씀을 되새기며 마음을 고쳐 잡았다. 특히 성적이 부진할 때 그런 생각이들곤 하는데 볼링 선수가 내 직업이고, 그동안 고생해온 과정이 아깝다는 생각에서 책임감과 의무감을 갖고 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Q. 고교 2학년 때 최연소로 국가대표가 됐고, 그해 전국체전에서 종목 최초로 4관왕에 올랐다. 고교 졸업 후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실업팀에 입단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A. 당초 이화여대에 진학하려고 했는데 볼링 특기생 선발이 중단됐다. 한국체대에 입학이 예정됐었지만 따마침 아버지가 다니던 회사의 경영 악화로 실직을 하면서 동생 두명을 포함한 가정의 살림을 책임져야 했다. 당시 천안시청에서 고졸대우 최고인 3천500만원을 제시해 실업팀을 택하게 됐다. 천안시청에서 2년간 생활한 뒤 충북도청으로 팀을 옮겨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서 3인조전 금메달을 따냈고, 2009년 세계선수권서 2관왕에 오르며 다른 실업팀들의 많은 입단 제의를 받았다.
Q. 좋은 조건의 많은 실업팀들을 뒤로하고, 평택시청으로 진로를 바꾼 것은 학생시절 은사인 오용진 현 감독과의 의리 때문이라는 소문이 맞는가.
A. 오 감독님이 2009년 평택시청 감독으로 부임하신 뒤 전 소속팀에 1년 뒤에는 반드시 평택시청으로 가겠다고 의사를 밝혔다. 당시 다른 팀들 중 실업선수 최고액을 제시한 팀도 있었지만 돈보다는 의리를 지키는 선수가 되고싶었다. 충북도청에서 1년 뒤 이적동의서를 떼주지 않으면, 최악의 경우 국가대표팀에서만 경기를 나가려고 배수진을 치기도 했다. 다행히 충북도청의 양보로 평택시청에 들어와 오 감독님과 함께 할 수 있어 다행이다. 또한 김선기 시장님을 비롯한 평택시 관계자들의 많은 관심과 지원에 감사드리며, 고향에 오길 잘 했다고 생각한다.
A. 언론이나 국민들 모두 인기 종목 선수와 얼굴이 많이 알려진 선수들에게만 관심을 보이는 것이 서운했다. 비록 내가 인기 스포츠스타나, 얼짱, 몸짱은 아니더라도 아시안게임 최다관왕인데 인기 선수들 들러리로 세워놓고 회견을 하는 것에 많이 속상했다. 성적보다는 외모나 인기 위주로 평가해서는 안된다. 볼링이 올림픽 종목이 아니라서 홀대 받는 것도 있다. 어차피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위해 운동하는 것이 아닌만큼 개의치 않고 내 갈길을 가면서 볼링의 대중화에 기여하고 싶다.
Q. 평소 어머니를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실업 입단후 연봉과 포상금, 연금 등으로 수입도 꽤 될텐데 이 모든 것은 누가 관리하나.
A. 광저우 아시안게임 후 모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어머니를 가장 존경한다고 했더니 아버지가 삐치셨다.(웃음) 두 분 모두 내가 가장 존경하고 소중한 분들이다. 특히 어머니는 힘든 상황 속에서도 항상 긍정적이시고, 다른 사람과 잘 어울리시면서 많은 얘기를 들어주신다. 평소 부정적이고, 개인적이며 잘 참지 못하는 내 성격과는 정 반대이시기에 나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시는 어머니가 존경스럽다. 연봉과 연금, 포상금 등 모든 수입 관리는 어머님이 하시기 때문에 나는 얼마를 벌었는 지 잘 모른다. 시집갈 때 쓸 돈은 모아두시지 않았겠는가.(웃음)
Q. 훈련시간 외에는 주로 어떻게 시간을 보내나. 결혼은 언제쯤 생각하고 선수생활은 언제까지 할 생각인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 해달라.
A. 선수촌에서의 하루 일과가 새벽부터 네 차례에 걸쳐 8시간 정도 훈련하다보니 쉴 때는 주로 잠을 잔다. 주말이나 휴가 때도 워낙 나돌아 다니기 싫어하는 편이라서 주로 집에서 TV를 보거나 잠을 자고, 가끔씩 음악을 듣는 등 재미없게 산다. 가끔씩 친구들을 만나 영화도 보고, 먹고 싶은 음식도 먹으면서 수다도 떨지만 대부분 시간을 집에서 보낸다. 선수생활은 앞으로 5년 정도 더할 계획이다. 은퇴 후에는 무엇을 할 것인지 10년째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데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아무래도 전공(현재 건국대 체육학과 4학년 재학 중)을 살려 사회생활을 하지 않겠나. 부모님께서는 서른살 전에 결혼을 하라고 하시는데 아직까지 좋아하는 사람도 없고, 나를 좋아한다는 사람도 없다. 나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내가 편한하게 기댈 수 있고, 투정을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면 연상ㆍ연하와 관계없이 좋겠다.
Q. 결혼 후 자식이 볼링을 한다면 시킬 생각이 있는가. 시킬 의향이 없다면 이유는.
A. 자식에게 볼링을 시킬 생각은 없다. 힘들다거나 볼링이 싫어서가 아니다. 내가 볼링을 너무 잘 알기에 자식이 볼링을 못하면 많이 화가 날 것 같아서다. 하지만 내가 잘 모르는 다른 종목이라면 굳이 말리고 싶은 생각은 없다.
황선학기자 2hwangpo@kyeonggi.com
사진=김시범기자 sbkim@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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