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기다렸는데… 넋 잃은 이산가족 北, 상봉행사 무기한 연기에 망연자실
무슨 일 생길까 외출도 삼갔는데 ‘날벼락’
상봉 앞둔 91세 할아버지는 추석날 세상 떠나
“무슨 일이 생길까 외출도 삼가고 선물까지 두둑이 사려했는데 무슨 날벼락입니까”
22일 오후 4시께, 의왕시 포일동의 P공공임대아파트에서 홀로 지내는 이산가족 조숙희 할머니(83)는 침대에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벽에 걸린 달력 25일에는 빨간 볼펜으로 수차례 동그라미가 처져 있었고 침대 위에는 이산가족 상봉 행사 관련 서류가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상봉대상자로 선정된 조 할머니는 전날인 21일, 오는 25일로 예정됐던 이산가족 상봉행사 일정이 연기됐다는 소식을 접한 뒤 이틀째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뉴스를 통해 상봉행사에 대한 새로운 소식이 나올지 모르는데다 다리도 안 좋은데 분을 삭이지 못한 채 외출이라도 했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1ㆍ4후퇴 당시 스물 한 살의 나이로 고향인 황해남도 연백에서 월남한 조 할머니는 북측의 언니와 오빠, 동생, 형부 등을 만나려 했지만 이번 행사를 앞두고 생사를 확인한 결과 모두 사망한 사실을 알게 됐다.
다만, 어린 시절 방학마다 함께 지냈던 조카딸 김진식씨(74)와 김혜식씨(72)가 조 할머니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선물 마련에 분주하던 차였다.
조 할머니는 “평생 아침저녁으로 부모 형제를 그리며 이제나 만나나, 저제나 만나나 하고 살았다”며 “동생마저 모두 저세상으로 갔으니 어린시절 돌봐줬던 조카라도 만나 가족들의 생전 모습에 대해 전해듣고 싶었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경기도내 이산가족 상봉 대상자 중 최고령인 김철림 할아버지(94ㆍ구리시 수택동)의 가족도 상봉 연기소식에 망연자실한 모습이었다.
함경남도 안변군에서 결혼한 뒤 4남매를 뒀던 김 할아버지는 이번 행사로 60여년 만에 다시 만날 가족들 생각에 마음이 부풀어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 왔다.
김 할아버지의 손자(24)는 “할아버지가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라 놀라실까 봐 천천히 말씀드리려고 한다”며 “이산가족 상봉계획이 결렬된 것이 아닌 만큼 조속히 재개되리라 믿는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추석인 지난 19일에는 이산가족 상봉 대상자 김영준 할아버지(91)가 숨져 안타까움을 더했다.
김 할아버지는 이날 오후 6시56분께 부천시 원미구 자신의 집에서 쓰러져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졌다. 평양이 고향인 김 할아버지는 북에 있는 딸과 누나, 남동생 등을 만날 예정이었지만 이산가족상봉을 엿새 앞두고 한 방송사와 인터뷰 촬영을 하던 중 맥박이 떨어지고 호흡곤란을 겪다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북한이 오는 25일부터 30일까지 진행키로 했던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무기한 연기함에 따라 22일 남북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위해 금강산에 파견됐던 우리 실무대표단 전원(75명)이 남북출입사무소를 통해 철수했다.
성보경기자 boccum@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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