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론] 소통에 대하여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많은 경험과 체험을 통해 더 현명해진다고들 한다. 하지만 나의 경우는 60년 가까운 삶을 살아보고 나니 오히려 그 반대인 것만 같다. 예전에는 어떤 사회적인 이슈가 대두되거나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 문제에 대한 사실관계를 파악하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책이나 신문방송 그리고 주변 지인들과의 대화를 통하여 사실여부를 비교적 쉽고 명쾌하게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자통신 기술의 발달로 너무나 많은 정보를 동시에 접하게 되는 최근에는 어떤 사건에 대해 옳고 그름의 판단을 내리는 일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때로는 사건 자체의 진위여부를 가리는 일조차 여의치 않아 보인다.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부딪치고, 지나치게 자극적이고 격렬한 자기주장이 난무하면서, 사안에 대한 전체적인 그리고 장기적이 측면에서의 판단은 실종된 느낌이 든다.

마치 화려한 한그루 한그루의 나무들이 사람의 시선을 끄는 바람에 전체적인 숲의 모습은 가리어지고 있는 형국이라고나 할까? 오늘도 핸드폰 카톡을 통하여 대통령의 소통에 대한 두 개의 전혀 다른 주장들이 들어오고 있다. 내가 왜 상이한 두 카톡그룹에 속해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하나는 옳다고 하고, 다른 하나는 틀리다고 한다.

갑자기 물리학계에서 이루어졌던 ‘빛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수백 년간의 논쟁이 생각났다. 우리가 사는데 중요한 궁극적인 에너지원인 빛의 정체는 무엇인가, 쉽게 이야기하면 빛은 입자인가 아니면 파동인가에 대한 논쟁은 17세기부터 이루어졌다. 일부는 빛을 파동이라 했고, 다른 그룹은 작은 입자의 흐름이라고 주장했다.

빛의 파동설은 토마스 영과 프레넬이 파동이론을 이용해 빛의 간섭과 회절 현상을 성공적으로 설명하였고, 맥스웰과 헤르츠는 이론과 실험을 통해 빛이 전자기파의 일종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그러나 다른 과학자들은 빛이 또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아인슈타인은 플랑크의 양자 가설을 빛에 적용하여 빛이 진동수에 플랑크 상수를 곱한 만큼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에너지 알갱이임을 밝혀냈다.

이렇듯 동일한 객체에 대한 전혀 다른 두 주장은 결국 빛이 파동의 성질과 함께 입자의 성질도 갖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300년간의 끊임없는 논쟁을 통하여 과학자들은 빛은 입자와 파동의 성질을 모두 가지고 있으며, 빛이 상황에 따라 입자처럼 행동하거나 파동처럼 행동한다는 다소 기괴한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빛의 이중성을 받아들이는 일이 많은 과학자들에게는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실험결과에 대한 수용과 지속적인 이론적 탐구를 바탕으로 한 의견의 교류와 소통을 통하여 빛이 파동과 입자라는 전혀 다른 실체를 공유한다는 빛의 이중성을 결국은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자연과학의 탐구대상이 아닌 인간사회에서는 이와 흡사한 이중성을 받아들이기가 오히려 더 쉽지 않을까? 자연과학적인 사실과 달리, 사람들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일들의 경우는 입장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더 많고 완전히 옳고, 완전히 틀린 일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의 주장이 51%는 옳고 49%는 틀리다면 그 주장은 옳은 일일까 그른 일일까? 아니 누가 그 일이 옳다고 또는 틀리다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일까? 그 판단은 서로 다른 입장을 지닌 그룹간의 논의를 바탕으로 한 합의를 통하여 이루어져야할 것이며, 그 합의의 과정에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사실에 근거한?) 소통이라는 생각이 든다.

과학기술이 더 첨단으로 발전하게 될 미래에 우리는 과거에는 결코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사건들을 계속 접하게 될 것이다. 과거 우리의 경험세계에서 일어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들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 각기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 간에 합당한 합의를 구하기 위한 소통의 중요성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커질 것이다.

권명회 인천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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