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링컨’과 ‘변호인’

2013년 미국과 한국에서 전직 대통령을 소재로 각각 영화가 만들어졌다. 미국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링컨’과 한국 양우석 감독의 ‘변호인’이다. 영화는 대중예술이기 때문에 영화와 정치가 연관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 미국에서 ‘링컨’이 제작된 것은 최초의 흑인 대통령 오바마와 관계된다. 흑인의 인권과 자존심 하면 흑인노예해방을 떠올리게 되고, 자연 링컨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옹졸한 민주당원들이 조롱당하므로 민주당이 싫어할 만한 영화 ‘링컨’은 정치색을 훨씬 초월한다. 스필버그는 민주당 지지자로 알려져 있지만, 이런 그가 공화당을 대표하는 대통령 링컨을 소재로 영화를 만든 사실부터 놀랍다. 우리 수준과 비교하면 우리는 역대 대통령에 대해서 여당에서는 우상화, 야당에서는 독재자, 상대방에 대해 두 획일적인 역사적 시각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필버그의 ‘링컨’은 마키아벨리적인 권모술수의 간악함도 있으나, 당과 상관없이 국민을 위해 일하는 링컨을 역사상 위대한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스필버그는 과거 민주당 대통령후보 엘 고어를 지지하면서도, 공화당원인 아놀드 슈왈즈네거의 정책에 지지를 한 적도 있었다. 공화당 지지자 중에는 총기소지를 지지하는 극우보수적인 찰톤 헤스톤도 있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처럼 영화속에서 민주당의 정책보다도 더 건강한 휴머니즘을 보여주는 사람들도 있다.

영화 ‘링컨’은 노예해방이 담긴 수정헌법을 국회에서 통과시키기 위해 반대 당인 민주당의원들을 어떻게 구워삶아 찬성을 이끌어냈는가에 대한 지난한 노력을 강조한다. 민주주의란 단지 정의를 외치는 순수한 정열로만은 안 된다. 당론과 당파의 색깔보다도 국민의 입장에 서서 일해야 함을 보여준다.

얼마 전 안철수 의원이 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를 참배한 것을 민주당에서 비난한 적이 있었다. 미국적 정치행태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고, 안철수를 비난하는 민주당은 옹졸해 보인다. 옹졸하기로는 새누리당도 마찬가지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당파의 색을 분명히 해야 보수든, 진보든 자기 당 지지자들이 빠져나가지 않을 것이라는 정치적 계산이 깔려있다. 국민을 위하는 게 아니라, 국민을 이용해 정권창출만을 신경쓸 뿐이다. 결국 다수 국민들을 위해 큰 포용의 정치를 하지 못한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정권을 잡기만 하면 기존 기관장들을 줄줄히 사퇴시키고, 자기 지지자들의 낙하산 인사로 채운다든가 하는 행태는 민주주의라고 보기 어렵다. 정적을 포용하여 자기 정책의 수호자로 만들어, 더 큰 정치를 보여준 만델라를 기억해야 한다.

이런 협소한 분위기 속에서 민주당 지지자들이 좋아할만한 ‘변호인’이 개봉되었고, 역사상 한국영화로는 아홉 번째 천만 관객을 모았다. 고(故) 노무현 대통령을 우상화하는 듯한 이 영화는 민주주의가 유린되던 시절 한 순수한 변호사의 외로운 분투를 그렸다.

이 영화가 천만관객을 불러모은 것은 정치적 색깔 때문이 아니다. 한국인 누구나 어려운 시절을 겪어왔다. 고문당한 대학생과 무시당한 변호사만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현재의 민주화를 위해 존재해왔던 것이다. 일부 정치가들은 간혹 이 대목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데, 진보적 인사들에 의해 이 나라가 민주화되었다고 착각한다.

천만관객이 눈물을 흘리면서 가장 큰 공감을 한 사람은 송강호 역할이 아니라, 오히려 김영애가 연기한 국밥집 주인일 것이다. 자신은 운동권이 아니지만 억울하게 누명쓴 자식을 둔 아무 힘없는 서민들이 바로 그 시대의 주인공들이었다.

‘변호인’을 통해 관객이 공감한 것은 표면상의 영웅이 아니라, 그 시대를 말없이 몸으로 받아낸 무능력한 엑스트라들의 찢어진 심장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변호인’이 이쪽, 저쪽의 영화가 되지 않아야 하고, 정치적으로 이용당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정재형 동국대 영화영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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