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죽음에 대한 예술적 성찰

금기시되었던 ‘죽음’이 최근 다시 관심의 대상이 됐다. 그만큼 죽음이 다반사가 된 저간의 사정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너무도 심한 죽음의 과잉인 시대에 살고 있다. 시간당 수십 명이 죽는가 하면 자살률이 세계 최고이며 기가 막힌 죽음이 연이어 줄을 잇는 나라다.

이 열악하고 흉흉한 나라에서 목숨을 유지한다는 사실이 거의 기적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인지 인문학과 예술에서도 죽음이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죽음이 새삼 성찰의 대상으로, 문제적 대상으로 부상한 데에는 여러 원인이 있겠다. 무엇보다도 주변에서 자살하는 이들이 너무 많아졌고 잔혹하게 살해당하거나 안타깝게 죽어가는 이들 또한 늘어났다.

그만큼 죽음이 빈번한 사건이자 핵심적인 문제로 부상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죽음으로 내모는 이 사회현실에 대한 성찰과 반성이 요구되는 한편 인간의 바람직한 삶과 죽음의 조건에 대한 인식도 뒤를 잇고 있다는 생각이다. 타자들의 죽음은 나의 실존에 영향을 끼치는 매우 중요한 변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타자의 죽음에 주목해야 하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

사실 죽음에 관한 사유는 불가피하게 근대성 자체에 대한 반성의 측면을 요구하게 되었고 사회적, 정치적, 인문적 문제로 부상했다. 당연히 예술이 자신의 삶에서 유래한 모든 문제를 시각적으로 해명하는 작업이라면 한국 사회에서 빈번한 여러 죽음에 대해 예술가들이 고민하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한 인식 아래 한국의 구체적인 정치와 현실, 그리고 문화적 현상 속에서 왜 죽음이 초래되고 있으며 어떤 죽음이 문제적인지, 과연 죽음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예술에서도 긴요하게 요구되는 일이다.

예술이 인간다운 삶과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려는 본능적인 욕망의 실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면 죽음과 죽음으로 이끄는 모든 것에 대해 저항하고 반성하려는 것은 당연한 시도다. 그러니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과 사유를 보여주려는 예술은 결코 죽음을 회피할 수 없다. 이미 인간 존재 자체가 근본적으로 떨쳐낼 수 없는 비극적인 조건 속에 놓여 있다. 그 안에서 예술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아마 ‘애도’일 것이다.

인간은 죽음에 대한 더 많은 앎과 성찰, 애도를 통해 삶을 더 존중하게 된다. 죽음을 불러내고 그 죽음에 대해 깊이 사유하며 비극적인 죽음을 위무하고 치유하는 기능이 예술 안에는 숨 쉬고 있다. 애초에 예술은 애도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런데 미술에 국한해 보면 그간 한국 근현대미술에서는 상대적으로 죽음을 다룬 이미지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죽음이라는 구체적인 사건이나 경험 혹은 근원적인 부재에 대한 사유를 반영하는 미술 작품이 많지 않다는 점은 의아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과 같은 컴컴하고 무시무시한 것은 가능한 배제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근대기에 형성된 ‘순수 미술’은 미술이 오로지 아름답고 감각적인 것들을 다루는 것이어야 한다는 인식을 강제했다.

그래서 살아 있는 누드와 아름답고 싱싱한 과일과 꽃 등을 반복해서 그렸으며 생명 있는 것들만이 예찬되었다. 어둡거나 죽은 것들은 추방되었다. 또한 시각적인 아름다움이나 미술 내적인 문제만을 형식적으로 다루기 시작한 현대미술에서 인간과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가치들은 사라졌다. 사회와 현실 문제를 반영하는 것도 가능한 한 미술에서 배제되었다.

이는 서구 현대미술과도 조금은 구분되는 우리의 특별한 경우다. 분단 상황과 반공 이데올로기, 권위적인 정치권력과 통제된 사상, 그리고 일제 식민지 시대부터 이어져 온 순수주의 미술관이 오랫동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해 온 결과로 보인다. 더불어 우리가 그만큼 미술을 장식적이고 아름다움 속에서만 이해해 온 결과이기도 하다.

박영택 경기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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