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서른 두살 청년 음악가의 유서

최근에 매우 가슴 아픈 일들이 있었다.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세 모녀가 동반자살을 하는가 하면, 역시 생활이 어려운 30대 주부가 어린 자식을 데리고 아파트에서 투신했다. 얼마전 자신의 정치적 메시지를 알리기 위해 분신한 40대 가장도 생각난다.

대한민국은 자살공화국인가?

우리가 OECD 가입국 중에서 일본을 제치고 자살률 1위국이라는 불명예도 이미 식상한 사실이 됐다. 2010년 WHO 발표에 따르면 인구가 얼마 안 되는 그린란드와 리투아니아에 이어서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세계 3위이기도 하다. 이 순간에도 우리 주변의 누군가가 자신의 목숨을 끊으려 하고 있을지 모른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베토벤도 32살 즈음에 자살을 심각하게 생각했었다. 당대 비엔나 최고의 피아니스트이자 촉망받는 작곡가로 자리매김하던 그에게 27살 무렵부터 청력을 상실하는 비운이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5년 동안 귀 상태가 악화될 뿐이었으며 이제 영영 청력을 잃게 될 것이 분명했다.

음악가에게 청력을 잃는다는 것은 사형선고와 다름이 없었을 것이다. 냉혹하고 인정사정없는 비엔나의 사교계와 음악계가 젊은 베토벤이 귀머거리가 되어간다는 것을 알면 그를 헌신짝처럼 버릴 것이 분명했다. 청년 베토벤은 수치심과 자괴감에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선택을 했다.

의사의 권고에 따라 비엔나 근교의 한적한 휴양지인 하일리겐슈타트(Heiligenstadt)에서 6개월을 요양하던 베토벤은 귓병이 점점 악화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뿐이었다. 그러한 절망의 32살, 그는 무엇을 했을까? 베토벤은 다름아닌 유서를 쓴다.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The Heiligenstadt Testament)’라고 불리는 이글은 베토벤이 죽은 후 동생들(카를, 요한)이 읽을 수 있도록 변호사에게 맡긴 것이다. 유서를 읽어보면 그 무렵 자살을 심각하게 고민했다가 이미 이를 극복했음을 알 수 있다. 절망에 빠졌던 베토벤이 자살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아닌 자신의 예술 그리고 선(善)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러한 상황들(듣지 못하기 때문에 겪는 자괴감과 수치심)이 나를 거의 절망으로 몰아넣었다. 절망감이 조금만 더했더라면 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것이다. 나를 극단에 이르지 못하도록 한 것은 바로 나의 예술이었다. 내안에 있는 모든 것을 내어놓지 않고서는 이 세상을 떠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난 이 저주받은 삶을 이어 가련다.(중략) 자식들이 선을 추구하도록 가르쳐라. 돈이 아니라 선만이 행복을 가져다준다. 내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말이다. 이 비통함에서 나를 일으키는 것은 다름 아닌 선이다. 나의 예술과 선 때문에 나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지 않았다.”

베토벤의 유서는 죽음의 유서가 아니었다. ‘처절한 고통일지라도 그것이 삶’이라고 긍정하는 삶의 유서였다. 절망적 운명에 짓눌려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들어만 가는 선택이 아니라, 절망적 운명을 끌어안고 희망의 발돋움을 내딛고 일어서는 젊은 베토벤의 기개에 깊은 경외감이 든다.

하일리겐슈타트의 사건 이후 베토벤은 본격적인 작곡가로서의 길을 걸으며 그의 작품세계는 더욱 심오해지며 더욱 숭고미를 더해간다. 그의 소위 중기 걸작으로 손꼽는 발트슈타인 소나타와 영웅 교향곡 그리고 오라토리오 ‘감람산 위의 그리스도’는 모두 하일리겐슈타트 직후에 세상에 나온 작품들이다.

베토벤이 자괴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을 선택했다면 음악사의 지평을 넓힌 소위 운명교향곡(교향곡제 5번)이나 합창교향곡(교향곡제 9번, 환희의송가), 그리고 장엄미사 같은 작품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글에 언급한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

양승렬 수원오페라단 지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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