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삶과의 아름다운 이별
세상 참 좋아졌다. 맛난 건 시식할 수 있고, 멋진 차는 시식할 수 있다.
심지어 요즘 아파트는 먼저 살아보고 살 수도 있다. 그럼에도 ‘미리’ 안 되는 게 있다. 바로 ‘죽음’이다.
죽음이란 녀석은 꽤 얄궂다. 오면 언제 오는지 귀띔이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다. 괴팍한 구석도 있다.
친해지기 쉽지 않은 성격이라 꽁꽁 숨어 지낸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죽음을 멀리하게 된다.
요즘은 80세 노인도 경로당에선 ‘젊은이’ 취급을 받을 만큼 평균수명이 늘어났다. 장수시대가 ‘재앙’이 아닌 ‘축복’이 되기 위해서 잘 사는 것만큼 잘 죽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죽음을 미리 준비해보고, 미리 경험해보자 생각했다. 지난 3월 1일 수원시연화장을 찾아 웰다잉(well-dying)투어를 했고, 3월 5일 말기암환자 의료기관 수원기독호스피스를 방문해 연명치료를 중단하고 아름다운 이별을 준비하고 있는 말기 암 환자, 신문희(72) 어르신도 만나 봤다.
지난 3월 1일, 삼일절에 기자를 포함한 문화부 선·후배가 같이 수원시연화장을 찾았다. 가족, 지인의 조문차 방문한 것이 아니라 죽음과 대면하기 위해서 말이다. 솔직히 쉽지 않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종합장사시설을 둘러보고 유서를 쓰고 입관체험을 해보기로 했다. 감행의 이유는 단 하나, 죽음에서 삶의 답을 찾아보자는 것.
이날 죽음과의 첫 미팅은 수원시연화장 이창원 운영팀장이 주선했다. 우선 연화장의 승화원(화장장), 추모의집(봉안당), 유택동산 등 경내를 2시간 동안 돌아보았다. 고인의 이름과 생·졸년이 새겨진 자연장지의 명패 앞에 놓인 커피캔, 고인의 유품이 담긴 채 차곡차곡 쌓인 락앤락통에서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난 이를 그리워하는 애절함이 절절히 묻어났다.
이창원 운영팀장은 “연화장에 오는 이유는 딱 두 가지다. 주변 사람이 죽었을 때 아니면 내가 죽었을 때”라며 “수원시연화장 웰다잉 투어는 그냥 종합장사시설을 둘러보는 견학프로그램이 아니라 인생의 ‘위기’를 ‘기회’의 에너지로 만들 수 있는 인생프로그램”이라고 설명했다.
이날 웰다잉 투어의 하이라이트 유서쓰기와 입관체험은 송행자 한국웰다잉협회장이 진행했다. 송행자 회장은 유서쓰기 교육에 앞서 “아기가 세상에 날 때에는 주먹을 쥐고 태어나지만 사람이 죽을 때에는 손을 펴고 죽는다”며 “인생을 시작할 때에는 쟁취의 욕구를 갖지만, 죽을 땐 잡은 것을 내려놓는다는 의미”라고 나름의 해석을 들려줬다.
그리고는 ‘하루 밖에 살지 못한다면 무엇을 할 것이냐’고 질문을 던졌다. 기자 셋은 답이 없었다. 이어 시작된 유서쓰기 시간. 일기도 안 쓰는 기자들에게 유서쓰기는 큰 산이었다. 하얀 종이 위해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주소까지 작성했다. 송행자 회장은 보고 싶은 가족에게 편지를 쓴다고 생각하라 조언했다. 20분 동안 정적이 흘렀다.
각자 작성한 유서를 들고 입관체험실로 향했다. 그야말로 죽음이 눈앞에 있었다. 길이 195㎝, 넓이 55㎝의 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인간에게 주어진 마지막 공간이었다.
한국웰다잉협회 회원들이 기자들에게 수의를 입혀주었다. 기성복보다 2~3배는 넉넉한 삼베 수의가 살갗에 닿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가슴 띠를 묶는데 숨이 가빠왔다. 유서를 읽기 시작했다.
이름도 다르고 살아온 방식도 다른 기자 세 명의 유서에는 ‘고맙고’, ‘미안하고’, ‘사랑하고’ 등 살면서 놓치고 지냈던 말들이 공통적으로,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흔해서 흘러 보낸 단어들이 인생 끝자락에 다 모여 있었다.
안대를 쓰고 관속에 몸을 뉘였다. 관 뚜껑이 닫히고 관에 못을 박듯 주먹으로 관 뚜껑을 탕탕 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한참을 누워있었다. 마지막 인사를 하는 후배기자의 짤막한 애도사가 들려왔다. 관 밖의 일들과 소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아득하게 느껴졌다. 관은 ‘귀천로(歸天路)’를 지나 승화원 화장장으로 향했다.
“이제 관 뚜껑이 열리면 당신은 부활합니다.” 곧이어 관 뚜껑이 열리고 옆에 있던 회원들과 선후배 기자들이 기자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안대를 벗었다. 형광불빛이 눈부셨다. 그렇게 죽음과의 짧은 미팅은 끝이 났다.
수원시연화장에 들어온 고인은 무조건 50m의 ‘귀천로(歸天路)’를 통과해야 한다. 이름처럼 ‘하늘로 돌아가는 길’이다. 원래는 시체통로길이었다. 이 길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죽음의 길이요, 어둠의 길이다.
이 곳을 ‘굴비화가’로 유명한 박요아 한국화가가 지난해 여름 두 달 동안 세상에 단 하나뿐인 죽음의 갤러리로 변신시켰다. 귀천로 한쪽 벽면엔 수원화성(華城)의 화홍문, 동북공심돈, 방화수류정이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같이 한다. 반대편 벽면엔 꽃상여를 메고 장지로 향하는 장면이 연출돼 있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맨 앞에서 상두소리를 메기는 소리꾼의 상여 소리가 진짜처럼, 애잔하게 들려왔다. 은은한 음악이 흐르고 호박꽃향초가 켜져 있는 귀천로. 우리는 모두 귀천로를 향해 똑같이 달려가고 있다. 죽음, 절대 피한다고 상책이 아니다.
죽음, 이젠 죽음에 대해 호의적으로 대해야 한다. 관대해질 필요가 있다. 죽음 속에 삶의 답이 있기 때문이다.
글 _ 강현숙·박성훈 기자 pshoon@kyeonggi.com 사진 _ 추상철 기자 scchoo@kyeonggi.com
말기 암 환자 신문희씨 죽음의 문턱에서 찾은 평온
신문희씨(72)는 평생 쉼 없이 달렸다.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것은 ‘가족’과 ‘생계’였다. 그래서 삶은 ‘일’. ‘일’의 연속이었다. 2012년 7월, 담관암 말기 판정을 받기 직전에도 야근을 했다.
몸이 무겁고 피곤해, 그냥 영양제나 맞을 심산에 호사스럽게 병원을 찾은 길이었다.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다. 평소 술과 담배를 좋아했어도, 평생 그 힘든 ‘금형’ 일로 몸을 다져온 그였다.
‘진단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른 병원을 찾아가 검진도 받았다. 그러나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담당의사는 암세포가 온 몸 구석까지 전이돼 수술이 힘들다고 말했다.
그것은 신 씨 앞에 놓인 엄연한 현실이었다. 그래도 미련을 놓을 수는 없어 평택에서 병원이 있는 서울까지 직접 차를 몰며 모진 항암치료를 버텼다.
가슴을 도려내듯 감당할 수 없는 통증이 밀려왔다. 그렇게 1년을 견뎌냈다. 하지만 호전되지 않았다. 몸은 더욱 쇠약해졌고, 허리조차 펼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정도로 통증은 더해 갔다.
급기야 지난해 11월, 의사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항암치료를 중단하고 삶을 정리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며 어렵사리 신 씨에게 말을 건냈다. 의사 입에서 처음 나온 ‘희망이 없다’는 말.
처음 진단을 받았을 때와는 ‘다른 충격’이었다. 묵묵히 남편의 고통을 받아내야 했던 아내도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사실상 ‘시한부 인생’이나 다름없는 선고에 쓸려가듯 병원을 나왔다. 그 사이 신 씨의 병세는 더욱 악화됐다. 급기야 항암치료의 후유증으로 다리 근육이 약해져 다리를 폈다가 오므리는 것조차 혼자 힘으로 벅찼다.
어떤 방식이로든 내려놔야 하는 순간이 온 셈이다. 그렇게 평소 신 씨의 아내와 친분이 있던 목사님의 조언에 이끌려 지난 1월, 말기암환자 의료기관인 수원기독호스피스 병동에 들어왔다.
항암치료를 중단하고 진통제 투약을 시작했다. 몸은 한결 편해졌다. 몸은 계속 굳어져갔고, 말하는 것도 벅찼지만 생각만큼은 또렷했다.
이즈음 성경 듣기를 시작했다. 큰 아들이 사다 준 스마트폰과 라디오로 말씀을 들었다. 70 평생을 살면서 일찍이 종교를 품어본 일은 없었다. 인생의 끄트머리에서 붙잡은 신앙은 주변을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힘들 때 마다 한 구절 한 구절 꺼내 들어보면 모든 게 다 내 이야기처럼 들릴 때가 있어요. 죽음의 순간, 비로소 삶이 완성된다고 생각하며 초연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그러면 죽음이 마냥 두렵지 만은 않아요.”
그럼에도 후회되는 것은 있다. 아내와도 가족과도 그 흔한 여행 한 번 못해본 일이다.
“왜 그렇게 아등바등 살았는지, 뭐가 바쁘다고… 평생 곁을 내어준 아내와 신혼여행조차 못 갔을까요. 마음 같아서는 침대에서 일어나 가족과 함께 여기저기 다니며 꽃구경도 하고 싶은데 그런 기력이 남아있지 않아서 그 점이 가장 아쉽네요”
신 씨는 요즘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다. 간절한 기도 덕분인지는 몰라도 심적으로는 그 어느 때보다 안정돼 있다. 기자와 이야기를 하는 내내 편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불편할 수 있는 사진촬영에도 당당히 임했다. 언젠가 자식들에게 자신을 떠올릴 수 있는 소중한 추억거리가 될 것이라 여긴단다. 기자의 펜과 셔터에 힘이 들어갔다. 특별한 독자가 생긴 셈이다.
조심스럽게 기도에 관해 물었다. ‘건강’이란 말로 돌아온다. 조금이라도 건강할 때 자신을 돌볼 수 있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자신은 그러지 못했으니 남겨진 가족들은 보다 더 행복하고 안락하며, 여유로운 삶을 살았으면 한단다. 그리고 그 말을 전하는 것이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정리라고 말했다.
호스피스 완화치료 전문기관은 전국 55곳 가량 된다.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지만 수원기독호스피스 병동에만 한 해 100여 명의 환자들이 이곳을 거쳐 간다. 이들 센터는 환자의 통증만 아니라 살아온 삶의 여정 속에서 빚어진 갈등의 골을 해소하고, 화해의 여정을 걷도록 돕고 있다.
환자들이 인간 존엄성을 잃지 않고 높은 삶의 질을 유지하며 삶의 마지막 순간을 맞도록 육체적으로, 심적으로 돕는 것뿐 아니라 유족들까지 살핀다. 이를 위해 의료진과 간호사, 사회복지사, 봉사자 등이 팀을 이뤄 다 함께 돕고 있다.
오현애 목사는 “호스피스는 사랑”이라 말한다. “모두 죽음을 예견하며 들어오지만, 가족과 친구들, 직장 동료들, 더 나아가 나 자신과 화해하는 여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죽으러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삶을 완성하기 위한 또 다른 하나의 삶의 과정”이라고 말했다.
글 _ 박광수 기자 ksthink@kyeonggi.com 사진 _ 추상철 기자 scchoo@kyeonggi.com
매일 죽음을 보는 여자…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그녀 삶은 ‘죽음의 연속’이었다. 수원시연화장에서 7년을 보냈다.
대학에서 메이크업을 전공했고, 자연스럽게 장례지도사가 됐다. 스물네 살의 젊은 여성으로선 매우 드문 선택이었다.
지금은 강의도 하면서 제법 나름의 입지를 확보하고 있다. 3월 1일 토요일 오후 신현숙(31)씨를 만났다. 쉽지 않은 길을 걸어온 그녀가 보는 삶과 죽음은 어떤 걸까.
장례지도사 일은 험하다. 하루 평균 5구, 많게는 8구의 시신을 염습한다. 경직된 사지를 주물러 풀어주고 알코올 솜으로 손, 몸통, 발, 등, 항문 등 온 몸을 닦는다. 고인의 손과 발톱도 정리해준다. 수의를 입히고 얼굴에 예쁘게 화장하는 것까지 모두 그녀의 몫이다.
그녀의 업무는 단순하게 시체 닦는 일이 아니다. 상(喪)을 당한 유족의 요청에 따라 장례절차를 주관하는 전문가로 장례상담부터 시신관리, 의례지도 및 빈소설치 등 장례의식을 종합적으로 관리한다.
그녀도 매일 죽음을 대하는 직업을 갖기 전엔 우리처럼 삶과 죽음을 이분법적으로 분리시키고 태연하게 살았다.
“7년 동안 수많은 고인과 유가족들을 만났습니다. 젊은 아기 엄마의 자살, 20대 젊은 청년의 사고사, 40대 가장의 죽음 등을 통해 죽음 앞에서 펼쳐지는 갖가지 사람들의 모습을 매일 그림처럼 보다보니 내가 지금 존재하고 있는 ‘이 순간’에 대한 소중함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됐죠.
깨달음은 인생을 바라보는 가치관의 변화를 가져왔어요. 미래지향적인 인간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인간으로 바뀌게 된 거죠.”
그녀는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변했다. 발병하지 않은 암을 걱정하며 고액보험을 들거나, 감도 안 잡히는 10년 뒤의 일을 계획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단기적인 삶을 산다. 주 단위로 계획을 세우고, 1~2년 사이의 일을 고민하다. 발생하지 않는 일에 대해서 최대한 신경 쓰지 않고 현재의 삶에 집중한다. 이 같은 삶의 태도는 매일 죽음을 만지면서 얻은 결과다. 선물이기도 하다.
“삶과 죽음은 완전 똑같아요. 삶과 죽음은 서로 순환하며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생각하면 삶의 만족도가 높아짐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말하는 것을 터부시하고, 죽음을 입에 올리면 재수가 없다고 하는 성향이 강합니다. 죽음은 삶 속에 존재해요. 인간이 태어나는 순간 달고 나오는 삶의 다른 얼굴이기도 하죠.”
그녀 말처럼 삶과 죽음은 닮았다. 허나, 다른 점이 있다면 삶은 휴일, 휴식이 있지만 죽음엔 휴일이 없다. 그래서 장례서비스는 365일, 24시간 진행된다. 유일하게 AS(애프터서비스)가 안 되는 분야다. 그만큼 심리적인 중압감과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다. 그럼에도 그녀는 “이 일이 좋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같은 직장에서 같은 일을 하는 남편이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어떻게 살 것인가?’, ‘내가 지금 잘 살고 있나?’ 하는 식의 의문이 들 때, 죽음을 생각하고 준비하라고 조언한다.
“죽음은 연습할 수 없지만 준비하는 것은 가능해요. 죽음 앞에 어쩔 줄 몰라 하고 당황해하는 유가족들이 참 많아요. 각 주민센터에 웰다잉 관련 프로그램이나 부서가 만들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죽음은 마라톤 선수의 완주를 돕기 위해 함께 뛰는 ‘페이스메이커’와 같은 겁니다. 우리가 힘차게 인생을 완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친구인 셈이죠. 친구랑은 자주 만나서 수다도 떨고, 밥도 먹고 그러면서 친하게 지내야 하잖아요. 죽음도 그런 거라 생각해요.”
그녀 삶은 앞으로도 ‘죽음의 연속’이 될 것이다.
글 _ 강현숙 기자 mom1209@kyeonggi.com 사진 _ 추상철 기자 scchoo@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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