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신에게 투영된 인간의 욕망

누구에게나 뇌리에 오래 남는, 여러 번 보아도 질리지 않는 추억의 명화가 한두 편쯤 있을 것이다. 필자는 무엇보다도 밀로스 포먼 감독의 1984년 작품 ‘아마데우스(Amadeus)’이다.

18세기 후반의 비엔나라는 역사적 공간과 모차르트, 살리에리 등의 역사적 인물들을 다루었지만, 플롯이 상당히 허구적이다. 그러나 역사적 팩트만이 진실을 말한다고 할 수는 없다. 이 영화의 잘 짜인 허구는 시대와 문화권을 뛰어넘는 인간사의 진리를 오롯이 담고 있다.

주인공은 비엔나 궁정악장이었던 살리에리이다. 정신병자 수용소에서 자신이 모차르트를 죽였다며 자살을 시도하는 일그러진 늙은이 모습의 그가 등장하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그에게 고해성사를 해주러 온 젊은 신부에게 자신의 삶을 토로하는 것으로 영화의 본격적인 플롯이 전개된다. 이탈리아의 소소한 농촌에서 자란 그는 음악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신앙심을 키워간다.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노력은 마침내 비엔나 궁정악장이라는 최고의 영예를 안겨주었으며, 그는 존경과 사랑을 받는 음악가로서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어느 날 모차르트라는 애송이 천재가 나타나자 자신의 레종데트르에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된다.

형편없이 너저분한 삶을 사는 젊은 녀석이 신이 내려주신 능력이 아니고서는 결코 만들어낼 수 없는 완벽한 음악을 별 어려움 없이 구사해내는 것이 아닌가? 신앙심이 깊었던 살리에리는 신을 위해 독신으로 살아가면서 신이 자신에게 음악적 영감을 내려주시면 그것으로 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거룩한 삶을 살겠노라고 기도해오던 터였기 때문이다. 살리에리는 신에게 “왜”라고 하는 질문을 토해내기 시작한다.

자신이 겪는 상황이 신의 조롱이라고 믿게 된 살리에리는 겉으로는 모차르트의 친구가 되지만 주도면밀하게 모차르트를 죽이려는 음모를 키워간다. 그것이 자신을 배반한 신에게 앙갚음하는 길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익명의 후원자로 위장하여 모차르트에게 레퀴엠(망자를 위한 미사곡)을 의뢰하여 그 작품을 가로채 자신의 작품으로 둔갑시키려 하였다. 그리고 이 작품을 모차르트의 장례식에서 자신이 직접 연주함으로 자신이 숭고한 동료애와 인간애를 보여준 위대한 예술가로 영광을 얻으려는 음흉한 계획을 세웠다.

이 영화는 음악가들의 이야기를 다루었으니 음악이 주된 모티브인 듯하지만, 필자의 관점에서는 그보다도 다분히 신학적인 질문들이 이야기 전개의 핵심 쟁점으로 보인다. 평생 순결까지 바치면서 성실하게 노력하는 삶을 산 살리에리는 그야말로 신앙심이 남다른 독실한 인물이었다.

신에 대한 자신의 헌신과 성실한 삶이 하느님의 뜻이며, 하느님은 응당 그러한 열심에 보답해 주시리라는 믿음이 그의 지고의 신경(creed)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신념은 자신의 욕망을 신에게 투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의 욕망이 좌절되었을 때 그는 은밀한 살인자라는 무시무시한 악마가 되어갔으며, 남의 열매를 속임수로 가로채 자신이 영광을 누리려는 이기심의 화신이 되어버렸다.

신이라는 단어가 어느새 주변의 여러 인사가 즐겨 사용하는 단어가 되었다. “일제 식민지배는 하느님의 뜻이었다”, “세월호 사고는 하느님이 국민에게 기회를 주신 것이다” 등의 표현들은 신이 자신의 세계관과 가치관에 한정되어 있는 존재라는 “독실한” 오해에서 비롯된 공언이리라. 모두 그 배경에는 신이라는 개념에 자신의 욕망을 투영하고 있는 것만 같다.

양승렬 수원오페라단 지휘자•미주리대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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