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인터뷰] 경기명창 임정란

“위기의 경기민요, 반드시 명맥 이어야 마음의 짐 덜 수 있어”

영화 ‘서편제’(1993)에서 눈 먼 송화가 풀어내는 소리는 보는 이의 가슴을 애달프게 한다.

특히 ‘진정한 소리는 가슴을 칼로 저미는 한(恨)이 사무쳐야 나오는 법’이라는 유봉의 대사는 긴 여운을 남긴다.

민족의 삶과 애환이 녹아있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구성지다. 때론 흐느끼듯 애절하다가도, 금세 흥을 느끼게 하는 대목은 우리네 삶의 모습과도 별반 다르지 않다.

임정란 명창(72)의 삶도 그랬다. 한(限)은 그녀를 ‘소리꾼’으로 만들었다. 전쟁과 가난의 기억을, 그녀는 소리로 승화했다.

천한 ‘광대 집안’의 딸 이라는 멍에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주저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소리는 그녀를 찾아왔다. 돌고 돌아 응어리진 한(恨)이 임 명창의 ‘경기민요’(京畿民謠) 안으로 녹아들었다.

■ 과천 갈현동 ‘대동가극단’ … 예인(藝人) 집안서 출생

임정란 명창은 과천 갈현동이 고향이다. 당시 임 명창의 가정형편은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 당시 그녀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해에 아버지가 급작스럽게 돌아가신 탓도 있었다.

명창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대동가극단’이다. 그녀가 어렸을 때부터 ‘예’(藝)를 가까이 해 현재까지 이르게 한 은인이다. 그녀는 “당시 5촌 당숙이었던 줄타기명인 임상순 선생이 ‘대동가극단’을 만들어 만주와 일본, 전국 각지를 유랑하며 공연을 다녔다”며 “어릴 때부터 주변에 소리가 들리고, 줄을 타거나 피리, 장고를 치는 모습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소리를 접하게 됐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실제 임정란 명창이 나고 자란 갈현동 인근 찬우물 지역은 근대기 ‘대동가극단’을 만들어 활동했던 임종원과 임상문 부자의 집을 비롯해 임세금, 임달용 등 광대집단 계통의 사람들이 일종의 집성촌을 구성해 살던 곳이었다.

‘대동가극단’은 각종 반주음악은 물론 피리, 대금, 해금 등의 연주는 말할 것도 없는 그야말로 재주꾼 집안이었다. 이곳에서 잔뼈가 굵어 나간 사람들 중에 고 박초월 등 유명한 명창도 적지 않았다.

■ 평생 스승이자 은인인 목계월 선생과의 만남

임정란 명창에게 ‘대동가극단’의 애증의 대상이었다. 말이 좋아 가극단이지, 소리를 천대하던 당시 분위기에서는 ‘광대’나 다름없었다. 이 때문에 임 명창은 어린 시절 ‘광대 집 딸’이라는 조롱과 멸시를 받아야 했다.

“학교에 가면 친구들이 늘 광대 집안의 딸이라고 놀렸어요. 이때 기억 때문에 스물이 될 때까지 소리는 아예 입에도 담지 않았어요. 당시 예인은 문화예술인이라는 인식보다는 광대라는 인식이 강해 소리를 하려고 하는 사람 자체도 많지 않을 때였죠.”

그랬던 그녀가 1961년 소리에 입문했다. 가난 때문이었다. 서울에서 양품점을 운영하던 오빠가 사업에 크게 실패해 생계가 흔들리던 상황이었다. 지인의 소개로 서울 종로3가 피카디리 극장 옆 골목에 있는 ‘청구고전음악학원’에서 소리를 배웠다.

당시 이 학원은 경기명창들의 등용문이었다. 이 때 임 명창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 산타량 예능보유자인 이창배, 정득만 선생에게 3년 간 시조, 가사를 비롯해 12잡가, 선소리타령, 휘몰이 잡가 등 경서도 소리를 두루 배우며 기반을 쌓았다.

이 때 평생의 스승이자 은인인 묵계월 선생을 만났다. 1967년 학원을 수료한 뒤에는 묵계월 선생과 함께 몇 차례 국악 향연을 펼치기도 했다. 더욱 심도 있게 경기소리를 배우게 된 것은 묵계월 선생이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보유자로 지정된 해인 1975년 묵 선생의 첫 번째 전수 장학생이 되면서다.

“그동안 배웠던 것은 다 잊고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는 묵 선생의 가르침에 따라 임정란 명창은 다시 소리공부를 시작하게 된다. 전수 장학생이 된 이듬해에는 첫 음반을 냈고, 1983년 제9회 전주대사습놀이에서 민요부 장원을 받고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전수조교가 된다.

■ 명맥 끊긴 경기민요 회복, 유지, 계승

위기는 있었다. 1985년 득음을 한 뒤 본격적으로 활동하던 해였다. 임정란 선생의 목에 적신호가 켜졌다. 성대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치료 뒤에는 다시 소리를 할 수 없을 거라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도 나왔다.

“며칠 쉬면 낫는 것이 아니었어요. 그 때 심각하게 소리를 포기할까 생각했는데, 묵계월 선생이 저를 끌어안고 다독여주셨죠. 목 쓰는 사람은 이런 과정을 한 번씩 거친다고 힘내서 같이 노력해보자고 하시면서. 덕분에 힘든 고비를 잘 넘길 수 있었어요”

그로부터 5년 후인 1990년 임정란 경기명창은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보유자 후보로 지정됐다가 포기했다. 경기도에서 임정란 명창에게 경기도무형문화재가 될 것을 제안해왔기 때문이다.

갈등도 있었다. 지역 무형문화재의 여건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중요무형문화재를 포기하기가 쉽지 않았다. 목계월 선생도 반대했다. 그러나, 임정란 명창은 경기소리를 택했다. 경기소리의 명맥이 끊긴 상황에서 복원과 유지, 계승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렇게 1999년 경기도무형문화재 제31호 경기소리보유자가 됐다. 이후 2001년 ‘한국경기소리보존회’도 창단하고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전통만을 고집하지는 않았다. 2년 간의 준비 끝에 수원지방 설화를 바탕으로 2003년 ‘낚시대장 서얼’을 무대에 올렸다. 이어 ‘과천골 딸부잣집 경사났네’(2005), ‘과천현감’(2007), ‘애민의 방정식’(2009) 등 다양한 경기 창극을 관객에게 선보였다.

또 2011년 ‘경기소리전수관’이 과천에 설립되면서 이듬해에는 과천을 본산으로 경기민요의 산파역할을 했던 ‘대동가극단’을 집중 조명하고자 ‘대동가극단의 맥을 잇다’라는 주제로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을 갖기도 했다.

■ 경기민요 저변 확대 위한 ‘경기창극단’ 설립이 남은 과제

고희를 훌쩍 넘긴 임정란 명창에게 남은 과제는 후학 양성이다. 경기소리 보유자가 된 뒤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게 중에는 초등학교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자식처럼 길러낸 젊은 제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임 명창은 이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무겁다. 경기소리로 유년의 대부분을 보냈고, 대학에서도 경기민요를 전공했지만 정작 졸업 뒤 일자리가 없어 백화점 매장과 카페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임 명창은 “전국 대학에서 경기민요를 배우고 있는 학생 300명 중에서 일자리를 찾은 학생은 19명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백수나 다름없다”며 “열악한 선배들의 상황에 있는 제자들도 경기민요를 포기하거나 더 이상 배우려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경기창극단’의 설립 필요성이 제기되는 이유다. 사실 경기창극단 문제는 지난 2001년 (사)한국경기소리보존회가 창단되면서부터 끊임없이 제기됐던 주요 안건이었다.

하지만 늘 찬밥신세였다. 정책입안자의 무관심과 지역문화와 전통에 대한 몰이해가 주된 사유였다. 편협한 인식도 한몫 했다. 우리소리로 지역문화의 정체성을 일깨우기보다 경제적, 행정적 논리에 입각해 효율성만 따지기 일쑤였다.

이 때문에 임 명창은 아예 3년 전부터 사재를 털어 ‘경기창극단’ 설립을 위한 학술대회와 세미나를 열고, 중앙정부와 지자체 관계자, 국회의원을 초청해 설득과 홍보에 직접 나서고 있다.

“지역의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부족한 탓입니다. 경기도보다 인구나 예산에서 절반에도 못 미치는 광주와 전주, 남원, 진도에도 있는 창극단이 경기도에 없을 이유가 없습니다. 이는 성의와 관심의 문제입니다”

실제로 경기창극단의 설립은 그리 복잡하고 막대한 비용이 투입되는 문제는 아니다. 이미 과천에 최신식 공연시설과 연습실을 갖춘 ‘경기소리전수관’이 마련돼 있기 때문이다. 또 지난 2001년 임 명창이 경기소리를 집대성한 ‘경기소리대전집’도 발간돼 있어 공연 레퍼토리도 풍부하다.

결국, 남은 것은 경기창극단 설립에 관한 조례 제정과 관심이다. 임 명창은 “좀 더 안정적인 조건에서 경기소리 전수자들이 경기민요에 대해 알린다면 남도민요 못지않은 전통성과 완성도를 갖추게 될 것”이라며 “경기창극단이 꼭 설립돼 우리 전통 소리가 모두의 사랑을 받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광수기자 ksthink@kyeonggi.com

사진=추상철 기자 scchoo@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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