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인간이 희망

올해 추석을 전후한 극장가는 백가쟁명의 대회전장이었다. 한국영화 대표적 메이저 배급사들이 만든 대작영화 4편이 사운을 걸고 맞붙은 싸움판이었다.

결과는 알려진 대로다. 어떤 영화는 기대를 넘었고, 어떤 영화는 재앙과 같은 결과를 얻었다. 당사자들로서는 환호와 상심의 양극단에서 흥행세계의 냉엄함을 절감했을 것이며, 성적에 따른 저마다의 후일담이 있을 수 있겠으나, 4편 모두 상업성을 염두에 두고 만든 극장용 영화였다는 점에서, 관객들의 선택을 금과옥조로 이해해야 할 듯하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4편 중 ‘명량’의 성적표는 괄목수준의 것이다. 1천750만을 훌쩍 넘긴 관객 수는 전무했고, 후무할 수준이다. 이와 관련하여 “숫자에 매몰되지 말고 작품에 대해 얘기했으면 좋겠다.”고 한 이순신 역의 배우 최민식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스스로 경신해 나가는 흥행 신기록에 대한 부담과 만듦새에 대한 온도차 큰 견해들을 동시에 환기시키는 발언이기 때문이다. 기실은, 작품으로 보면, ‘명량’은 완성도 논란의 여지가 있는 영화로 보여지는 면이 있다.

 영화를 이루는 다양한 요소들에 관해 살피다보면 다중 공유의 지점이 도출될 것이다. 물론 이 일은 업계의 책임 있는 당사자들이 맡아야 할 일이며, 이 지면의 몫이 아니므로 이쯤에서 접어야 할 논점이기도 하다. 다만 ‘명량’이 오늘의 한반도인들에게 남긴 시사점에 대해서는 곱씹고 또 새기면서 질리도록 반추해도 지나치지 않을 시대적 요청이 있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명량’의 시의성은 압도적이다. ‘세월호’가 남긴 분노의 사회학을 읽게 하는 거울로서의 이순신의 현현이 놀랍고, 그 상징의 파격성이 놀랍다. 남해안 진도의 울돌목과 맹골수도, 격류의 바다에 뜬 배의 운명, 다중의 생명을 담보한 절체절명의 선택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상징의 합치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517년의 ‘세월’을 건너 2014년을 회오리 속에 던져 놓은 ‘세월호’라니! 물론 ‘명량’이 이러한 사태를 예견한 기획일 순 없다.

그렇긴 해도 500여 년의 시차를 두고 우리들에게 던지는 시사점들은 전율을 느끼게 한다. 궁금한 것은 관객 1,700 몇 십만 속에 우리 사회의 소위 지도층 인사들이 몇 명이나 포함됐을까 하는 점이다. 그들은 뭘 봤을까, 영화를 보는 동안에도 정략을 계산했을까, 그들은 혹시 극장을 나오면서 대중영화를 깨달음의 경로로 인정할 수 없다는 투의 중뿔난 선민의식 같은 걸 갖진 않았을까? 피로중후군이 너무 오래,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어 드는 의문일 것이다.

세월호 사태가 없었다 해도 ‘명량’의 대중적 소구력은 분명했을 것이다. 난세를 타개하는 지도자 이순신의 존재성 때문이다. 조선 최악의 임금 선조의 어깃장과 도요토미의 침략 앞에서 본분에 충실했던 이순신. 그도 한산섬 수루에 앉아 깊은 시름에 잠겼던 한 인간이었다. 인간에 대한 사랑,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이해, 소명의식, 사려와 분별력이 강한 사람이었다고 평가 받는 한 인간이었다.

이순신 역시 한 인간이었다는 점은 오늘의 한반도 남쪽에 4천800만 여 명의 인간이 있다는 걸 생각하게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난세임이 분명할진데, 지금 이 땅에 또 다른 이순신이 출현하길 바라는 일은 구상유치의 어리석은 소망일까?

김영빈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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