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오랜 관성에서 벗어나고 있다. 어릴 때부터 예금통장 만들고 집집마다 예금통장 개수가 미래의 버팀목이던 시대는 가고 있다. 가까운 은행을 가 봐도 예금보다 펀드를 판촉하고 있다.
통계로도 명확하다. 몇 년 사이 사람들이 가장 많이 택한 저축상품은 예금이 아니었다. 작년 한 해 국민이 예금으로 저축한 금액은 27조원이었다. 전체 예금액이 1천100조원 정도 되니 약 2% 남짓 된다.
예금을 제치고 가장 많이 늘어난 저축상품은 연금이었다. 퇴직연금하고 국민연금으로 작년 한 해 유입된 규모는 운용수익을 빼고도 순수 납입액 기준으로 55조원 증가했다. 퇴직연금과 국민연금을 전부 합치면 잔액이 520조원 정도 되니 약 10% 수준이다.
여기에 펀드로 들어온 자금까지 합친다면 예금이 아닌 저축상품 상품으로 들어온 돈은 훨씬 많다. 바야흐로 예금통장 만들어서 여유자금을 저축하는 ‘예금의 시대’가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두 가지 근본적인 이유를 지적하고 싶다. 하나는 당연히 저금리이고 다른 하나는 고령화이다. 국민이 저축상품을 택할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은 안정적인 수익률이다.
얼마 전 한국은행의 금리 인하로 원금이 두 배 되는데 대략 36년이 걸리는 초저금리시대가 된 마당에 예금 중심의 과거 저축행태를 고집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일 수 있다. 금리 10% 면 7년, 5% 면 14년 만에 원금의 두 배가 되는 복리의 마법시대는 다시 오기 어렵다.
다음으로, 고령화가 은행의 예금 성장률을 낮추는 이유는 조금 복잡하지만, 고령화가 우리나라 저축구조를 바꾸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면 금방 이해할 수 있다. 지금도 우리나라 노인인구의 반은 빈곤상태라는 통계가 있을 정도로 고령화는 퇴직한 노령인구의 소득악화를 초래한다.
이 때문에 어느 나라든 노령인구의 소득과 소비 문제는 순수한 경제정책 영역을 넘어 사회복지정책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어느 나라에서나 강제로 도입하는 제도가 연금이다.
그런데 연금이 발달한 나라일수록 사람들이 월급 중에 일부를 떼어 저축하는 소위 ‘자발적 저축’은 줄어든다. 국민연금이나 퇴직연금처럼 급여 일부를 회사가 원천징수하여 보험료로 내기 때문에 자발적인 저축은 그만큼 줄어든다. 그렇다 보니 강제저축인 연금이 발전할수록 예금 성장률은 둔화된다.
더구나 연금이 예금 성장을 낮추는 더욱 큰 이유는 강제저축으로 쌓인 연금자산의 운용방식에 있다. 가령, 국민연금은 대부분 연금자산을 채권, 주식, 부동산 등으로 투자하지 예금으로 운용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 퇴직연금은 세계 유례가 없을 만큼 연금자산 대부분을 예금으로 운용하는 비정상 상태이지만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한 운용방식은 아니다. 결국, 고령화로 연금사회가 될수록 예금 성장은 구조적으로 기대하기 어렵다.
이렇게 예금의 시대는 가고 있지만, 문제는 투자의 시대, 연금의 시대에 대해 국민은 충분히 신뢰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예금을 대신할 새로운 저축질서 나아가 금융질서는 신뢰라는 무형의 자본이 국민과 금융시장 간에 축적될 때 바로 설 수 있다.
세계 최고속의 고령화로 국내 금융제도 역시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를 뒷받침할 자본시장의 신뢰회복 노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나마 다행은 연금의 시대에는 일반 주식투자와 달리 금융전문가가 노후자금을 대신 운용해 준다. 이 때문에 일반 국민은 복잡한 금융을 깊이 알지 못해도 안전성과 수익성을 조화하면서 노후자산을 늘리는 것이 가능하다.
단, 이런 가능성이 실현되려면 연금운용 전문가가 오직 가입자만 바라보며 연금자산을 신의성실로 운용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연금 자산운용의 투명성, 전문성, 독립성 제고는 자본시장 신뢰회복과 새로운 저축질서의 성패를 가르는 중요한 과제이다. 연금개혁은 그래서 중요하다.
송홍선 자본시장연구원 펀드연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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