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수능일 역시 참 추웠다. 수능일 한파의 전통이 어디 가랴 싶을 추위였다. 수험생들로서는 성적에 대한 부담과 살을 에는 추위로 이중의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그들의 가족들 역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대학에 대한 과잉 상징에 목매는 한 매년 11월에 어김없이 찾아올 숙명의 빙점이라 하겠다. 수험생들 모두가 십 수 년 동안 쌓아왔던 실력을 잘 발휘했기를 짠한 심정으로 바랄 뿐이다.
사실 올해 대입고사는 수능일 이전부터 진행되어 왔다. 이미 10월에 수시고사가 치러진 것이다. 필자가 속한 대학에서도 수시실기고사가 진행되었다. 10명의 연기전공자를 뽑는 연극영화과 고사에 수백 명이 지원했다.
8시 못 미친 이른 시간부터 초조한 표정으로 대기실에서 서성이던 그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학부모 대기실에도 절박함이 밴 오만 가지의 표정이 있었다. 문화산업의 시대에 연기자로 살면서 명예와 부를 누리고 싶은 지원자들로 넘쳐나는 대입고사장 모습은 이제 낯설지 않은 늦가을 풍경이 되었다.
실기고사 연기에는 어떤 흐름이 나타난다. 남학생들은 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을 택하는 경우가 많고, 여학생들은 <한 여름 밤의 꿈> 을 포함한 세익스피어의 작품들, <벚꽃동산> , <갈매기> 등 안톤 체홉의 일련의 작품들과 존 필마이어의 <신의 아그네스> 등을 즐겨 연기한다. 연극예술의 대표적인 명작들이 대본으로 선택되는 것이다. 신의> 갈매기> 벚꽃동산> 한>
진지하고 긴장된 표정으로 무대에 선 수험생이 명작 속의 인물이 되어 열연을 펼친다. 수험생은 혼신을 다하는데, 바라보는 심사위원은 안쓰럽다. 나이와 경험, 그들의 감성과 재능을 고려하지 않고 선택한 인물을, 어울리지 않는 거친 호흡과 표정으로 절규하듯 연기하는 걸 보면서 답답하고, 한숨이 나는 것이다. 물어보면 답은 비슷하다. 학원 선생님과 상의하여 6개월 안팎의 연습을 했다는 것이다.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작품 설명을 청한다. “작품이요...?” 생뚱맞거나 당황한 표정으로 자기 역할에 대해 설명한다. “역할이 아니라 작품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거듭 청하면 그 때서야 질문을 잘못 이해했음을 느끼나 대답하지 못한다. 그 작품의 작가 세계와 장르와 주제에 대해 모르기 때문이다. 그와 상담을 했거나 지도했던 사람들 중의 누구도 역할 이해의 기본이 되는 면들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이다.
연기전공자 심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수험생의 가능성이다. 가능성은 확고한 신념과 전공에 대한 이해가 필수다. 물론 지원자의 용모로 드러나는 외적 조건이 고려될 수 있다. 입시학원 관계자들이 이 점을 염두에 뒀으면 좋겠다.
대학은 가능성 있는 학생들을 선발하여 능력을 키워주는 곳이다. 설익은 연기술로 격정에 쌓여 열연하는 수험생을 뽑아 잘못된 연기관과 습성을 고쳐주는 데 시간을 뺏기는 일은 비경제적이며 불합리한 것이다. 이것은 비단 연기실기에 국한되는 얘기는 아니다.
세월호로 상징되는 우리 사회의 허약성은 기초에 소홀한 채 결과를 탐하는 비윤리적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수험생들이 자신이 연기할 작품 전체를 꼼꼼히 읽고, 그 작가에 대해 이해하고, 주제를 알고 연기했으면 좋겠다. 설령 이에 대한 질문을 받지 않더라도 말이다.
입시철은 만추의 계절이다. 연기 전공 수험생들이, 가끔은, 서투른 연기술 습득의 부담을 벗어놓고, 낙엽 고운 공원길을 걸었으면 좋겠다. 일상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인간사의 드라마를 생각해보는 여유를 즐겼으면 좋겠다. 좋은 영화나 연극을 감상하면서 소양을 쌓는 일도 입시에 도움이 될 것이다. 모든 일에 기초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김영빈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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