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날 저녁, 미리 예약해놨던 신년음악회를 찾아 나섰다. 콘서트홀이 아니라,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신년음악회’를 실황중계로 보여주는 영화상영관이었다. 세계 80개국에 실시간으로 중계된 이 신년음악회는, 단독 계약한 회사의 전국 상영관으로 배급됐는데 일반영화 관람비용의 세 배 정도 높은 가격에도 일찌감치 매진됐다.
현대 사회의 소비자들의 눈높이는 고품질의 독일산 자동차를 선호하고 미국 메이저리그 야구나 영국 프리미어 축구와 같은 세계 최고의 브랜드와 글로벌 수준에 이미 맞추어져 있다.
나아가 제반 소비 행위에 있어 비용대비 만족도를 기준으로 구매를 결정하기 때문에, 클래식음악 마니아가 아닌 경우라면 비싼 가격을 지불하고 그저 그런 콘서트를 위해 콘서트홀을 찾아가는 비합리적 선택을 하기보다는 가벼운 복장으로 팝콘과 음료수를 사들고서 동종 분야의 최고 브랜드인 ‘빈 필하모닉’ 신년음악회를 보기 위해 영화상영관으로 모여드는 것이다.
콘서트홀이라는 용기에 담아야 제맛을 내는 오케스트라 음악은 21세기 디지털과 IT 시대에 들어 콘서트와 음반 시장이 급격히 축소되면서 곧바로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지식인들과 돈 많은 사업가들로 채워지는 콘서트홀에 안주하여 20세기 내내 음악활동에만 집중해온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들이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고 시대적 변화에 대응하여 생존하기 위한 변화와 혁신 방법 중의 하나가 바로 다양한 미디어를 활용하여 대중들에게 먼저 다가가 스스로를 적극 알리는 일이었고, 이제 그들은 콘서트홀에서 탈피하여 인터넷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소비자들을 위한 사이버 콘서트에서 연주하기도 하고 나아가 영화상영관에까지 진출해야 하는 시대에 직면하게 되었다.
절대적인 권위와 카리스마를 갖고 오케스트라를 중세의 수도원같이 엄숙하고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단체로 이끌었던 카라얀 사망 이후, 베를린시의 재정지원과 수입원이 대폭 감소하면서 베를린 필하모닉은 재정적 위기를 타개하고 사장되가는 클래식 시장의 미래고객과 잠재고객(청중)을 개발하고 확대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도이치뱅크와 함께 다양한 예술교육 및 고객개발 프로그램을 가동시켰다.
도이치뱅크는 재정지원을 통해 기업의 사회공헌과 이미지 제고라는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할 뿐만 아니라 미래고객이 확보된다는 것이 결과적으로 증명됨으로써 베를린 필하모닉과의 공생을 위한 상호 업무제휴를 더욱 강화시켰다.
오케스트라는 이제 재정적 위기를 극복하고 특정계층이 아닌, 유아부터 어린이, 청소년, 사회의 소외계층을 대상으로 미래의 청중을 만들어나가는 작업을 수행하게 되었다.
18세기엔 궁정의 왕족과 귀족들을 위해, 산업혁명과 프랑스 대혁명을 거친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지식인들과 부를 쌓은 상인귀족들의 신분상승의 장이 되기 위해 존재했던 오케스트라는 그 전통이 가시지 않았던 20세기를 지나 21세기를 맞이하면서 자칫 사라져버릴 수도 있는 존망의 위기를 스스로 극복하고자 공급자 위주의 운영정책을 과감히 포기하고, 이제 문을 활짝 열고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하여 먼저 다가가는 수요자 위주의 생존전략과 함께 시대적 변화의 요구에 맞추게 되었다.
급변하는 시대적 변화에 대응해야 하는 오케스트라의 숙명은 베를린 필하모닉의 현 상임지휘자 사이먼 래틀 경의 이야기 속에 함축돼 있다. “다음 세기에 음악가로 살고 싶다면, 동시에 교육자가 되어야 한다.”
임형균 톤마이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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