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왜곡 보다 더 무서운 것은 우리들의 ‘역사 망각’
일제 식민지배 하에서 독립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이바지한 애국지사와 그의 유족, 이들은 광복 70주년이 되는 2015년이 그 누구보다도 뜻깊다.
일제시대에 독립운동을 한 사람은 300여만명에 이른다. 허나, 유공자 지원을 받는 이들은 생존자와 유족을 합해도 1만명이 안 된다.
국가유공자와 그 유족에 대한 처우가 외국에 비하면 열악하다. 광복 70년이 지난 지금 독립운동가 유족들과 후손들의 모습은 어떨까.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재산을 독립운동에 쓴데다 가정을 돌보지 못하면서 후손들은 경제적 약자로 전락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선조들의 독립운동이 후손들에게 대부분 명예보다는 가난만 유산으로 남겨진 경우가 많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도내 독립운동가 3인의 후손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조소앙 선생’… 8촌 조양래
‘독립운동가 조소앙선생 기념공원 추진위원회’ 고문을 맡고 있는 조양래(79)씨는 조소앙 선생이 8촌 할아버지가 된다.
조소앙(趙素昻, 1887~1958) 선생은 파주시 출생으로 어린 시절을 양주시 남면 황방리에서 보냈다. 임시정부의 사상적 기틀이 된 건국강령을 마련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비서장, 사회당 당수, 제2대 국회의원 등을 역임했다.
특히 ‘삼균주의’를 제창해 임시정부가 건국까지 좌우파를 통합해 어떤 이념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해야 할지 기본 방향을 정한 독립운동가로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조씨는 조소앙 선생을 언변이 좋고 유머러스한 할아버지로 기억한다. “어렸을 때 조소앙 선생이 집에 종종 들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무엇보다 1950년 5월 30일 제2회 총선거에 서울 성북구에 출마해 3만4천35표로 전국 최고득표로 당선되면서 제2대 국회에 진출했다.
그 때 내가 아마 중학교 1학년이었을텐데 좌중을 압도하는 언변, 화려한 언변을 뒷받침하는 풍부한 지식의 깊이와 나라를 향한 애국심이 대단했던 분이셨다. 6·25전쟁으로 서울에서 강제납북돼 전시하에서 가혹한 생활을 견뎌야 했고 결국 순국해 평양 남쪽 애국지사 묘역에 고이 잠들어 있다.”
조씨는 조소앙 선생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차츰 잊혀지는 것이 안타까워 지난 2008년도부터 본격적으로 조소앙 선생 기념공원 조성을 위해 발 벗고 나섰다.
조소앙 선생이 어린시절을 보낸 양주시 남면 황방리에 조성중인 조소앙선생 기념공원은 총사업비 54억9천만원으로 현재 본가 복원과 기념공원조성을 완료하고 전시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오는 10월 개관 예정이다.
“다들 주변에서 조카가 할 수 있겠느냐 의구심을 가졌다. 내가 죽으면 끝이겠구나 생각해 정말이지 열심히 뛰어다녔죠. 솔직히 너무 힘들고 지쳤다. 정식으로 조소앙선생 기념사업회가 만들어져 후손들에게 조소앙 선생의 생애를 재조명하고 애국정신을 함양시킬 수 있는 여러가지 사업들이 진행됐으면 하는 게 소원입니다.”
‘최익현 선생’ … 현손자 최종규씨
포천에서 16대째 살고 있는 최종규(84)씨는 지역에선 큰 어르신으로 통하는 유명인사다. 포천문화원을 만들어 1대에서 4대까지 원장을 맡아 포천문화발전에 힘썼다.
무엇보다 조선 말기의 위정척사사상을 주창한 유학자이자 항일 의병장인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 선생과 항일 독립운동가인 염재(念齊) 최면식(崔勉植, 1981~1941) 선생이 각각 고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된다. 포천에선 최씨를 모르는 사람이 없고 다들 조상 덕을 많이 보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독립운동가의 집안에서 태어난 최씨의 생각은 다르다. 최씨는 “후손이 못 사니 선조도 빛이 안난다”며 눈물을 훔쳤다.
“광복이 됐을 때 광복이 뭔지도 몰랐다. 지난 과거가 너무나 비참하다. 어려서부터 내 뜻대로, 기 한번 펴지 못하고 살았다. 가난에 얽매여서 살았고 혼자 서울에서 유학할 때 625가 나서 외가가 있는 가평으로 도망을 갔다.
자전거에 쌀 한가마니를 싣고 70리 길을 오셨다 가셨는데 그게 아버지와의 마지막이었다. 아버지 없이 나라를 위해 헌신하신 조상들 욕먹이지 않기 위해 늘 긴장하면서, 외롭게 살아왔다.”
최씨의 고조할아버지 최익현 선생은 1906년 74세의 고령으로 의병을 일으켜 최후의 진충보국했던 분으로서, 구국의병항쟁의 불씨를 점화시킨 항일 의병장이다.
최씨의 할아버지 최면식(崔勉植, 1891~1941) 선생은 1916년 대한광복회에 입단해 주로 전라도 지역에서 군자금 모집과 친일파 처단 등의 활동을 펼치다 일본 경찰에 피체돼 옥고를 치렀다. 그 후에도 수차례 옥고를 치르던 중 공주형무소에서 건강 악화로 출옥한 뒤 순국했다.
1980년 건국포장이 추서됐다.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에는 최씨의 고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사당, 채산사(山祠, 경기도기념물 제30호)가 있다.
“일제의 탄압이 유독 혹독했고 광복 후에도 친일파들의 득세로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삶은 평탄치 않았다. 현재도 그러하다. 후손들이 대한민국 사회에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기 위해서는 국가적 차원의 지원이 확대되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사회 전체의 관심이 필요하다.”
최씨는 ‘지원’보다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이 ‘관심’이라고 강조했다. 최소한 후손들로 하여금 조상들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도록 말이다.
‘조병세 선생’ … 채수민 前 삼충단보존회장
“강직하고 추진력도 굉장하고…. 그러니 나라가 망할 것 같은데 왕은 설득 안되니 바로 극약 자시고 자결하지.”
독립운동가 조병세(趙秉世,1827~1905년) 선생을 모시는 제단 ‘삼충단(三忠檀)’의 건립을 추진했고 지난해까지 삼충단보존회장을 맡았던 채수민(79)씨의 말이다.
조병세 선생은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나 지금의 국회의장과 같은 중추원 좌의장(1894년)을 지냈다. 1898년 의정부 대신에 임명됐지만 은거하며 끝내 사양했다.
하지만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79세의 몸으로 국권회복과 을사5적의 처형을 고종에 주청하다가 일본군에 연금되는 수모를 겪었다. 곧 풀려나 대한문 앞에서 석고대죄하며 같은 주장을 펴다가 가평으로 추방당했다.
다시 상경해 을사늑약의 위법성을 성토하다가 일본 헌병에 체포 당해 억지로 교자(가마)에 타서 미리 준비한 극약을 마셨다. 조 선생은 죽기 전 각국 공사와 동포, 백성에게 유서를 남겨 독립의 기초를 세울 것을 당부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조 선생은 을사늑약에 ‘나라가 이미 망하였으니 나는 대대로 국록을 먹던 신하로서 나라와 함께 죽음이 마땅하다’며 분통스러워 했다. 지금이야 조 선생처럼 자결하면 개죽음이라 하겠지만, 당시 엄청난 것이었다. 온 국민이 부친상을 당한 듯 슬퍼했다고 한다.”
채 회장은 조 선생과 국권을 되찾기 위해 함께 활동한 최익현(崔益鉉), 민영환(閔永煥) 선생의 충절을 기리는 제단인 삼충단 복원에 힘써왔다. 삼충단은 1910년 설단해 방치 훼손됐다가, 지난 89년에 복원됐다.
“처음 삼충단을 세웠던 13명 중 한 사람의 후손 분이 내가 청년일 때 찾아와 복원 관련 문헌과 자료를 줬다. 그 때부터 총대를 맸다. 조 선생님 관련 자료를 찾고 맨 땅에 헤딩하듯 기금 마련하겠다고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동네 이장이 피할 정도로 수 년간 가가호호 방문 모금을 불사하며 기어코 삼충단을 복원, 지난해까지 삼충단에 제를 진행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3년 전 작고한 조원흥이라는 조병세 선생 후손이 말하기를 그렇게 주민들한테 내 식구처럼 자상한데 국가 일을 할 때는 엄중하게 처리했다더라. 이 시대에 그런 양반 기리면서 단 한 사람이라도 깨달았으면 더 소원도 없겠다.”
정리=류설아·강현숙기자 사진=전형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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