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면 당신의 삶이 ‘마법’
누구나 ‘사랑’에 빠지면 행복해진다. 황혼의 나이라고 해서 ‘사랑’이 끝난 건 아니다.
사랑하는 이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하루의 활력소가 된다.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고 즐겁다. 사랑해본 이는 알 수 있다. 75세 늦깎이 마술사 안재희씨에게 ‘사랑’은 ‘마법’과 같다.
실제 그렇기도 했다. 인생 끄트머리에 찾아온 ‘마술’은 ‘지팡이’가 ‘비둘기’로 변하듯 안 씨의 삶을 ‘비상(飛上)’ 시켰다. 낮은 목소리로 시인 나태주의 <풀꽃> 을 읊조리는 그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퍼졌다. 풀꽃>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3연이 전부인 짧은 시. 화자에 따라 ‘너’의 의미는 다르겠지만, 안 씨에게 ‘너’는 ‘마법’이다.
마법 없는 ‘삶’
봄기운이 완연했던 4월의 어느 날. 매끈하게 잘 다려진 흑색의 턱시도를 입은 마술사 안재희씨(75)가 무대에 올랐다. 단상 앞에는 노란색 옷을 입은 어린이집 원생들이 호기심 ‘총총’한 눈길로 무대 위 할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안 씨의 손끝에서 ‘마법’이 시작됐다. ‘꽃’이 튀어나오고, 비둘기가 날아올랐다. 오색빛깔 색종이가 하늘을 뒤덮었고, 어디에선가 ‘우산’이 솟구쳐 나오기도 했다. 그때마다 아이들의 입에서 환호와 탄성이 끊이지 않았다. 그 무대에서 만큼 안 씨는 ‘아이돌’ 부럽지 않은 ‘꽃할배’였다.
청년시절 그의 인생에는 ‘마법’이 없었다. 특별한 ‘재주’도 없었다. 인생 대부분을 ‘시장’에서 흘려보냈다. 전라도 출신인 그는 광주의 한 ‘필름현상점’에서 7년 동안 계산대 업무를 보며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여기서 지금의 아내 이덕례씨(72)를 만났고, 1969년 서울 이문동으로 이사했다.
‘서울살이’는 만만치 않았다. 무일푼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한국방송(KBS)에서 수신료 징수업무를 했다. 무려 10년이나.
그러다 1979년에 다시 인천으로 다시 이사하면서 ‘사표’를 던졌다. 이 때부터 ‘시장’과의 지긋한 인연이 시작됐다. 투신한 일은 ‘도매업’이었다. 인천 ‘깡시장’에서 15년, 구월동 ‘농수산물시장’에서 15년. 도합 30년. 평생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할 거라 여겼다.
그러다 ‘위기’가 왔다. 환갑을 넘기면서 ‘매출’이 급속도로 떨어진 것. 대형마트의 공세는 곧 ‘시장의 쇠퇴’로 이어졌다. 특히 소매상과 거래해야하는 도매상의 타격은 더욱 컸다. 더욱이 젊은 상인들이 나이 많은 ‘할배 도매상’과 거래를 트지 않았다.
“하루 벌어 하루 생활도 힘들었어요. 나이를 먹으니까 단골도 떨어지고, 몸도 더 이상 버티지 못했죠. 가족들도 이제 가게를 정리하자고 채근했어요. 다른 노인처럼 편히 쉬면서 여생을 보내라고.” 당시 나이 69세. 고희(古稀)를 노려보는 나이. 그렇게 안 씨는 ‘은퇴’를 했다.
매일 5시간씩 ‘연습’ … 노력이 노후의 대안
‘마술’은 ‘마법’처럼 다가왔다. 지금 생각하면 ‘운명’이었다. 늘어지는 시간을 때우려 지역문화회관에 ‘기타강좌’를 들으러 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해당 강좌가 인원미달로 폐강됐다. 수강료는 ‘3만원’. 환불받기 애매한 금액이었다. 그러다 들을만한 강좌가 없을까 하다 눈에 든 것이 ‘마술강좌’였다.
“마술에 ‘마’자도 몰랐지만, 동경심은 있었어요. 집 앞에 마술학원이 있었거든요. 그냥 막연했죠. 수강료도 3만원으로 비싸지 않았고, 무엇보다 ‘재미’있을 것 같았어요. 그렇게 마술세계에 입문하게 됐죠. 다행히 딱 내 적성이었어요.”
‘과정’까지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순발력과 민첩함, 임기응변이 필요 하지만 안 씨는 부족한 게 많았다. ‘고령’이라는 신체적 제약이 무엇보다 컸다.
악력(握力)이 떨어지다 보니 손가락 마찰을 이용해 ‘불’을 만들어 내는 마법은 아무리 애를 써도 되지 않았다. 거기에 직업 마술사의 세계에서 익혀야할 ‘무대매너’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노인’이라서 좋은 점도 있었다. ‘밤 잠’이 적다는 것과 ‘시간’이 많다는 것. 매일 같이 새벽에 일어나 5시간 씩 ‘마술연습’을 했다. 아내 이 씨는 ‘관객’이자 혹독한 ‘심사위원’이었다. 그렇게 날 가는 줄도 모르고 연습했다.
가족은 나의 든든한 ‘응원단’
안 씨가 할 수 있는 마술가지 수는 100여 개가 넘는다. 가장 자신 있는 ‘비둘기 마술’부터 ‘동전’, ‘카드마술’까지. 안 씨의 손에서 세상 모든 것은 ‘마술’이 된다. 생활마술에서 직업마술로 발전하면서 또래 어르신이나 어린이 등을 대상으로 공연을 나간다.
대부분 초대 손님 자격이지만 부르는 곳이 있다면 어디든 달려간다. 직업마술사로 전향한 3년 전부터 현재까지 진행한 공연만 150여 회다. 무료든 유료든 상관없다. 재능기부 형태로 인근 노인정에도 매달 1회씩 무료공연도 나가고 있다.
지난해에는 큰 공연도 가졌다. 철도청 115주년을 기념해 가수 설운도와 현숙, 임주리 등의 유명가수와 함께 서울 용산에서 무대를 가졌다. 물론 노래 사이 분위기를 띄우는 역할이었지만 소중한 경험이었다. 무엇보다 ‘자신감’이 생겼다.
처음 마술을 배운다고 했을 때 “다 늦어서 무슨 주책”이냐고 했던 친구들도 이제는 “어떻하면 배울 수 있냐”고 묻는다.
인생2막, 하고 싶은 일 하는게 ‘행복’
안 씨는 ‘소원’이 크게 없다. 유명세에 ‘물욕(物慾)’도 한번 부려볼 만 하지만 소박하기 그지없다. 그냥 ‘연미복(燕尾服)’을 입고 무대에 서보는 것이 소망이다.
“아무리 싸게 해도 한 벌에 몇 백만 원 정도 해요. 무료공연에 교통비 정도의 수고비만 받는 상황에서 사실 소박한 소원도 아니지요(웃음).” 혹시 “마술 말고 배우고 싶은 게 있으시냐.”고 기자가 물었다. 그랬더니 ‘리스트’가 줄줄 이다.
“마술은 불변이고, 그 외에 악기를 배우고 싶어요. 사실 마술도 ‘기타’를 배우려다가 폐강되면서 시작했거든요. 나아가서 ‘색소폰’도 배우고, ‘드럼’도 배우고 싶어요. 마술 하면서 간간히 보여주는 거죠. 생각만 해도 설렙니다.” 팔순의 나이를 바라보고 있지만 그의 시계는 청춘을 가리켰다.
“가난하다고 아프다고, 배운게 없다고 ‘골방’에 머무를 이유는 없어요. 행복한 노후는 돈과 학벌이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고 싶은 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다시 세상으로 향하는 게 중요해요.
그것이 행복한 노후를 위한 유일한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이 들어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면, 오히려 젊었을 때 보다 더 젊게 살 수 있어요.”
글=박광수기자 사진=장용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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