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당성, 다시 한 번 생각해야할 문화유산

한려수도를 자랑하는 다도해와는 다르지만, 경기만도 서녘으로 기울어가는 햇살을 반사하는 은빛의 갯벌과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작은 섬들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정말 세계 어디서도 잘 볼 수 없는 절경의 하나일 것이다. 특히 화성의 바닷가에 있는 당성의 꼭대기, 그 유명한 망해루터에서 내려다보는 서해는 정말 일품이다.

그 옛날에 신라시대의 대문장 고운 최치원도 눈물을 흘리며 적은 감동의 시를 남겼고 고려말의 목은 이색 선생도 망해루에 서서 서해를 내려다보며 떠오르는 당성의 역사에 감동하여 글을 남겼다. 시대의 대문호들이 그런 글을 쓴 것을 보면 분명 당성은 우리가 모르는 그 무엇이 있는 곳이다. 아마도 통일을 고민하는 이 시대에 새로운 면으로 다가오는 유적이기도 하다.

당성은 당항성이라는 이름으로 삼국사기에도 보이고 숱한 역사서에 그 이름이 출현하고 있는 저명한 성이다. 그래서 국가에서는 일찍이 이 성을 국가사적으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다. 망해루에 오르면 북한산을 비롯하여 서울 근교 경기도 서부의 모든 산들이 사방으로 보인다.

어쩌면 과학박물관의 우주관에 들어서서 비치는 세상을 보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그럴 정도이니 전략적인 요충은 틀림없을 것이고 바로 밑에 수로가 있어서 황해를 누비는 배가 들어왔을 당항포, 은수포, 화랑포, 마산포 등등 항구가 연이어 있었으니 전략적 요충은 누구가 보아도 알 수 있다.

삼국시대에 한반도에서 가장 구석진 곳에서 출발한 신라가 이 성을 차지하고는 절대로 내놓지 않았던 그 이유를 알만하다. 바로 당나라와의 교역로를 지키는 성이었기 때문이다.

오래전에 실크로드의 중간관문격인 중국 서안의 법문사를 방문하였을 때 지하수장고에서 보았던 금으로 만든 잔과 그릇들이 너무도 인상적이었는데 바로 경주 고분에서 출토된 것들을 연상케 하는 점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 그릇들도 이 곳 당성을 지나지 않았을까?

당성이 일반인들에게 많이 알려진 것은 바로 우리나라 불교의 거목인 원효와 의상의 전설 때문일 것이다. 의상은 당나라로 공부하러 갈 때 이 당성에서 출발하였고 원효는 이곳으로 오다가 해골의 물을 마시고 깨닫는 바가 있어서 의상과 헤어져서 경주로 돌아가 해동종이라는 우리나라의 특별한 불교종파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설화는 바로 황해 속에서 고대사에 있어서 당성은 바로 중국과의 교역만이 아니라 문화교류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관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백제의 의자왕이 이곳을 탈환하려고 할 때 신라의 선덕여왕이 황급히 당에게 구조요청을 하여 막아내는 것을 보면 땅이나 신라 쌍방에 큰 이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이 통일의 시대에 당성이 의미가 있을까? 당성이 있는 경기만 일대는 삼국의 세력이 교차하던 곳이었지만 결국 신라의 진흥왕에 의해서 점령된 이후에 삼국통일을 할 때까지 한 번도 빼앗기지 않은 곳이다.

신라의 선덕여왕의 원교근공의 전략으로 백제를 포위하고 압박하여 결국 무너뜨리는 과정은 오늘날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통일이라는 과제를 생각하는데 역사적인 모델을 제공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우리는 통일을 위하여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세력들 속에서 장기적인 국제 전략으로 정말 끈기 있으면서 유연하고 현명하게 대처하면 통일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현명하게 대처 얼마 전 중국 전승절에 참석하여 천안문루에 시진핑과 같이 선 박대통령의 모습이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속의 당성의 이미지와 교차되는 것은 바로 그런 점 때문일 것이다.

배기동 한양대 교수•국제박물관협회 국가위원회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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