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앉은 가시방석은 꽃자리다!”
그 어수선한 틈에서도 당당히 한 자리 차지했던 것이, 구상 시인의 <꽃자리>가 새겨진 액자였다. 당시 이 원장은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라는 시구(詩句)를 자신의 인생 철학으로 밝혔다. 10여 년만에 그를 다시 만나러 가는 길, 머릿속에는 그 구절이 맴돌았다.
올초 55년간 예술행정가로서의 삶에서 공식 은퇴를 선언한 그가 여전히 새로운 자리에서 꽃을 피울 열정이 남아 있는 지 궁금해졌다.
이 원장은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의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문화공보부 정책연구관으로 문화예술계에 발을 디뎌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서울예술단, 세종문화회관, 예술의전당, 성남문화재단과 성남아트센터, 충무아트홀 등 국내 주요 문화예술기관을 운영했다.
평생 무대 뒤에서 살아온 이 원장이 공연장 밖 일상의 헛헛함을 어찌 이겨내고 있을 지 쉽게 그려지지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다시 만난 그는 한 시간이 넘는 인터뷰 내내 청춘 못지 않은 패기와 노익장을 과시했다. ‘카르페디엠(Carpe Diem)’을 강조하며 아이처럼 미소짓는 그의 미소 끝에 소박한 꽃 한 송이가 만개한다.
“어딜 가든, 무엇을 하든, 그것이 혹여 가시방석이라도 꽃자리로 만들면 됩니다. 저는 항상 그렇게 즐기는 것만 생각해요!”
Q 은퇴식에서 눈물을 흘렸다. 어떤 마음이었나.
A 문화예술 현장에서 두 번째 흘린 눈물로 기억한다. 처음은 서울예술단 단장 퇴임식 때다. 열악한 상황에서 함께 전국을 돌며 공연했던, 한 식구같은 단원들이 울어서 덩달아 울었다.
행정을 담당하고 기관장이 되면 예술인과는 오히려 접촉하기 힘든데, 계속 무대 뒤에서 만나고 공연 뒤풀이하면서 쌓은 정이 참 무서운 것이라는 것을 느꼈었다. 충무아트홀에서 가진 은퇴식에서도 직원이 송별사를 하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고, 그게 사진으로 보도됐다. ‘살아오면서 잘했구나’하는 것을 그날에서야 느꼈다.
Q 우리나라 공연계 산증인, 산역사다. 후회는 없나.
A 72년 4월 진해 벚꽃놀이 행사의 공연을 기획했는데, 그 때 박정희 대통령 내외분과 단 셋이 한 테이블에 앉아 공연을 봤다. 고위 공무원과 기자들, 3천여명 관객까지. 그들이 나를 힐끔힐끔 보는 시선에 나도 모르게 우쭐해졌다.
당시 청와대 출입 기자들의 권위가 남다를 때인데 ‘일개 사무관이 어떻게 대통령하고…’라는 모욕적인 언사에 대들었다. 뒤돌아서는 순간 후회했다. 더 머리를 숙여 겸손해야만 했다.
내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으쓱했고, 내 의도와 달리 대통령 측근으로 오해받기 십상이었다. 그 사건이 화근이었지만 곧 나를 겸허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벼는 익을 수록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평생 기관장으로서의 경영 방침이 됐다.
Q 약이 된 것 같다. 정치와 예술의 관계에서 많은 문제가 발생하는데, 정치 바람 타지 않는 예술경영인으로 남았다.
A 많은 사람들이 내가 분명 정치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치적 관계를 맺기도 수월하고 예산도 많은 기관들을 제쳐두고 당시로선 바닥에 있던 서울예술단을 선택했을 때에도 의아해했다. 그만큼 문화예술을 좋아했다. 청소년 시절 극장 맨 앞자리에서 쇼를 봤고, 하루에 한 편의 영화를 볼 만큼 광이었다.
서울예술단에서 5년 5개월 동안 단장하다가 특진해 예술의전당 사장이 됐다. 파격적인 인사였다. 3년 임기 중 정권이 바뀌었지만 변화없이 남은 인기를 채웠다. 이어 세종문화회관 사장, 이어 성남이나 충무아트홀까지 운 좋게 모두 공채없이 공연장을 운영했다.
특히 내가 보수 성향인데도 나를 스카우트한 지자체장들이 진보 성향의 정당 출신인 경우가 많았다. 자화자찬인 것 같지만, 문화예술에 대한 애정과 현장에서부터 나의 정직과 철두철미한 추진력이 소문나고 인정받았기 때문인 것 같다. 격 높은 문화예술 작품을 흥행하게 이끌면서 공연장의 위상을 높이는 것에만 몰두하면, 투명하면 정치바람 탈 일 없다.
Q 성남에서도 그 추진력이 무기가 됐나.
A 서울 강단에 있을 때인데 성남 시청의 한 과장이 이력서를 줄 수 있냐고 했다. 다들 왜 성남으로 내려갈 결정을 하냐고 말렸었다. 그만큼 성남시는 문화예술계에선 불모지였다. 서울에 있던 내가 상임이사(사장)로 온다니 지역 예술인들이 ‘서울의 잡놈 부르주아에게 예산 주면 안된다’고 반대도 했다.
문화공간을 통한 성남시의 구도심과 신도시간 융합ㆍ융성을 주제로 한 세미나에 지역 단체장과 예술인 300여 명 모셔놓고, 주제와 상관없이 예산표 꺼내 어디에 쓸 지 함께 논의하자고 했다.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가장 고민했던 것은 성남아트센터 이름을 짓는 것이었다. 도시 이미지가 나빠 다른 이름을 지어야 한다는 사람이 많았다. 내 생각은 반대였다. 부정적 이미지의 성남시를 일으키려면 당장은 어렵겠지만 지역명을 반드시 포함해야 했다.
또 예술의전당은 이미 고유명사화 된 상황이었으니, 외국인도 금방 이해할 수 있고 도시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는 아트센터를 선택했다. 솔직하게, 정직하게, 투명하게, 정면돌파한 결과는 긍정적이라고 판단한다.
A 독특한 공연장으로 완성하기 위해 초연, 단독, 창작에 투자했다. 남들이 생각못할 때 앞서서 내걸고 한 것이 히트쳤다. 공연장 개관 전 유인촌 전 장관, 강지원 변호사, 이정희 현대 무용가 등 유명인들이 성남에서 함께하는 문화예술행사를 진행했고 지역방송에 지속적으로 영상을 띄어 주민들이 알 수 있도록 했다.
개막식때에는 종교계, 언론계, 문화예술계 등 300여 명을 초청했는데 모두 ‘생각보다 가깝다’며 놀라고 그들이 걸어다니는 홍보대사가 되어줬다. 정권이 바뀌면 연임이 힘든 국내 정세 속에 연임하면서 6년이나 근무했다. 경기도와 인연이 많은 것 같다. 성남에서 6년이나 있었는데 다시 용인(단국대)으로 왔으니….(웃음)
Q 최근 경기도가 산하 공공기관 중 경기도문화의전당 폐지 및 예술단 별도 법인 방안을 고민 중인데, 따끔한 충고를 했다.
A 기관장은 스스로 우러나온 마음으로 예술과 예술인을 사랑하고 인정해야 한다. 정치적으로 그 예술인들을 발판 삼아 활용하고 정치적 목적과 욕심이 앞서면 결국 모두 파국이다. 어딜 가나, 특히 지방은 여전히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을 한다.
각 지방마다 공무원들이 기관장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들의 행정은 문화적 마인드가 없는 상태여서 예술에는 관심없고 과오 없이 잘 있다가 다시 요직에 들어가는 목적으로 임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20여 년 전 예술의전당에 가자마자 전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를 조직했다. 정부도 인정하지 않고 예산도 없는, 그러나 국가가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해서 추진했다. 오늘날 그 조직이 250억원 가량을 쓸 정도의 큰 단체가 됐고 순수한 문화예술행정가와 기획자들이 정보를 공유한다.
지방의 문화예술을 활성화하려면 이 같은 조직을 확대하고 지역의 문화재단들의 격을 높여야 한다. 문화예술의 가치는 영원하다. 인간은 문화예술을 통해 최고의 행복을 느낀다. 지방은 주민의 행복을 충족시키기 위해 문화예술적 수준을 높이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Q 후학 양성에 몰두한다고 밝혔다. 소감과 계획이 궁금하다.
A 학생들 사이에 있다보니 젊어지는 것 같아 즐거운데 한편으론 고독하다. 비서가 없으니 커피도 내가 따라 손님 대접해야 한다.(웃음) 고독하다는 것은 내 시간을 갖게 됐다는 의미다. 책도 읽고, 젊은이들과 어울리고 행복하다.
후학 양성 뿐만 아니라 할 일이 또 생겼다. 단국대가 용인 죽전에 있는 지 모르는 사람이 많다. 단국대의 재정상태나 하드웨어, 소프트웨어가 몰라보게 윤택해졌는데 모르는 사람이 많아서 안타깝다. 지역 속 대학의 페스티벌과 이벤트를 구상 중이다. 이종덕이 있으니, 문화예술 한 판 해야하지 않겠나. 이제 여기를 내 꽃자리로 만들 것이다.
류설아기자
사진=전형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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