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건널목에서 기다리는 것조차 감시당하고 있는 것 같아 불쾌했다. 그보다는 이런 경보시스템이 왜 필요한지 이해가 되지 않아 화가 났다. 시각장애자를 위한 경보시스템이나 혼잡한 거리의 교통량을 확인해 교통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감지시스템이라면 당연히 필요하다. 하지만 빨간 신호 시 신호대기선 뒤에서 기다리는 것은 이미 사회적으로 합의된 약속이다. 이러한 사회적 약속의 준수 여부는 개인의 선택이고 또한 이를 지키지 않아 발생된 위험은 개인의 책임이다.
이런 맥락에서 사회와 개인의 책임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다. 사회는 구성원에게 명확한 지침과 기준을 제시해야한다. 그리고 개인은 정당한 절차에 따라 타당성을 획득한 사회적 합의라면 이를 지켜야만 한다. 사회적 약속을 준수할 것인지 아니면 위반을 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은 개인의 몫이다. 하지만 그 결과로 발생되는 위험 역시 개인의 책임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사회는 얼마나 타당하고 정당한 지침과 기준을 구성원들에게 제공하고 있는가? 그리고 개인은 얼마만큼 자신의 선택에 대해 책임질 준비가 되어있는가? 이 두 가지 문제는 결국 한국사회 가치 혼동의 원인이자 사회통합의 저해요소로 작용한다. 사회가 제시하는 원칙이 불명료할 때 개인의 선택은 혼란스럽고 책임소재도 불명확하게 된다. 동시에 아무리 사회가 정당하고 명확한 지침을 제시해도 구성원이 이를 준수하지 않는다면 사회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사회는 이 두 가지 모두 해당되는 것 같다.
요즘 우리 정부의 행태는 영화 ‘친절한 금자씨’를 떠올리게 한다. 영화에서 주인공 금자는 배려심 많고 친절한 사람으로 알려져있지만 실은 소름끼칠 만큼 잔인하고 악랄한 살인마이다. 굳이 스토리도 잘 기억나지 않는 오래된 영화 ‘친절한 금자씨’를 언급하는 이유는 이 영화의 주인공처럼 요즘 우리 정부가 정작 지켜야 할 원칙은 지키지 않은 채 친절함으로 겉만 번지르르하게 포장하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는 너무 친절하다! 다양한 사례가 있겠지만 필자가 경험한 신호등 경보 시스템이 그러하고, 최근 20여개 지자체에서 스마트폰 사용자를 위해 시범적으로 설치한 ‘횡단보도 바닥 신호알림 시스템’도 그러하다. 바닥신호 설치에 앞서 정부가 할 일은 걸아가면서 스마트폰을 사용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위험성에 대해 알리는 것이다. 즉 보행 시 스마트폰 사용을 개인 스스로가 자제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정부가 할 일이다. 그런데 사회적 합의를 지키지 않고 개인의 선택에 의해 발생된 잘못된 결과까지도 책임져주겠다고? 진짜 친절한 정부씨다!
정부의 정책이 진정성있게 느껴지기 위해서는 사회적 합의와 공동의 가치가 담겨야 한다. 이에 대한 고민 없이 개별적이고 일회적으로 양산된 정책은 아무리 친절해도 감동이 없다. 사회구성원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는 정책은 친절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인을 규제하고 통제하는 수단으로 인식될 뿐이다. 공공선을 위해 필요한 감동적인 정책을 제시하고 이를 책임감 있고 진지하게 실천하는 정부야말로 진정으로 ‘친절한 정부씨’일 것이다.
요즘과 같이 포퓰리즘에 기대어 친절한(?) 정책들을 무분별하게 내놓다가는 언젠가‘너나 잘하세요’를 듣는 무능한 정부로 전락될지도 모른다. 정당한 절차를 통해 사회 구성원이 공감할 수 있는 정책을 구현하는, 친절하되 위엄있는 정부를 기대해본다.
최순종 경기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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