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땅 못 밟고…” 상봉 차례 기다리다 이미 7만여명 세상 떠
텔레비전 화면 속으로 가수 패티김의 애잔한 노래 가사가 흘러나올 때면 전국이 눈물바다를 이뤘고, 상봉에 성공한 가족들이 “맞다 맞아! 찾았다”라며 외칠 때면 옆에 있는 사람과 얼싸안고 함께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한국방송공사(KBS)가 특별연속 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를 방송하던 1983년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당시 방송을 통해 서울, 부산 등 대한민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1만957명의 이산가족들이 헤어진 가족들을 만났다. 그로부터 34년이 훌쩍 지난 2017년, 대한민국의 이산가족들은 어떠한 삶을 살고 있을까?
남북으로 흩어진 지 벌써 64년이 지났지만 헤어진 가족들의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안타까운 현실. 이산가족은 남북 분단의 가장 큰 아픔이라 할 수 있다. 본보는 창간 29주년을 맞아 이산가족의 실태를 점검하고, 앞으로 풀어야 할 과제는 무엇인지 짚어본다.
■ 이산가족 고령화 추세 ‘뚜렷’
통일부의 ‘이산가족정보통합시스템’에 따르면 대한적십자사에 남북 이산가족찾기 신청을 한 사람은 지난 1988년부터 올해 6월 말 현재 13만 1천200명이다.
이 중 6만 513명이 현재까지 생존(사망자 7만 687명)하고 있으며, 신청자 중 사망자 수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지난 6월 한 달에만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 중 258명이 숨을 거뒀다.
지난 6월 말 기준으로 이산가족 생존자의 연령대는 80대가 2만 5천991명(43%)으로 가장 많았으며, 70대 1만3천873명(22.9%), 90세 이상 1만 1천866명(19.6%), 60대 5천81명(8.4%), 59세 이하 3천702명(6.1%)순이었다. 80대 이상이 3만 7천857명으로 전체 62.6%에 달할 정도로 신청자의 고령화 추세가 뚜렷이 나타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산가족 가족관계별로는 부부ㆍ부모ㆍ자녀가 2만 7천9명(44.6%)으로 가장 많았고, 형제ㆍ자매가 2만 5천131명(41.5%), 3촌 이상 8천373명(13.9%) 등의 순이다.
■ 이산가족 상봉의 역사
휴전 이후 적대적 남북관계가 지속되면서 1970년대가 될 때까지 남북 이산가족문제는 아무런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1971년 8월12일 당시 최두선 대한적십자사 총재의 남북적십자회담 제의를 북한의 조선적십자회가 수용하면서 분단 이래 남북대화의 첫 물꼬를 트게 됐다.
마침내 1972년 8월 평양에서 역사적인 제1차 남북적십자회담이 열렸다. 이후 1973년 7월까지 1년 동안 7차례의 본회담이 서울과 평양에서 번갈아가면서 개최됐다.
그러나 3~7차례 본회담은 쌍방 사이의 신경전과 상호 비난으로 진전을 보지 못했고, 결국 1977년 12월 제8차 본회담 개최를 위한 실무접촉을 끝으로 더는 진행되지 못한 채 중단, 남북관계가 위기를 맞게 된다.
이에 따라 80년대 중반까지 이산가족상봉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후 1985년 5월에 있었던 제8차 남북적십자회담에서 처음으로 이산가족 고향방문단 교환을 하기로 합의함에 따라 같은 해 8월15일, 남과 북의 이산가족들은 민간차원에서 역사적인 상봉을 하게 된다.
■ 이산가족찾기와 상봉을 위한 노력
1985년 남북 이산가족 고향방문이 이뤄진 이후 남북 간에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위한 논의는 많았지만, 1999년까지 이산가족상봉은 민간차원에서만 이뤄졌을 뿐 공식적으로는 단 한 차례도 이뤄지지 않았다.
하지만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남북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정부는 이산가족 교류 절차를 간소화하는 등의 노력으로 2000년 6월15일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됐고, 6ㆍ15공동성명을 통해 남북 화해와 교류 협력을 천명했다. 이에 따라 이산가족상봉을 위한 남북적십자회담이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남북정상회담의 합의에 따라 같은 해 8월15일~18일, 역사적인 제1차 이산가족상봉이 이뤄지게 된다. 당시 총 1천172명의 이산가족들이 가족을 만나는 기쁨을 누렸다. 2003년 노무현 정권 때는 평화번영정책의 추진이라는 기조 하에 남북 교류와 협력을 지속해 나가 총 3차례의 이산가족상봉(제6차~8차)이 이뤄져 역대 가장 많은 상봉 횟수를 기록했다.
2004년에도 제9ㆍ10차 이산가족상봉이 이뤄져 이산가족상봉이 정례화ㆍ제도화됐다. 하지만 2015년 10월20일부터 26일까지 금강산에서 열린 제20회 이산가족상봉 행사를 끝으로 현재까지 21차 상봉 행사는 개최되지 못하고 있다.
권혁준기자
“北에 두고 온 동생, 소식이라도 들었으면”
“기회가 된다면 죽기 전에 북에 두고 온 동생들 꼭 한번 만나고 싶습니다”
수원시 팔달구 자택에서 만난 노종태 할아버지(82)는 70년이 다 돼가는 6ㆍ25전쟁 시절, 피난가던 기억을 연신 꺼내들었다. 황해도 옹진군 부민면이 고향인 노 할아버지는 1ㆍ4후퇴 당시 가족들과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아버지와 누나, 매형, 남동생과 함께 서울로 향했다.
그렇게 다시는 고향으로 영영 돌아가지 못한지 67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의 머릿속에는 고향에 남겨 둔 어머니와 여동생, 막내 남동생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할아버지는 남한에 내려와 경북 성주에서 남은 학창시설까지 보낸 뒤 군 생활 시절 대구에서 지금의 부인을 만나 결혼했다.
수원이 ‘제2의 고향’이라는 노 할아버지는 38년 교도관 생활이 응축된 교정대상을 자랑스럽게 펼쳐보였다. 부인과 슬하에 3남매는 그에게는 언제나 고향의 그리움을 잊게 해주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노 할아버지는 “북에 있는 가족을 만나기 위해 이산가족상봉 신청서를 작성해봤지만 잘 안됐다”라며 깊은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근처 도서관을 찾아 이산가족상봉 명부를 뒤적이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정부의 이산가족상봉 정책에 대해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보여주기식의 이산가족 상봉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남북한이 서로 대화를 통해 하루빨리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졌으면 좋겠다”고 작은 소망을 말했다. “아마 우리 어머니가 살아계신다면 115살이실 겁니다. 돌아가셨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은 늘 있지요. 동생들이 잘 살아있는지 소식이라도 전해들었으면 합니다. 제발 부탁합니다”. 어느새 할아버지의 눈은 고향에 두고 온 가족들을 그리워하는 만큼이나 붉게 충혈된 채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권혁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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