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국회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개헌에 대한 국민들의 시선은 곱지 않다. 아홉 차례의 개헌 가운데 일곱 차례는 발췌 개헌, 사사오입개헌, 3ㆍ15부정선거, 유신헌법 등 독재자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거나 연장하기 위해 시도했기 때문이다. 권력자들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번번이 희생당했던 뼈아픈 경험이 정치권이 주도하는 개헌 논의에 거부반응을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어떻게 하면 개헌에 대한 국민들의 트라우마가 치유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지난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심판 결정문 전문에 명확히 드러난다. “헌법은 대통령을 포함한 모든 국가 기관의 존립근거이고, 국민은 그러한 헌법을 만들어 내는 힘의 원천이다” 그렇다. 헌법은 대국민 명령문이다. 헌법을 만들어내는 힘의 원천은 국민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헌 과정은 이 땅에 발을 딛고 살고 있는 수많은 시민들의 요구와 열망을 제대로 반영하는 것이 핵심과제가 될 수밖에 없다.
또 다른 과제는 내년 지방선거 전까지 개헌 특위에서 높은 수준의 합의안을 만들어낼 수 있냐는 것이다. 21세기 들어서 과거와 다른 변화의 속도에 대응하고, 권력구조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회적 난제 해소와 기본권 확대를 위해 30년 묵은 헌법을 새롭게 고쳐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헌법개정특별위원회 홈페이지에 게재된 헌법 개정 주요의제만 보더라도 총강 및 기본권, 정부형태, 지방분권, 정당선거, 재정 및 경제, 사법부, 헌법개정절차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 60개가 쟁점사항으로 논의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이에 대한 해법은 시민들이 직접 다양한 의제들을 심도 있게 논의할 수 있는 상설기구인 ‘시민의회’를 국회에 설치하는 것이다. 시민의회는 민주성과 공정성 확보를 위해 지역ㆍ연령ㆍ성ㆍ계층 등 인구비례에 의한 무작위 추출방식으로 시민대표를 구성하여 공공사안에 대해 심의하는 숙의민주주의 모델이다.
개헌 과정에서 시민의회는 개헌 의제에 대해 상시적으로 심의하고 이를 통해 만들어진 개헌안으로 지방선거, 국회의원선거, 대통령 선거 때마다 국민투표를 실시하자는 것이다. 시민의회는 캐나다, 네덜란드, 호주에서는 선거법 개정을, 아이슬란드와 아일랜드에서는 개헌을 의제로 실시하였다. 한국에서는 지방자치단체장 매니페스토 공약이행 평가에 적용하여 숙의민주주의 경험을 축적하고 있다. 신고리원전 5ㆍ6호기 공론화위원회도 이와 유사한 방식의 시민참여제도다.
정치권이 주도하는 개헌은 정치적 이해관계가 강력하게 결부되어 있어 여야간 이견을 조정하지 못하고 표류할 가능성이 높다. 합의안이 만들어지더라도 시간 제약을 이유로 시민들의 민의는 반영되지 않은 채 권력구조 개편, 대통령 임기 등의 의제에 한하여 합의안이 통과될 수 있다. 언제 다시 재개될지 모르는 개헌 논의를 또 얼마나 넋 놓고 기다려야 할지도 알 수 없다.
국민이 주도하는 상시개헌 체제를 완성해야 한다. 시민의회의 상설화가 권력자들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번번이 희생당했던 잘못된 개헌의 역사를 바로잡아 줄 것이다. 국민이 헌법을 만들어 내는 진정한 힘의 원천이 되는 길이라 믿는다.
오현순 매니페스토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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