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여동생 그리움에 하루하루 버텨… 죽기전 꼭 만났으면”

2003년 이산가족상봉 신청했지만 가족 못찾은 이영표 옹
남북고위급회담에 희망 생겨… “미안하다는 말 전하고파”

▲ 남북 고위급회담이 열린 9일 1.4 후퇴 당시 북측에 있던 조부모, 어린 동생과 헤어지게 된 이영표(81)옹이 수원시 권선구 자택에서 남북 회담 관련 뉴스를 시청하며 북에 있는 가족과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다. 조태형기자
▲ 6·25전쟁 1·4 후퇴 당시 북한의 조부모, 어린 동생과 헤어진 이영표(81)옹이 9일 수원시 권선구 자택에서 남북 고위급회담 관련 뉴스를 시청하며 북에 있는 가족과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다. 조태형기자
“동생한테 꼭 해줄 말이 있습니다. 죽기 전에 이번만큼은 꼭 만나보고 싶습니다”

 

수원 권선구 고색동에 사는 이영표옹(81)은 남북고위급회담 관련 뉴스를 보고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를 이산가족 상봉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이 생겨서다. 2년 만에 성사된 남북고위급회담에 거는 이 옹의 바람은 간절할 수밖에 없다. 이 옹은 “앞으로 살 날이 얼마나 더 남았을지 모르겠지만 죽기 전에 10살 터울 여동생을 꼭 만나고 싶다”면서 “마지막 기회인 만큼 이번만큼은 제발 꼭 이산가족상봉이 이뤄지길 바란다”고 울먹였다.

 

북녘의 황해도 서흥군이 고향인 이 옹은 한국전쟁이 반년째 지속되던 1950년 12월 어느날 열살짜리 여동생은 물론 가족들과 생이별을 해야 했다. 당시 중공군이 내려온다는 소식에 동네가 아수라장이 됐지만, 이 옹과 부모님, 그리고 동생 2명은 집을 두고 떠날 수 없다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셋째 여동생을 두고 피난길에 올랐다. 당시 이 옹은 “난리가 금방 끝날 테니 이틀만 피신해 있어라”는 할아버지의 말씀을 철썩같이 믿었지만, 결국 그 피난길이 이 옹과 여동생을 68년간 갈라놓았다.

 

하루종일 이어지는 총성과 폭탄 소리 속에서 피난생활을 이어가던 이 옹은 집에 두고 온 여동생을 떠올리면서 ‘돌아가야 한다’고 수천 번 되뇌었지만, 무서운 기세의 중공군에 떠밀려 개성과 서울을 거쳐 대전까지 내려와 버렸다. 그리고 이 옹이 고향으로 돌아갈 틈도 없이 휴전 협정이 맺어졌고, 북녘 고향으로 갈 수 있는 길은 사라져 버렸다.

 

이후 이곳저곳을 떠돌던 이 옹은 수원 장안구 연무동의 난민촌에 자리를 잡고, 닥치는대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살아있어야, 그리고 돈을 벌어야만 북녘에 두고 온 여동생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이 옹은 “그때는 내가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니었다”면서 “그저 살아야 여동생은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하루하루를 버텼다”고 회상했다.

 

가까스로 수원에 자리를 잡은 이 옹은 가정을 꾸리고, 자식들 뒷바라지를 하느라 정신없이 지내다 2003년에야 뒤늦게 이산가족상봉 신청을 했다. 하지만 이 옹에게까지 가족을 만날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고, 정권이 바뀌면서 남북관계가 악화된 탓에 이 옹의 희망은 점점 희미해져만 갔다.

 

그러던 9일, 2년 만에 열린 남북고위급회담을 지켜보는 이 옹의 마음은 애절하기만 하다. 이 옹은 “생사도 모르는 여동생이지만, 꼭 한 번 만나서 해야 할 말이 있다”면서 “그때 함께 데려가지 못해 미안하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그 말을 꼭 전하고 싶다”며 눈물을 훔쳤다.

 

대한적십자사에 따르면 1988년부터 지난해 12월31일까지 이산가족상봉 신청자는 총 13만 1천344명으로, 경기도에만 1만 7천524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김승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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