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에 대한 책을 집필하면서 잠시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았던 시간이 있었다. 치매에 걸린 아내와 함께 손 꼭 붙들고 연탄가스의 힘을 빌려 죽음을 억지로 부른 장면이 아직도 인상에 깊이 남아 있다. 그렇지만 그때까지도 연구의 대상 혹은 치매와 연결시켜 따져 보아야 할 사안이었을 뿐, 구체적인 일로 다가오지 않았다. 나는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려는가? 죽음을 맞을 각오는 되어 있는가? 죽음 뒤에는 어떻게 될까?
생각해보면 우리의 문화와 가치관이 더 큰 원인이 아닐까 싶다. 어려서 할아버지나 할머니는 집안에서 임종하셨다. 최근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집에서 임종을 맞이하고 싶은 바람이 60% 정도지만 실제로는 75%가 병원 등 의료기관에서 임종을 맞이한다. 어려서 처량한 만가(挽歌) 소리 울려 퍼지고 흰 깃발들 나부끼는 가운데 상여 나가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보곤 했다. 모르긴 해도 나 역시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죽음을 맞을 공산이 크다.
우선은 자식이며 주변 사람들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그러고 싶은가? 죽음에 대해 생각해본 일이 드문 만큼 이런 생각 역시 생경하기만 하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연명치료의 문제도 내 문제로 다가왔다. 내 죽음이 가족들이며 주변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준비가 되어 있는가? 전혀 아닌 것 같다. 한 마디로 준비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유언장도 없고, 연명치료나 장례 절차 등에 대해서도 책에서는 준비해야 한다고 썼으면서 정작 준비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찾아올 죽음을 어떻게 맞고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먼저 자서전이라도 쓰듯 내 인생을 찬찬히 돌이켜 보며 씻어야 할 흔적과 바로잡아야 할 일들을 찾아서 처리해야 하겠다. 그러면서 하루하루를 언제 찾아올지 모를 손님 기다리듯 정리하며 살아가야 하겠다. 유럽의 경우 중세부터 죽음은 서양화 속에 자주 등장한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즉 죽음을 생각하라, 기억하라는 정신과 이어진다. 그것은 인생의 허무, 죽음의 비극을 떠올리자는 게 아니라 언제 죽을지 모를 인생이니 그만큼 더 알차게 살자는 태도로 해석된다. 그럴듯하다. 우리 조부모 세대만 해도, 아니 부모님 세대까지만 해도 수의며 묏자리를 준비하는 것이 전혀 낯선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의 사회 분위기에서는 느닷없이 죽음을 맞아 경황없이 떠나버리는 것이 더 일상이 된 것 같다. 그렇지만 그런 인생 마무리는 아무래도 스스로의 인생을 더 하찮게 만드는 동시에 주변 사람들에게 짐이며 허물을 남기는 일이다. 죽음을 터부시하기만 한다면 개인들이 그런 준비가 쉽지 않다. 결국 제도와 문화 차원에서도 죽음 또는 임종의 복지는 중요하다. 인생의 마무리와 임종에 복지의 혜택이 미쳐 저마다 아름다운 마무리를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개인 차원의 복이요, 사회와 공동체의 건강에도 큰 덕이 된다.
김근홍 강남대 교수·한국노년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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