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인터뷰] 정미섭 2018 아름다운 납세자 (오산컨벤션웨딩홀뷔페 대표)

아낌없는 나눔·성실 납세… 지역사회 발전 이끄는 ‘女工 출신’ C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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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키운 것은 8할이 결핍이었다.” 15세 여공에서 매년 1천여 건의 행사가 열리는 지역 대표 웨딩홀의 경영자가 되기까지, 정미섭 대표(46)는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기에 자신을 단련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정 대표는 2005년부터 오산컨벤션웨딩홀뷔페를 운영해오며 지속적인 장학금 기부와 봉사를 실천하고 있다. 또 사기를 당하거나 메르스 같은 외부 요인으로 경영상 위기를 맞았지만 새로운 사업에 진출하며 신규채용을 확대하는 등 지역사회에 이바지한 공로로 지난 3월 국세청의 ‘2018 아름다운 납세자’에 선정됐다.

 

어린 시절 결핍을 컴플렉스로 남겨두지 않고 오히려 이를 원동력으로 삼아 쉼 없이 달려온 정 대표. 자신을 ‘열정 에너자이저’라고 소개하는 그의 인생 스토리를 들어본다.

 

Q. 국세청의 아름다운 납세자에 선정되면서 어린 시절 역경을 딛고 성공한 이야기가 화제가 됐다.

A. 평택 시골마을에서 6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시도때도없이 빚쟁이가 집으로 들이닥쳐 두 다리 뻗고 맘 편히 자보는 것이 소원일 정도였다. 중학교 때는 생활보호대상자였고 결국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계량기 만드는 공장에 들어가며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친구들은 모두 학교에 가는데 나만 석회가루 날리는 공장으로 출근하면서 눈물을 흘릴 때도 많았고 부모님에 대한 원망도 컸다. 그러면서 ‘반드시 해내겠다’는 의지가 생겨났다. 잔업을 마친 밤 9시부터 주경야독하며 1년 뒤 평택 한광여고에 입학할 수 있었고 혼자 힘으로 졸업한 뒤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전문대학에 입학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한동안은 어린 시절 얘기를 감추고 살았지만, 이제는 자신있게 잘 살아왔다고, 그 시절을 통해 한층 성장했다고 얘기할 수 있게 됐다.

 

Q. 웨딩 사업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A. 대학졸업 후 의류회사에 다니다 부도로 일자리를 잃게 되면서 평생 일할 수 있는 직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2000년 스물일곱 살부터 자영업을 시작했다. 그게 바로 웨딩숍이었다. 신부 메이크업부터 드레스, 식장 대여, 식 진행, 신혼여행 예약까지 결혼식 전반을 담당하는 컨셉이었다. 

모아놓은 돈 2천만 원에 1천700만 원 대출을 받아 시작하려다 보니 시내가 아닌 인천의 공장지대에 숍을 차릴 수밖에 없었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직접 광고벽보와 현수막을 붙이고 다니고 인근의 공장과 회사를 돌아다니며 주변에 결혼할 사람 있으면 소개해달라고 발로 뛰었다. 지하방에서 살며 밤마다 드레스를 빨고 그 무거운 걸 아침에 어깨에 짊어지고 출근하던 일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 추억이 됐다.

 

Q. 사업을 하면서 부침도 많았을 텐데 그럴 때마다 어떻게 극복했는지 궁금하다.

A. 고객들이 나의 진정성을 알아준 덕분에 사업이 날로 커졌고 2005년에는 이곳 오산컨벤션웨딩홀을 운영하게 됐다. 인맥도 없는 새로운 곳에서 사업을 시작하려니 어려움이 있었고 영업이사로 소개받은 사람에게 사기를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지역사회에서 인정받은 것은 남들과 달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매일 새벽마다 관광버스에 올라 지역 어르신들에게 인사드리며 웨딩홀 홍보를 하고 음료를 협찬했다. 

이런 노력에 사기로 생긴 빚을 다 정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업은 파도와 같았다. 2015년에는 메르스라는 복병이 나타났다. 300명 예약을 받았는데 결혼 당일에는 친인척 100명만 모습을 보였고 곧이어 지역에 행사 자체가 없어져 버렸다. 살아남기 위해 고민하다 파티팩 서비스를 시작했다. 밖에서 잔치를 못하니 집에서 소규모로 할 수 있도록 잔치음식을 진공 포장해 택배로 보내는 것이다. 그렇게 출장뷔페전문 브랜드를 만들게 됐다. 

또 혼인율과 출산율이 감소하면서 웨딩산업 자체에 위기가 왔다. 이에 대한 돌파구로 도시락 사업과 구내식당 사업도 시작하게 됐다. 사업을 하다 보니 무엇이든 한 번에 갑자기 고꾸라지는 것은 없는 것 같다. 위험을 감지하고 변화와 혁신을 주도해야만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Q. 성공을 위한 자신만의 무기가 있다면.

A. 열정이다. 항상 꿈의 영토를 확장하고 살아야 한다. 능력 있는 사람이 하는 게 아니라 하려는 사람에게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나도 늘 머리가 개운하지 않고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지 불안 초조하다. 하지만, 매일 아침 큰 소리로 “나는 성공할 것이다”를 세 번씩 외치고, 다이어리에 좋은 글귀나 나에 대한 다짐을 적으며 내공을 다지고 있다. 

도시락사업을 시작할 때는 매일 다이어리에 ‘도시락매장 1층 오픈’이라는 목표를 수백 번씩 빼곡하게 적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목표를 정하고 움직이느냐 아니냐는 천지차이다. 그렇게 간절하게 하다 보니 정말 지난해 도시락 매장을 웨딩홀 건물 1층에 낼 수 있었다.

 

Q. 앞만 보며 달려온 것 같은데 지치진 않나.

A. 물론 지칠 때도 많았다. 가장 힘들었던 때가 2009년이었다. 수억 원의 사기를 당한 지 얼마 안 돼 설상가상으로 신장암 진단까지 받았다. 웨딩홀 사업을 접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 나를 잡아준 것이 바로 사람들이었다. “사장님, 포기하지 마세요, 우리가 해볼 테니까 우리를 믿고 요양하고 오세요”라고 말하던 직원들의 한마디가 나를 일으켜 세웠다. 

또 생각지도 못했던 분들이 도움을 주시고 우리 웨딩홀을 선택해주셨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너무 소중하고 감사했다. 그때 ‘사람만이 답’이라는 인생의 정답을 알았다. 지금도 가끔 내가 잘하고 있나 의심이 들 때도 있지만 나를 믿는 사람들, 나의 가족들을 생각하며 힘을 내곤 한다.

 

Q. 꾸준히 장학금을 기부하는 등 사회공헌 활동도 활발한데.

A. 초등학교 졸업식 때 어느 독지가로부터 장학금을 받았다. 큰돈은 아니었지만, 현금을 보고 너무 기뻐 엄마랑 부둥켜안고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다짐했다. 나도 크면 이렇게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 장학금을 주는 사람이 돼야겠다고. 이후 2005년부터 장학금을 꾸준히 전달해오고 있다. 

모교인 산대초등학교 아이들이나 우리 아르바이트생 중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선별해 전달하기도 하고 사회단체에 기부도 하고 있다. 웨딩홀 이름으로 기부한 금액까지 합치면 연 7천만~8천만 원가량 된다. 또 지역 내 봉사단체나 후원회 등에도 몸담고 있으며 재능기부로 청소년 대상 강의와 성공경영특강도 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줄 수만 있다면 살아있는 한 이같은 지역사회 환원활동을 꾸준히 이어가고 싶다.

 

Q. 힘든 청년기를 보냈고, 현재는 청년들을 고용하고 있는 입장에서 청년실업 문제에 대한 생각은.

A. 물론 열정으로 사는 이들도 있지만 예전에 비해 젊은이들의 책임감이 많이 약해졌다는 생각을 한다. 일자리가 없다고들 하는데 우리도 직원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새벽부터 나와 밤늦게까지 몸을 쓰는 일이다 보니 학력이 높아진 청년들이 힘든 일을 찾아서 하려 하지 않는다.

여기에 최저임금도 오르고 속속 폐업하는 자영업자들도 많아지면서 나 자신도 불안하고 힘든 시기가 또 왔다는 느낌이 있다. 하지만, 젊은 시절 나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하고자 하는 열정과 실천력이 강했고 남들의 두 배로 움직였다. 청년들도 ‘내가 잘하면 내가 오너가 될 수 있는 시기가 빨라진다’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기회는 대기업보다 중소기업에 더 많다. 인식을 조금만 달리해 힘든 시간을 견뎌냈으면 한다.

 

구예리기자

사진=전형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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