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오늘은 전두환의 군부 통치를 끝내고 직선제 개헌을 이룬 날이다. 32년이 지난 오늘, 국회는 두 달째 ‘휴업’ 중이고 촛불의 염원이 무색해지고 있다. 정치권의 지체된 정치의식과 대의 민주주의의 후진성은 1987년 전으로 돌아간 느낌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시민’은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부단히 노력 중이다. 타인이나 국가에 종속된 수동적 객체가 아니라 자기 결정권을 가진 정치적 주권자로서 다양한 영역에서 오늘도 달리고 있다. 또한 시민(조직)과 공공 간 협력적 거버넌스를 모색하며 사회문제를 함께 해결하고 책임을 공유하는 등 절차적 민주주의를 공고화하기 위한 많은 실천을 이어가고 있다.
그에 비하면 경제ㆍ사회ㆍ문화적 민주주의의 공고화는 아직 요원하다. 절차적 민주주의를 넘어 더 확장된 실질적 민주주의에 대한 숙고가 다시금 요구되고 있다. 경제적 측면에서 보자면, 빈부 격차는 좁혀지지 않고 있으며 약소국의 강대국 종속은 더 심화하고 있다.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는 것이 경제적 민주주의의 1순위 과제다. 불평등이 경제성장을 촉진할 것이라는 자유주의자들의 전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전지구적 컨센서스가 형성되고 있다. 자본주의의 상징인 IMF, World Bank마저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경제적 불평등을 성장의 주요 저해요인으로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암울한 경제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경제는 기득권자와 자본권력을 가진 집단이 정치ㆍ경제적 질서를 지배하며 경제생태계는 파괴되어 가고 있다. 경제적 양극화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원청기업과 하청기업 간 불공정한 관계이다. 하청기업은 납품단가 후려치기, 중소기업 기술 탈취 등 불공정 관행에도 원청에 눈치를 보며 울며 겨자 먹기로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불공정 거래에 따라 기업 간 이익의 격차가 발생하고 그 격차는 임금노동자의 임금격차로도 이어진다. 자본과 기술의 우위를 점한 경제주체가 계속적으로 이익을 취하는 악순환의 연속인 것이다. 그 불평등한 구조에서 서로 싸우고 피해보는 것은 을과 을들이다. 경제적 우위를 차지한 일부에게 그 이익이 돌아가거나 경제적 약자를 희생시키는 경제가 아닌 경제 주체 간의 상생을 위한 경제민주화가 실현돼야 한다.
미국의 교육학자 존 듀이가 말했듯이 민주주의는 정치형태만을 가리키지 않으며 공동의 생활양식으로 그 의미는 확장된다. 사회ㆍ문화적 민주주의, 생활의 민주주의로 불리는 이러한 민주주의는 일상에서 보다 가까이, 우리 곁에서 인간의 존엄을 지켜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최근에 시민의 공분을 샀던 오너 갑질 논란, 소수자 혐오, 정치권ㆍ문화계의 성폭력 사건, 비정규직 안전사고는 모두 타자를 부정하고 타자의 삶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에서 비롯됐다. 인간의 존엄성 실현, 표현의 자유와 다양성 추구, 위계와 명령이 아닌 수평적이고 소통에 기초한 관계, 사회적 소수자와 공존과 연대, 개인의 이익추구와 사회적 신분을 넘어설 줄 아는 위엄 등이 실질적 민주주의를 향한 실천적 과제다.
영화 <기생충>에서 기택은 아들 기우에게 계획은 절대 이뤄지지 않는다 했다. 그래서 아버지를 구해내겠다는 계획은 불가능할지 모른다. 불평등한 시스템을 극복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사회는 변화를 위한 염원과 계획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군부독재를 종식시켰고 민주주의를 쟁취했으며 주권자로서 정치적 권리를 보장받기에 이르렀다. 이제 민주주의의 공고화, 더 나은 민주주의를 향해 가야 한다. 남의 손해를 통해 자신은 이익을 얻는 기생이 아니라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서로 융통하는 ‘유무상통(有無相通)’이라는 공존과 상생의 길로 가야 한다.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오현순 매니페스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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