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격적으로 이뤄진 남·북·미 정상들의 회동은 역사적인 일이다. 미 현직 대통령이 사상 처음으로 북한 땅을 밟았고 세 정상이 휴전협정을 맺은 판문점에서 악수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이 모든 것이 트럼프 대통령의 즉흥적인 발상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어리석다. 대선을 앞둔 트럼프가 북핵 위기를 넘겼다는 자신의 치적을 과시하기 위해 이번 만남을 추진했고, 김정은 위원장도 하노이 회담 때 떨어진 자신의 위상을 회복하기 위해 응했을 가능성이 크다.
문 대통령은 말할 것도 없이 좋다. 우리 대통령의 역할이 위축돼 보인다는 비판도 있으나 현실이 그런 걸 어떡하나. 당선 이후 트럼프의 행보를 지켜보면서 ‘저렇게 즉흥적이고 쇼맨십이 강한 정치인도 국민의 호응을 받는구나’라는 생각과 ‘이러다 우리의 운명은 어떻게 되나’라는 우려가 교차한 것이 사실이다.
해변에 사는 어떤 사람이 갈매기와 친해 늘 가까이 와서 놀았다. 그것을 본 그의 아버지가 한 마리를 잡아오라고 했다. 그 사람은 아버지 말대로 다음날 바닷가로 나가 갈매기를 잡으려고 했으나 갈매기는 한 마리도 날아오지 않았다. 그의 기심(機心)을 알아차린 것이다. ‘열자’의 황제편(皇帝篇)에 나오는 글이다.
기심은 기회를 보아 움직이는 욕심, 책략을 꾸미는 마음을 말한다. 변화무쌍하고 냉혹한 세상에서 기심만을 탓할 수도 없다. 문제는 엄청난 권력을 가진 자들이 그 기심을 쓸 때다.
미·북 정상회담 의제는 첫째도 둘째도 북핵 폐기다. 당사자인 우리도 마찬가지다. 이 대전제가 사라지고 ‘비핵화 빠진 이벤트’를 트럼프는 재선의 도약대로 활용하고 김정은은 통치 기반을 공고히 하는데 기심으로 쓴다면 우리의 운명은 불을 보듯 뻔하다.
문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김정은을 핵 포기로 이끌 수 있는 유일한 길인 대북 제재만은 확고한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 그동안 문 대통령의 신념이었는지 아니면 정치적 계산인지는 차치하고라도, 북한으로부터 그런 수모를 받아가면서 여기까지 온 것은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를 위한 것이었음을 국민에게 보여줘야 한다.
‘오발이 명중이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골프공이 언덕에 맞았는데 튀어서 그린에 떨어진다거나 빗맞은 안타 등 의도치 않은 좋은 결과를 말한다. 트럼프의 좌충우돌식 언어와 행동은 지도자로서 자격 미달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도 희한하게 먹히는 것을 보면 오발탄이 마치 의도된 듯한 착각을 준다. 한편으로 계산된 치밀한 행동이 섞이니 우리는 헷갈릴 수밖에 없다.
트럼프가 미국 현지에 3조6천억원 규모의 투자를 한 롯데 신동빈 회장에게 보여준 환대를 보면 단순한 레토릭을 넘어 계산된 칭찬으로 보인다. 롯데는 자신의 골프장에 사드배치로 중국에서 가장 큰 보복을 당했기 때문이다.
이번 방한에서 우리 기업인들을 치켜세우며 찬사를 연발한 트럼프가 동맹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내밀 전방위적 청구서가 곧 도착할 것이다. 트럼프의 발언과 행동이 기심이든 오발(誤發)이든 우리의 명운에 결정적이니 우리의 대응도 치밀하여야 한다.
주역의 달인 대산 김석진 옹은 “중심을 지키고 바른 곳에 처하면 흉한 일이 생기지 않는다”고 했다. 중심을 지킨다는 것은 당당해야 한다는 뜻이다. 문 대통령이 명심해야 할 얘기다.
이인재 한국뉴욕주립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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