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고릴라’는 미국의 심리학자 사이먼스와 차브리스의 실험에서 유래한 말이다. 학생들을 두 팀으로 나눠 한 팀은 흰 옷을, 다른 팀은 검은 옷을 입게 했다. 이들이 농구공을 패스하는 장면을 찍어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색깔별로 팀의 패스 수를 세게 했다. 영상 중간에 고릴라 분장을 한 사람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실험 결과, 패스 숫자를 세는 데 집중한 나머지 둘 중 하나는 고릴라 분장을 보지 못했다.
이러한 현상이 우리 삶 속에도 비일비재하다. 학창 시절 친구들과 떠들 때 선생님이 다가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추억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운전 중에 휴대전화 사용이 위험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인간의 뇌는 ‘원소스 원아웃’ 즉 하나에 집중하면 하나를 간과하게 된다.
요즘 지방자치법 전부개정안이 ‘보이지 않는 고릴라’가 되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다. 우여곡절 끝에 개정안이 국회에 제출됐지만, 국회 파행으로 3개월 여 외면받았고, 아직도 행정안전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입법기관인 국회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니 지방자치 현장의 일꾼들은 좌불안석이다.
1988년 전면 개정된 지방자치법은 지난 31년 동안 거의 변함이 없었다. 오죽하면 지방자치법이 지방자치 발전의 발목을 잡는다는 말이 나올까. 지방자치법 전부개정이 조속히 이뤄져야 하는데 국회의 시계는 답답하기 그지없다. 9월부터 11월까지 국정감사를 해야 하고, 내년에는 총선 준비로 법 개정이 쉽지 않을 것이다. 국회 일정을 감안할 때 늦어도 12월까지는 현재 제출된 개정안이 반드시 국회를 통과해야 한다.
나는 지난주에 전국시도의회의장협의회 회장직에서 물러나는 소회를 밝히면서 지방자치법 개정안의 답보 상태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회장 취임 한 달여 만에 전국 시도의회에서 800여 명이 함께 국회에 모여 지방자치법 개정에 한목소리를 내었다. 주민과 가장 가까이에 있고 지역을 잘 아는 최일선 지방의원들이 주민을 대신해서 목소리를 높인 것이다. 이후에 시도 순회 토론회도 진행 중이다.
지방자치의 확대와 국민주권 강화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실현이며, 대한민국의 새로운 희망이다. 지방이 살아야 대한민국 국민이 행복하다. 지방의 일은 지방이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맡겨놓는 것이 국민 존중이다. 주민의 대의기관인 의회가 지방정부와 대등한 관계에서 일할 수 있도록 권한을 줘야 진정한 자치분권이다.
지방자치는 지방에 사는 우리 모두의 삶의 도구다. 그런데 이 제도가 정말 내 삶을 바꾸고 모두 함께 행복해질 수 있도록 운영되려면 법이 바뀌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보이지 않는 고릴라’가 되면 지난 31년과 마찬가지로 몸에 맞지 않는 옷과 같은 불편함과 불평등을 계속 겪을 수밖에 없다.
법을 바꿔서 다양성, 자율성, 창의성이 살아있는 지방자치 좀 제대로 해보자. 지방의회는 대의기관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정책지원 전문인력이 있어야 하고, 의회가 집행부를 견제, 감시하기 위해서는 의회 인사권이 의회에 있어야 한다.
제도의 기본을 바로 세우는 길은 법 개정밖에 없다. 우리 모두 눈을 크게 뜨고 고릴라를 보자. 다른 곳에 관심을 가지면 보이지 않는 고릴라. 그와 같은 ‘지방자치법 전부개정안’이 지금 국회에 있다. 지방을 살리는 법이다. 지방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송한준 경기도의회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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