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론] 허접한 말장난의 최후

2004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독일 국적의 사회학자 송두율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쪽에도, 저쪽에도 속하지 못하는 ‘경계인’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남과 북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의미인데 그동안의 행적이나 언행을 보면 영락없는 친북학자다. 또 그는 ‘북한을 ’내재적 접근‘ 방식으로 보아야 한다고도 했다. 북한의 입장에서 보면 북한의 실상이 쉽게 파악된다는 의미인데 왠지 말장난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요즘 툭하면 이념대립의 희생양처럼 모든 것을 미화하는 경향은 북한의 진실, 김정은 독재와 처참한 인권상황에 한 마디도 못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들로 이어지고 있다. 최근 평양에서 열린 코미디보다 못한 깜깜이 남북 축구에 대해 김현철 통일부 장관은 “자기들 나름대로 우리 측 응원단을 받지 않은 데 대한 공정성을 반영한 것 같다”는 망발까지 하고 있다. ’공정성‘이란 단어가 엉뚱한 데서 헤매고 있는 꼴이다.

과거 조국 전 장관이 SNS를 통해 말했던 단어들을 보면 ’학인(學人)으로서의 양심‘이라던가 ’테제의 타당성‘, ’앙가쥬망‘, ’시민의 미덕‘ 등등 평범한 국민은 잘 이해가 안 되는 말들을 자주 쓰고 있다. 찾기도 어려운 이런 말들을 쓰는 이유 뒤에는 진짜 목적이 따로 있다. 예를 들면 ’자주국방‘은 ’한미군사동맹 파기‘요, ’우리민족끼리‘는 ’주한미군 철수와 연방제 통일‘을 의미한다. 문 대통령이 자주 쓰는 ’무한한 인내와 대화와 타협‘은 ’북한에 대한 굴종과 양보‘로 보인다. 탈원전과 관련해 ’숙의(熟議)민주주의‘와 ’공론화‘는 결국 ’포퓰리즘‘과 ’합리화‘와 다를 게 없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해고금지‘와 ’급여인상’, ‘부자증세’란 의미로 해석하면 된다. 44년째 시를 쓰고 있는 김승희 시인은 “시(詩)라는 게 원래 말장난이지 않은가”라고 했다. 그녀가 쓴 ’좌파, 우파, 허파‘라는 시가 있다. 생명을 상징하는 ’허파‘는 특정 ’파‘에 속하지 않는다고 표현했다. 시인의 언어유희는 재미라도 있지만 최근 조국 사태 때 궤변과 요설로 국민을 분노케 했던 인간들의 말장난은 참기 힘들 정도다. 문 대통령이 말하는 ’공정‘이란 말도 도덕과 양심과 염치가 바탕이 돼야 울림이 있을 텐데 반성과 도덕이 없는 ’공정‘은 허구이고 기만이다. ”저를 지지하지 않았던 한 분 한 분도 국민으로 섬기겠다“던 취임사는 휴지조각이 된 지 오래다. 대통령은 시정연설에서 조국사태에 대한 인사 실패를 사과하기는커녕 단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공정‘이란 단어를 무려 27번 언급했지만 공허한 메아리처럼 들렸다.

검찰개혁에 대한 집착에서 보듯, ’개혁‘이란 것이 국민 전체가 아니라 정권 유지를 위한 것처럼 보인다. 이제 국민들은 문 대통령과 그의 호위병들이 틈만 나면 말하는 정의, 공정, 개혁, 혁신, 포용, 평화 같은 아름다운 말들이 독선, 위선, 불통, 배척, 굴종, 조롱이라는 의미임을 알게 됐다. 지금 우리는 사람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도덕성이나 인성, 자유민주주의적 가치, 사회적 윤리와 정의는 깡그리 무시한 채 우리 편이 무조건 옳다는 정권의 민낯을 보고 있다. 허공으로 흩어진 대통령과 측근의 허무한 말들이 우리를 화나게 하고 있다. 아직도 반성은커녕 계속 정국을 흔들어 정치적 야심을 챙기려고 한다. 언제까지 지켜봐야 하나.

이인재 한국뉴욕주립대 석좌교수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